소리를 사랑하는 국내 경영자들. 왼쪽부터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사진 조선일보 DB, 각 사
소리를 사랑하는 국내 경영자들. 왼쪽부터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사진 조선일보 DB, 각 사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경영인 중에서는 소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1분 1초를 다투는 쉴 틈 없는 일정 속에서도 음악을 통해 휴식을 취하고 경영 영감을 얻는 것. 연례 음악회를 창설·진행하고 아예 대형 콘서트홀을 짓는 CEO들도 있다.

해외 유명 팝 아티스트들이 집결하는 ‘슈퍼콘서트’를 만든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소리에 빠진 대표적인 CEO로 꼽힌다. 그는 과거 신제품 M카드 발표 행사장에서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러시아의 근현대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웅장한 관현악곡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 현대카드의 프리미엄 카드 ‘블랙’ 고객을 대상으로는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가 이츠하크 펄먼 등을 조용히 시내 작은 교회로 초청해 주요 고객(VVIP)만을 위한 비공개 연주회를 진행하기도 한다. 소규모로 진행되는 이 공연에는 내로라하는 CEO들이 참석해 음악을 즐긴다.

정 부회장은 서울 이태원동에 대형 레코드숍인 뮤직 라이브러리를 만들어 음악 보급에 힘쓰는 한편, 국내 신인 음악가들의 작품을 아날로그 LP 음반으로 제작해주는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장동기 신한금융투자 GMS그룹 부사장도 소리를 사랑하는 경영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서울 여의도동 집무실 한쪽에 덴마크의 명품 오디오 브랜드 ‘다인’의 액티브 스피커(앰프가 내장된 스피커)와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종종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경영 영감을 얻는다. 그의 사무실 한쪽에는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체코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 등 유명 클래식 작곡가들의 스코어(악보)가 놓여있다. 음악은 물론 디지털 음향 기기에 조예가 깊은 그는 국내 온라인 하이파이 동호회에서 유명한 디지털 음향 논객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장 부사장은 “현재도 시간을 쪼개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해 즐기고 있다”라고 했다.

재계에서는 클래식 공연장 금호아트홀을 만든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과 매년 열리는 교향악 축제와 한화 클래식 행사를 만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음악 사랑이 유명하다. 김 회장의 경우 아내가 유명한 클래식 애호가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12월 중 2020 한화 클래식 행사를 개최할 예정인데 코로나19 사태를 고려해 올해는 해외 연주자가 아닌 국내 유명 연주자들의 연주회로 꾸릴 예정이다”라고 전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경우 아내가 플루트 연주자다. 신세계는 예술의전당 마티네 공연을 정기 후원하고 있다.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도 ‘이건 음악회’를 23년째 개최하는 등 음악을 통한 사회 공헌에 앞장서고 있는 인물이다.

강영철 린나이코리아 사장도 클래식 애호가로 ‘린나이 팝스 오케스트라’를 꾸준히 가동하고 있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고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경우 음향에 관심이 많아 한때 오디오 사업을 영위하기도 했다. 지금도 온라인 중고 장터에서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삼성르네상스와 롯데매니아 브랜드의 제품이 그들이 만들었던 기기들이다. 고 이 회장은 고가 오디오 브랜드 엠페러를 만들기도 했다.

롯데그룹은 2016년 8월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몰에 정통 클래식 공연장인 롯데콘서트홀도 만들었다. 현재 이곳은 예술의전당에 버금가는 클래식 공연 명소로 떠올랐다.

이 밖에도 김석수 동서식품 회장은 최신 오디오 기기에 관심이 많아 새로운 기술이 집약된 네트워크 플레이어 시제품을 다수 구입해 자택에서 틈틈이 청음하고 있으며, 함영준 오뚜기 회장도 오디오 마니아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 역시 소문난 음악 애호가다.


롯데그룹이 2016년 8월 서울 송파구에 개관한 롯데 콘서트홀. 사진 롯데그룹
롯데그룹이 2016년 8월 서울 송파구에 개관한 롯데 콘서트홀. 사진 롯데그룹
한화그룹 주최로 매년 개최하는 교향악 축제의 공연 장면. 사진 한화그룹
한화그룹 주최로 매년 개최하는 교향악 축제의 공연 장면. 사진 한화그룹

기타리스트에서 CEO로 변신한 테라오 겐

해외 CEO의 경우 디지털 혁명의 선구자였던 애플의 스티브 잡스의 사후 그가 생전에 LP를 통해 아날로그 음악을 즐겼다는 등의 보도가 나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일본 가전제품 생산업체 발뮤다의 테라오 겐(寺尾玄) CEO는 프로 록 기타리스트 출신으로 공식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음악을 통해 아름다움을 알았고, 제품 디자인에도 항상 아름다움을 담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아날로그 음향을 사랑한 경영자들도 적지 않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현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이사장)은 루마니아 바이올린 연주가 조르주 에네스코가 연주한 희귀한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과 파르티타 LP(3장 1세트)를 보유한 것으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 이 음반은 시세가 높을 때는 무려 2000만원 이상에 거래된다.

유재후 전 외환은행(현 KEB하나은행) 본부장은 퇴직 후 현재 온라인 LP 레코드숍을 운영하고 있다.


plus point

사업가에서 전문 음악가로 변신한 해외 CEO들

해외에는 성공한 사업가에서 아예 전문적인 음악가로 변신한 인물들도 있다. 2016년 별세한 미국의 경영인 길버트 캐플런이 대표적인 사례다. 1942년 태어난 캐플런은 금융 전문가에서 지휘자로 변신에 성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20대에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14만 부 이상 발행하는 영향력 있는 금융 잡지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Institutional Investor)’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1981년 당시 39세였던 적지 않은 나이로 남몰래 키워왔던 꿈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젊은 시절 그에게 용기와 영감을 준 오스트리아의 근현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부활)’을 직접 지휘해보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CEO 역임 중 개인 교사를 초빙해 매일 5시간 이상을 음악 공부에 투자했다. 그는 1983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부활’을 처음으로 연주했다. 그의 열정이 음악에 투영됐기 때문인지, 점차 평론가들과 청중의 지지를 받았다.

‘미국 현대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작곡가 찰스 아이브스(1874~1954)는 보험사 사장에서 성공한 작곡가로 변신한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아이브스는 1894년부터 4년간 명문 예일대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며, 그동안 오르간 공부도 계속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뉴욕의 보험회사에 취직함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로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다. 그는 1906년에는 본인 이름을 딴 ‘아이브스 보험회사’를 설립, 3년 후에는 ‘아이브스 & 마이릭 생명보험회사’로 발전시켜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보험회사로 육성했다. 1930년까지 부사장으로 재임한 아이브스는 점심시간과 밤에 작곡에 전념하면서, 언제 연주될지도 모르는 채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그의 업적이 인정돼 작곡 후 40년간이나 묻혀 있던 명곡 ‘교향곡 3번’이 햇빛을 보게 됐고, 1947년에는 퓰리처상까지 받는 성과를 거뒀다.

김문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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