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12월 14일(현지시각) 전 세계의 이목이 미국에 쏠렸다. 미국 국민 3억3000만 명에게 접종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수송 작전이 시작된 날이기 때문이다. 일일 신규 확진자 수가 여전히 20만 명에 이르는 상황인데도, 지나가는 수송 트럭을 향해 환호하는 미국 국민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날 미시간과 위스콘신의 화이자 백신 공장에서 생산된 백신은 뉴욕·LA·필라델피아·휴스턴 등 미국 각 도시로 운송됐다. 미국 정부의 백신 개발 프로젝트 ‘초고속 작전(Operation Warp Speed)’을 지휘하는 구스타프 퍼나 육군 대장은 앞서 열린 브리핑에서 “미국과 연합군이 1944년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쳤던 디데이(D-day)는 제2차 세계대전의 중대한 전환점이자 전쟁 종말의 시작이었다”라며 “오늘 (코로나19와 전쟁에서)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라고 했다.

#장면2 같은 날 한국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서서히 잡혀가는 듯했던 일일 확진자 수가 다시 급증해 1000명을 넘나들고 있어서다. 질병관리청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12월 16일 0시 기준 누적 확진자는 전날보다 1078명 늘어난 4만5442명이었다. 얼마 전까지 K방역의 성공을 자화자찬하던 모습은 사라졌다. 일상 복귀를 꿈꾸던 상권은 다시 얼어붙었다. 12월 14일 찾아간 서울 왕십리 ‘한양대 음식문화 거리’에서는 행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몇몇 가게 문에 ‘거리 두기 기간엔 영업하지 않겠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다음 날 발길을 서울 종로 탑골공원 선별진료소 앞으로 옮겼다. 겨울 칼바람에도 검사를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였다.


게임 체인저 백신

참 아이러니하다. 일일 확진자 수가 한국보다 200배 많은 미국은 웃고, 방역 성공 사례로 거론되던 한국은 고통에 신음한다. 두 나라 분위기를 가른 건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기존의 판을 바꾸는 존재)’ 코로나19 백신의 등장이다. 이제 고난을 끝낼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은 쪽은 힘을 내기 시작했고, 그 희망을 언제 붙잡을지 모르는 쪽은 초조해졌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는 “코로나19 같은 신종 감염증은 앞으로도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 심지어 찾아오는 주기가 점점 짧아질 가능성도 있다. 이런 추측을 나만 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최 교수뿐 아니라 많은 전문가가 앞으로 인류를 위협할 가장 큰 존재로 바이러스를 꼽는다. 백신을 손에 쥔 미국과 그러지 못한 한국의 온도 차는 다가올 미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전 세계의 ‘백신 주권’ 다툼은 날로 치열해질 것이다.

미국은 올해 초 코로나19가 확산 조짐을 보일 때부터 백신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부 주도의 ‘초고속 작전’을 발표한 뒤 백신 개발 후보 기업을 선정하고,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모더나 9억5500만달러(약 1조420억원), 아스트라제네카 10억달러(약 1조원) 등 미국 정부가 백신 개발사에 지원한 자금만 약 14조원에 달한다. 또 공격적으로 선구매 계약을 맺으며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백신을 확보했다. 개발과 확보 전략을 동시다발적으로 추구한 것이다.

반면 한국은 최근에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내년 상반기부터 단계적으로 접종에 들어갈 예정이다. 


왼쪽부터 12월 14일 서울 왕십리 ‘한양대 음식문화 거리’가 텅 비어있다. 12월 15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 선별진료소 앞에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 사진 유혜정 인턴기자
왼쪽부터 12월 14일 서울 왕십리 ‘한양대 음식문화 거리’가 텅 비어있다. 12월 15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 선별진료소 앞에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 사진 유혜정 인턴기자

백신 없으면 국가 경제도 와르르

백신은 비단 한 국가 국민의 목숨 부지 차원에서만 의미를 갖는 게 아니다. 코로나19로 시작해 코로나19로 끝난 2020년을 겪으며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국가 경제를 통째로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생명은 물론 집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백신 주권을 반드시 손에 쥐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은행 기업경영분석 자료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업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1%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한국은행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 적용으로 민간소비와 국내총생산(GDP)이 각각 13.4%, 6.4%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3단계 적용 시에는 16.6%, 8% 주저앉는다.

이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프랑스 중앙은행인 방크드프랑스는 최근 발간한 거시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2020년 GDP가 9%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방크드프랑스는 2021년과 2022년에는 GDP가 각각 5% 안팎으로 늘어나겠지만, 코로나19 확산세가 지속한다면 덩달아 마이너스 성장 흐름도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리시 수낙 영국 재무장관은 “올해 영국 경제가 -11.3% 성장해 300년 이래 최악의 성적표를 거둘 것”이라고 예상했다.

브루스 리 박사가 이끄는 미국 뉴욕시립대 연구팀은 공중보건 분야 국제 학술지 ‘헬스 어페어스(Health Affairs)’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미국 인구의 20%가 코로나19에 감염될 경우 1600억달러(약 175조원)의 비용 지출이 발생하고, 80%가 감염되면 6500억달러(약 711조원)를 쓰게 될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이코노미조선’이 2020년 마지막 호의 주제를 ‘백신’으로 선정한 이유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우리는 백신이 한 인간을 보호하는 갑옷이자 한 국가를 지켜주는 장벽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번 기획에서 ‘이코노미조선’은 제약·바이오 선진국과 글로벌 ‘빅 파마(Big Pharma)’가 살벌한 백신 주권 경쟁에서 어떤 전략을 취하고 있는지 살피고, 한국의 위치를 냉정하게 봤다. 또 국제기구·학계·업계 등에서 활동하는 국내외 전문가들을 만나 백신을 포함한 신약 개발 산업 육성의 필요성에 대해 들었다.

이번 기획이 백신 강국을 향해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항해에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무엇보다 모든 ‘이코노미조선’ 독자의 건강을 기원한다.

전준범·박용선 기자, 유혜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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