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서울대 재료공학 학사, 카이스트(KAIST) 석사, 프랑스 블레즈파스칼대 공학 박사, 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전 재료미세조직 창의연구단 단장, 제8대 울산대 총장, 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제7대 포스텍 총장, 현 울산공업학원 이사장 /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김도연
서울대 재료공학 학사, 카이스트(KAIST) 석사, 프랑스 블레즈파스칼대 공학 박사, 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전 재료미세조직 창의연구단 단장, 제8대 울산대 총장, 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제7대 포스텍 총장, 현 울산공업학원 이사장 /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연구 예산을 받은 상황이라고 치자. 이 돈을 어느 파트에 배분하고, 어떻게 쓰면 좋은지를 누가 가장 잘 알까. 당연히 KIST다. 자신들이 어떤 연구를 잘하는지 아니까. 그런데 한국은 자잘한 연구 과제까지 정부 관료가 통제한다. 믿고 맡기지 못한다.”

2020년 12월 23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김도연(69)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현 울산공업학원 이사장) 손에는 몇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 사전 질문지를 빼곡히 채운 붉은색 글자들이 김 전 장관의 숙고(熟考)를 대변했다. “기왕이면 도움 되는 말을 하고 싶어 오랫동안 생각했다.” 190㎝에 이르는 장신인 그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김 전 장관은 무기 재료(세라믹) 분야에서 발표한 논문만 200편이 넘는 국내 최고 권위자다.

성실한 대화를 예고한 김 전 장관이 처음 꺼낸 키워드는 ‘신뢰’였다. 연구자이자 교육자·행정가로 지낸 40여 년 동안 곳곳에서 믿음의 부재(不在)를 목격했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은 서로 믿지 못해 불행한 사회다. 불신은 정부와 출연연구기관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정치·정책·기업·교육·법 등을 향한 불신이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하다. 각자도생과 고속 성장의 역사가 낳은 아픔이다.”

김 전 장관은 불신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예로 들었다. “많은 전문가가 창의적인 인재를 키우려면 현 수능 방식을 프랑스의 대학 입시 제도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처럼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50만 명을 단 하루의 테스트로 줄 세운다. 왜 그럴까. 주관적인 평가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바칼로레아는 주관식 서술형 문제를 내는 시험으로 유명하다. 학생의 단편적인 지식보다는 깊은 사고력과 창의력·문장력 등을 보겠다는 취지다. 시험 일정도 일주일 정도로 길다. 김 전 장관은 서로 잘 믿지 않는 한국 같은 사회에서는 객관적인 점수가 나와야만 잡음이 안 생기다 보니 수능 제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개선할 엄두를 못 내는 것이라고 했다.

“수능 제도하에서 입시생은 기계처럼 정답을 찾아야 하고, 학원에서는 ‘5분 이상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그냥 넘어가라’고 가르친다. 대다수 학생이 충분히 생각한 뒤 결론에 도달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다. 정답을 빨리 찾는 연습을 12년 동안 반복해야만 대학 문이 열린다. 무슨 수로 창의적 인재가 쏟아지겠나.”


대통령도 과학 무관심

불신 사회의 대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김 전 장관은 이런 교육 분위기에서 자란 이들이 운영하는 나라에서는 국력의 뼈대라 할 수 있는 기초과학도 성장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열변을 토하던 그가 스마트폰 검색창에서 ‘헌법 127조’를 검색했다.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해 국민 경제 발전에 노력해야 한다”라는 해당 헌법 문구가 나왔다.

김 전 장관은 “경제 발전을 위해 과학기술을 진흥한다는 내용이다. 이 문장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겠지만,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의 인식이 어떤지를 알 수 있는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그는 과학과 기술을 같은 개념으로 묶어 경제 발전의 도구로 취급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했다.

“일본도 과학‘과’ 기술로 표기하고, 서양권도 사이언스 ‘앤드’ 테크놀로지(science and technology)로 명시한다. 둘의 근본이 달라서다. 과학이 돈으로 지식을 만드는 일이라면, 기술은 돈을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은 헌법에서부터 이 둘을 그냥 ‘과학기술’로 뭉뚱그려놨다. 과학과 기술은 엄연히 다르다. 대학에 왜 공대가 따로 있고 자연대가 따로 있겠나.”

김 전 장관은 과학이 기술과 함께 경제 발전의 도구인 나라에서는 연구자들도 단기 성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상용화 가능 여부가 연구비 지원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기초과학은 답이 없는 문제,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향한 도전”이라며 “국가의 과학 진흥 철학과 기술 진흥 철학은 철저히 구분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 정부가 기초과학 강화를 위한 노력을 안 했던 건 아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와 일본 이화학연구원(RIKEN) 모델을 참조해 세운 ‘기초과학연구원(IBS)’이 대표적이다. 당시 정부는 한국의 기초과학 경쟁력을 높이겠다며 해외 석학을 IBS 연구단장으로 영입하고 10년간 매년 100억원의 뭉칫돈을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정권 교체와 함께 IBS 예산이 60억원 수준으로 줄었다.

김 전 장관은 “100억원 지원하겠다고 외국인 설득해 데려와 놓고 예산 반 토막 내면 어느 석학이 한국에 다시 오려고 하겠나”라며 “한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이 정권에 따라 온도 차를 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그는 현 정권의 과학·기술 관심도는 특히 아쉽다고 했다. “지난 1년 동안 온 나라가 법무부 이야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가을이 되면 ‘한국은 노벨상 언제 받을 수 있겠냐’고 한다. 국가 지도자부터 무관심한데 말이다.”


협력해야 멀리 간다

끝으로 김 전 장관은 2021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코사족의 속담을 언급했다. 2020년 모든 국민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힘든 일 년을 보낸 만큼 개인에게도 조직에도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협력을 잘하는 방법은 뭘까. 김 전 장관은 “서로 믿어야 한다”고 했다. 신뢰의 중요성에 관한 열변으로 시작한 인터뷰가 신뢰의 필요성으로 마무리됐다. 김 전 장관에게 신뢰는 모든 문제를 푸는 출발점이자 종착지였다.

전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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