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영국 런던은 미국 뉴욕과 함께 글로벌 금융허브 도시로 꼽혀왔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런던은 금융허브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사진은 영국 런던의 모습.
수년간 영국 런던은 미국 뉴욕과 함께 글로벌 금융허브 도시로 꼽혀왔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런던은 금융허브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사진은 영국 런던의 모습.

‘상장사 차등의결권 부여’ ‘기술 인재 유치를 위한 비자 개혁’ ‘비용의 130%를 세액공제하는 사상 첫 슈퍼 공제’ ‘경제특구 프리포트(freeport) 8곳 첫 지정’

3월 3일 영국이 하루 새 내놓은 각종 부양책 일부 사례다. 리시 수낙 영국 재무장관은 상장 규정 개혁 보고서에 대한 성명과 하원에서 행한 예산연설 등을 통해 영국 경제 체질 전환 대책을 쏟아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충격뿐 아니라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후폭풍을 기회로 반전시키기 위한 포석이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3월 이후 70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마이너스 10%(2020년) 성장으로 300년 만에 가장 큰 폭의 경기 위축을 겪었다(수낙 장관)”는 영국 거시경제의 위기감을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영국 경제의 약 6%를 떠받친 런던의 국제 금융허브 위상이 흔들리고 있어서다. 런던은 지난 1월 유럽 최대 주식 거래 중심지 자리를 유로넥스트가 있는 암스테르담에 빼앗겼다. 브렉시트 발효 첫 달 성적표는 “브렉시트로 영국 금융 서비스 미래가 불확실해졌다(1월 5일 자 CNBC)”는 우려의 현실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올해 1월 영국의 EU 수출이 60% 이상 급감하는 등 주류 등 수출 업체들도 브렉시트 발효 이후 통관 애로를 호소하고 있다.


뉴욕에 밀리고, 암스테르담에도 뒤처지는 런던

런던이 국제 금융허브(중심지) 위상 위축이 가시화하기 시작한 건 브렉시트를 결정한 국민투표 2년 후인 2018년이었다. 2018년 9월 영국계 컨설팅그룹 지/옌(Z/YEN)의 국제금융센터 지수에서 런던은 처음 2위로 밀리며 미국의 뉴욕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지/옌은 매년 3월과 9월 금융 산업 종사자 2500여 명을 대상으로 전 세계 금융 중심지의 인프라, 우수 인력 접근성 등의 요소를 평가하고 있다.

브렉시트가 발효된 올해 첫 달 하루 86억유로(약 11조6900억원) 규모의 주식 거래가 이뤄진 런던이 하루 92억유로(약 12조5000억원) 주식 거래를 기록한 암스테르담에 뒤진 것도 이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지난해만 해도 하루 평균 주식 거래량은 런던이 175억유로(약 23조7700억원), 암스테르담이 26억유로(약 3조5300억원)였다.

올해 첫 거래일, 런던에서 EU 국가들로 옮겨간 주식 거래 자금은 60억유로(약 8조1300억원)에 달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월 4일 “독일 은행 도이체방크, 프랑스 석유 업체 토털, 스페인 은행 산탄데르 등 EU 주요 기업의 주식 거래가 런던이 아닌 프랑크푸르트·파리·마드리드 증권거래소에서 이뤄졌다”고 전했다. 시카고옵션거래소(CBOE) 유럽법인은 런던의 유로화 표시 주식 거래 90%를, 런던증권거래소(LSE)가 경영권을 가진 터코이스는 대부분의 유로화 표시 주식 거래를 각각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유로화 금리 스와프 거래도 상황은 비슷하다. IHS마킷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2월 유로화 금리 스와프 시장에서 암스테르담·파리의 거래 플랫폼 점유율은 25%였다. 지난해 7월 10%에서 두 배 이상으로 확대된 것이다. 런던의 점유율은 같은 기간 40%를 약간 밑도는 수준에서 10% 조금 넘는 수준으로 줄며 역전당했다. 전 세계 기업공개(IPO)도 영국 시장을 비껴갔다. 시장조사 기관 딜로직에 따르면, 올해 미국 증시에서 IPO로 조달한 규모는 879억9000만달러(약 99조 330억원)였다. 영국 증시(45억4000만달러)의 약 20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영국과 EU는 브렉시트 연착륙을 위해 작년 12월 새 무역협정을 체결했지만, 금융 서비스 분야까지는 공식적인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알라스데어 헤인스 아퀴스증권거래소 최고경영자(CEO)는 “런던이 유럽의 주식 비즈니스를 잃었다”며 “(주식 거래가) 빅뱅을 일으킨 게 아니라 ‘빵’ 하고 사라졌다”고 했다.


디지털 빅뱅, 대처의 금융 빅뱅 재현할까

영국 정부는1986년 마거릿 대처 총리의 금융 개혁이 런던을 국제 금융허브로 도약시킨 ‘금융 빅뱅’을 소환하고 있다. 수낙 장관은 3월 3일 성명을 통해 조너선 힐 전 EU 금융 서비스 담당 집행위원 주도로 작성된 보고서 속 제안을 신속히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밝혔다. 보고서엔 차등의결권 부여와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 상장 요건 완화 등이 담겼다. 앞서 월드페이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론 칼리파가 정부 위탁을 받아 내놓은 보고서는 영국 핀테크가 ‘디지털 빅뱅’을 촉발할 규제 완화 등 다양한 제안을 담았다. 여기에는 핀테크 분야를 포함해 세계적인 인재 확보를 위한 기술 비자도 포함됐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월 28일 사설을 통해 “영국이 브렉시트를 계기로 금융 규제를 핀테크 기업과 기업 자본에 더 매력적으로 바꾼다면 이는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라며 “이는 과거 금융허브의 영광을 지키는 것이 아닌 미래를 위한 것”이라 보도했다. 위기 상황에서 적절한 규제 완화 정책을 펼치면 영국이 오히려 금융 빅뱅의 중심지 역할을 할 것이라는 논리다.

브렉시트 후폭풍은 금융 영역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영국의 위스키 등 주류를 생산하는 중소 업체들이 EU 수출을 위한 통관이 지체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FT가 최근 전했다. 복잡해진 통관 절차는 영국의 1월 EU 수출 물량이 전년보다 68% 급감한 것과 무관치 않다. 2월 7일 가디언은 영국 운송업 대표기구인 도로화물협회(RHA)가 같은 달 1일 마이클 고브 국무조정실장에게 서한을 보내 이 같은 수치를 제시하며 업계의 고통을 호소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복잡해진 통관 절차에 수출이 지연되고, 운임이 치솟아 타격이 크다고 목소리 냈다.

수낙 장관은 예산연설에서 브렉시트로 EU 밖으로 나온 영국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정책은 자유무역을 독려하는 것이라며 관세와 세금을 줄이고, 법인 설립을 용인하게 하는 등 경제특구 성격의 프리포트를 조성해 전통 산업을 그린·혁신·고성장 신산업으로 대체하겠다고 밝혔다. 테임즈 등 8곳의 첫 프리포트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영국 사상 처음으로 비용의 130%까지 세액공제해주는 슈퍼 공제를 시행하겠다고도 했다. 브렉시트 후폭풍에 세계 5위 경제 대국 영국이 쇠락의 길로 들어설지, 개혁을 통해 도약할지 갈림길에 들어섰다.

안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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