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인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에 완성차 업체들이 공장 가동을 멈추고 있다. 사진은 독일 츠비카우 폴크스바겐 공장 조립 라인. 사진 블룸버그
전 세계적인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에 완성차 업체들이 공장 가동을 멈추고 있다. 사진은 독일 츠비카우 폴크스바겐 공장 조립 라인. 사진 블룸버그

3월 9일 대만의 반도체 업체 경영자와 엔지니어 19명의 집마다 압수수색영장을 든 검찰이 들이닥쳤다. 중국의 비트코인 채굴 업체 비트메인(Bitmain)이 대만에 위장 기업을 세운 뒤 100명 이상의 대만 반도체 기술자를 채용했다가 대만 당국에 적발됐다. 대만 검찰에 따르면 베이징에 본사를 둔 비트메인은 2018년부터 이 위장 기업을 통해 차세대 반도체로 주목받는 인공지능(AI) 칩을 개발해왔다.

중국의 해외 반도체 기술 유출 시도가 적발된 건 처음이 아니다. 한국, 미국 등에서도 ‘반도체 기술 패권’을 빼앗고 또 지키려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전면에 기업뿐 아니라 정부가 있다. 대만은 전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기업 TSMC를 보유한 반도체 강국이다. 추격자 신분인 중국 입장에서는 대만의 우수한 반도체 기술자를 늘 탐낼 수밖에 없다. 인재 확보는 기술 확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만 반도체 기업 이메모리 테크놀로지의 찰스 수 회장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현재 대만에는 중국이 세운 반도체 설계 회사가 많다”라며 “그들(중국)은 대만 현지에서 직접 반도체 엔지니어를 채용한다”라고 했다.

중국은 2014년 6월 ‘반도체산업발전추진요강’을 발표하면서 “1조위안(약 175조원)을 투자해 2020년 반도체 자급률 40%를 달성하고, 2025년에는 7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2019년 기준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15.7%(IC인사이츠 조사)에 불과했다. 2020년 중국의 반도체 수입액은 3500억달러(약 398조원) 규모였다. 이는 작년 중국 총수입액의 13%에 해당한다.

중국의 발목을 잡은 건 수년간 중국과 기술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5월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를 블랙리스트로 지정하고, 미국 기업이 핵심기술을 수출하려면 사전 승인을 얻도록 했다. 미국 소프트웨어나 장비·기술을 활용한 반도체를 화웨이에 공급하려면 미 당국의 허가를 받으라고 했다. 미국은 규제 대상에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 SMIC까지 추가했다.

미국이 G2(주요 2개국)로 성장한 중국의 반도체 굴기 봉쇄에 사활을 거는 건 이 좁쌀만 한 전자칩을 누가 더 강하게 쥐고 있느냐에 국가의 명운이 걸렸다고 판단해서다. 빅데이터·자율주행·AI(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변하는 모든 핵심 기술의 정중앙에 반도체가 장착돼 있고, 이들 기술은 비즈니스뿐 아니라 군사 영역에도 광범위하게 적용됐다. 3월 1일 미국 AI 국가안보위원회(NSCAI)가 반도체 설계·생산을 대만에 의존하는 구조가 상업적·군사적으로 힘이 되는 초소형 전자공학의 우위를 잃게 할 수 있다며 자국 내에 반도체 생산 기지를 재건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중국 상하이무역관은 “미국의 제재 이후 화웨이·SMIC 등 중국 주요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며 “이는 중국이 반도체 재료·설비의 국산화를 추진하는 데 새로운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라고 했다.


팬데믹 이후 자체 생산 강화 기조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G2 경쟁이 날로 격해지던 상황에서 인류를 강타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반도체 자립에 대한 세계 각국의 니즈를 일깨웠다. 정보기술(IT) 기반의 비대면 사회가 야기한 반도체 수급 불균형은 단돈 2~3달러짜리 칩 하나를 구하지 못해 고급 승용차와 스마트폰을 만들 수 없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EC)와 조 바이든 미국 정부가 반도체 공급망 재건에 나선 배경이다.

EC는 3월 9일 2030년까지 1345억유로(약 182조원)를 투입해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20%를 유럽 내에서 책임지겠다는 내용의 ‘2030 디지털 캠퍼스’ 계획을 발표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는 유럽이 자체적으로 반도체 설비를 구축하기보다는 삼성전자·TSMC 등의 파운드리 업체 공장을 유치하는 방식으로 생산 규모를 늘려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업계 한 관계자는 “업계 강자들이 이미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유럽업체가 무리해서 자체 생산 설비를 짓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세계 IT 기업들의 반도체 거점을 유치해 반도체 인력 양성에도 나설 전망이다. 애플은 내년 가동 목표로 독일 뮌헨에 유럽 반도체칩 디자인센터를 세울 예정이다. 10억유로(약 1조3000억원)를 투입한다.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중국 견제에 반도체 수급 안정까지 추구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2월 24일 반도체, 전기차용 대용량 배터리, 희토류, 의약품 등 4대 핵심 품목의 공급 사슬을 100일간 검토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국내 대형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미국이 동맹국과 협력을 강화해 반도체 수급을 강화할 경우 국내 기업에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마이크론 등 자국 기업 지원에 초점을 맞추면 셈법이 복잡해진다”라고 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국 반도체 공장의 위상도 흔들릴 수 있다. 거세지는 반도체 국수주의에 기회와 위기가 병존하는 것이다.

오는 2030년 파운드리 세계 1위를 내건 ‘시스템 반도체 비전과 전략’을 2019년 발표한 정부는 지난해 10월 인공지능(AI) 반도체 선도 국가 실행 계획을 내놓은 데 이어 3월 10일 차량용 반도체를 키우기 위해 2022년까지 관련 연구개발(R&D)에 2000억원을 투입하는 대책을 마련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차량용 반도체는 자동차 산업의 핵심 부품일 뿐 아니라 미래 차 전환으로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며 “단기 수급 불안 해소와 중장기 공급망 개선이 절실하다”라고 했다. 반도체 생산 기지 재건에 나선 미국과 유럽, 추격하는 중국, 경쟁하는 대만과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에 대한 숙제가 ‘반도체 코리아’ 앞에 놓여 있다.

전준범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