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1년 3월 11일,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쓰나미’라는 검색어가 폭증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뉴스를 검색하자 흙탕물이 된 파도가 서서히 해안을 집어삼키는 영상이 떴다. 영화가 아니었다. 일본 먼바다에서 시작된 지진이 쓰나미를 몰고 오고 있었다. 동일본 대지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사무실에 있던 나와 후배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지진은 남의 얘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2017년 11월 15일 경북 포항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규모 5.4의 지진은 집을 무너뜨리고 대형마트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서울에서도 지반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는 제보가 속출했다. 만약 이런 재해 현장에 내가 갇혔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현대차는 세계 최대 정보기술·가전 박람회 CES 2019에서 걸을 수 있는 자동차 ‘엘리베이트 콘셉트(Elevate Concept)’를 선보였다. 네 개의 바퀴에 접었다 펼 수 있는 다리를 달았는데 도로를 달릴 땐 다리를 접어 바퀴를 굴리고, 계단을 오르거나 험지를 가야 할 땐 다리를 펴고 저벅저벅 걷는다. 차체가 흔들리지 않도록 수평을 유지하면서 걸을 뿐 아니라 1.5m 높이의 벽을 뛰어넘거나 1.5m 너비의 틈을 건너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현대차는 왜 이런 차를 만들었을까? 사람이 가기 어려운 곳이나 건물 잔해 등으로 아수라장이 된 재해 현장에서 구조와 수색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계단을 오르는 것도 가능해 불이 난 건물에 갇힌 사람을 구조하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유용한 교통수단이 될 수도 있다.
지난 2월 현대차는 걸을 수 있는 자율주행 모빌리티를 또 선보였다. 길이 약 80㎝, 폭 약 40㎝의 ‘타이거(TIGER)’가 그 주인공이다. 엘리베이트 콘셉트처럼 바퀴 달린 네 개의 다리를 갖춰 장애물이 앞에 있으면 다리를 펴고 넘어간다. 단, 사람은 탈 수 없다. 현대차는 사람이 가기 어려운 지형을 탐사하고 연구하거나, 재해 현장 등에서 긴급 보급품을 수송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 이 모빌리티를 개발했다. 오지로 상품을 배송하는 일도 맡길 수 있다.
이런 차를 생각한 건 현대차뿐만이 아니다. 혼다가 CES 2019에서 공개한 자율주행 작업 차량 역시 재해 현장이나 오지를 스스로 누빌 수 있는 모빌리티다. 엘리베이트 콘셉트처럼 걸을 순 없지만, 혼다의 전지형차(ATV) 섀시에 네바퀴굴림 시스템을 얹어 험한 길도 거침없이 갈 수 있다. 위성항법시스템(GPS)과 센서가 주변 지형을 파악하는 덕에 울퉁불퉁한 바위는 물론 눈길도 거뜬하다. 혼다는 재해 현장뿐 아니라 다양한 작업장에서 이 모빌리티를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사장에서 벽돌이나 기둥을 나르는 것은 물론 농장에서 토마토나 사과를 따게 할 수도 있다. 눈 덮인 도로를 치우거나 석탄 등을 운반하는 것도 가능하다. 혼다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태양광 발전소와 콜로라도의 산불 진화 현장, 캘리포니아의 농장에서 실제 테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대차와 혼다가 재해 현장을 누빌 수 있는 자율주행 콘셉트카를 연구 중이라면 닛산은 당장이라도 재해 현장에 뛰어들 수 있는, 보다 현실적인 차에 눈을 돌렸다. 2017년 뉴욕 모터쇼에서 공개한 ‘로그 워리어 트레일 프로젝트(Rogue Warrior Trail Project)’는 페이스리프트(부분변경)된 로그에 둥근 바퀴 대신 철판을 체인처럼 연결한 트랙을 달았다. 탱크 바퀴에 쓰이는 것과 비슷한 이 트랙은 길이가 1220㎜, 높이가 760㎜, 너비가 380㎜로 울퉁불퉁한 바위를 거뜬히 타고 넘을 수 있다. 진흙으로 덮인 길에서도 문제없다. 닛산 엔지니어들은 큼직한 트랙이 로그의 휠 하우스에 맞지 않아 서스펜션과 휠을 모두 트랙 시스템에 맞게 다듬었다. 하지만 로그의 4기통 휘발유 엔진과 X트로닉 변속기는 그대로 뒀다. 최고 출력 170마력, 최대 토크 24.2㎏‧m로 눈 덮인 언덕이나 모래 둔덕을 넘기엔 충분한 힘이다. 단, 트랙을 감은 탓에 최고 속도는 시속 100㎞를 넘지 못한다.
닛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엔 재해 현장을 누비며 전력을 공급할 특별한 전기차를 생각했다. 리프를 기반으로 만든 ‘리(RE)-리프’는 닛산이 2010년 개발한 양방향 충전 능력을 갖췄다. 전기차 충전기로 차의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충전된 배터리가 전자제품 등에 전기를 내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전기차가 발전기 역할을 하는 셈이다. 닛산은 재해 현장에서 복구 과정에 필요한 장비에 전기를 공급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조수석 쪽 사이드미러 아래에 100~230V 플러그를 꽂을 수 있는 방수 소켓이 있는데 여기에 전자제품의 플러그를 꽂으면 바로 전기가 들어온다. 바닥에는 62㎾h 리튬이온 배터리를 깔았는데 이 정도면 유럽의 평균 가정이 엿새 동안 쓰는 전력을 충당할 수 있다는 게 닛산 관계자의 설명이다.
리-리프는 생긴 것도 그냥 리프와는 조금 다르다. 돌이나 나무, 아스팔트 조각 등 잔해물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차고를 높게 설계했다. 신발도 거친 길을 거뜬히 달릴 수 있도록 오프로드 타이어를 신었다. 지붕에는 서치라이트도 달았다. 그러고 보니 닛산은 리프 배터리에 담긴 전기를 집으로 보내거나 집에 저장된 전기로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스마트 하우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닛산은 재해에 진지하다.
재해는 언제든 닥칠 수 있고 누구나 겪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자동차 회사 역시 나름의 방법을 모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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