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논나는 “삶의 진짜 가치는 내 시간을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 조선일보 DB
밀라논나는 “삶의 진짜 가치는 내 시간을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 조선일보 DB

코로나19와 내전으로 한층 풀 죽은 지구 공동체의 모퉁이에, 어느 날 산전수전 다 겪고도 찌들지 않은 상큼한 할머니가 나타났다. 작전명 ‘밀라논나(밀라노 할머니라는 뜻)’. ‘차오, 아미치(안녕, 친구들)’라는 인사말로 동서양과 세대의 경계를 경쾌하게 허물어뜨린 이 유니크한 노인 앞으로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유튜브 세상에 벼락처럼 떨어진 축복, 밀라논나(구독자 88만 명). 겉으론 패션 유튜버, 알고 보면 인생 철학자인 70세 유튜버 장명숙을 만났다. 인생의 절반을 밀라노와 서울을 오가며 반도의 햇볕에 그을린 할머니에게서 영적인 즐거움이 흘러넘쳤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라는 그의 에세이가 발간된 직후였다. 장명숙은 한국인 최초의 밀라노 패션 유학생이었다. 삼풍백화점 고문으로 일하며 페라가모, 막스마라를 들여왔고, 86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의상을 디자인했다. 이탈리아 명품을 들여온 패션 선구자지만, 그를 만난 날은 이태원에서 산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느 날 유튜브 세상에서 요정처럼 ‘뿅’ 하고 나타나셨다. 대한민국에 없던 모델이라 깜짝 놀랐다
“아유~ 이 나이에 무슨 요정, 내가 더 놀랐다. 8세 어린이부터 83세 노인까지 댓글이 수천 개씩 달려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좋은 어른’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뜨겁다. 화제의 토크쇼에 초대되고, 스타들이 찾아오고, 수만 명이 댓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혜를 묻는데, 기분이 어떤가
“나쁘진 않다. 얼마 전 자동차 광고도 찍었다. 그 돈으로 꼬맹이들(그가 돌보는 보육원의 어린아이들) 맛있는 거 사 줄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연금에 맞춰 살도록 생활을 간소하게 설계해 놨다.”

후원하는 보육원, 청소년 쉼터가 많아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지 않을 뿐, 광고 출연료도 인세도 전부 기부로 돌려놓은 터라 돈 얘기에 스스럼이 없었다.

애씀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젊은이들에게 위로가 된다
“살아보니 인생이 진짜 별 게 아니다. 산이면 넘고 강이면 건너는 거다.”

그런 여유와 배짱은 어디서 나오나
“어느 날 멀쩡하던 자식이 중환자실에 들어가 뇌수술을 받았다. 이듬해엔 하루아침에 출근하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져서 동료를 잃고 직장을 잃고. 그런 일 겪으면 인생관이 바뀐다. 아무 일 없이 평탄했으면 내 인생 콘텐츠도 없었겠지.”

나이의 첩첩산중을 어떻게 넘었나
“삶의 동선이 좀 드라마틱했다. 일하며 봉사하며, 청와대부터 아프리카 난민촌까지 두루 가봤다. 패션계에서 일했으니 파리, 런던, 밀라노의 쇼와 파티는 또 얼마나 화려했겠나. 위로는 고대광실(高臺廣室·고래등처럼 넓은 기와집) 교황청부터 아래로는 인도의 깡촌, 서울의 산동네에 구석구석 푸드뱅크 차 타고 음식 배달을 다녔다. 끝에서 끝을 다 봤지. 다 보고 나서 알았다. 인간의 삶이 별 게 아니구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구나.”

포용력의 체급이 완전히 다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해결책도 찾았나
“해결책은 내가 찾거나 가르칠 수 없었다. 그냥 내 앞에 있는 배고픈 사람 밥 먹이고, 목마른 사람 물 먹이고···. 좀 편안해지면 다들 스스로 일어났다. 나는 그걸 이탈리아 마랑고니 패션 스쿨의 은사인 브라 선생님에게 배웠다. 내 할머니도 그러셨고.”

찾아온 청년들에게는 뭐라고 하나
“절대 나를 어른 대접하지 말라고. 대접하면 부담스럽다고. 몸에 좋다는 거 보내주면 안 놀아, 너무 오래 살게 만들지 마. 너무 늙으면 내 장기 가져다 못 써. 꼰대가 별 게 아니다. 무조건 ‘나한테 맞추라’고 억압하는 꼰대들은 예나 지금이나 있다. 조너선 스위프트라고 ‘걸리버 여행기’ 쓴 작가가 그랬다. 젊은이한테 참견하지 말고, 그들이 같이 놀자고 하기 전에 끼어들지 말라고.”

그런 맥락에서 자식에게 ‘나 치매 걸리면 싼 요양원에 넣어달라’고 해서 놀랐다
“치매 걸리면 알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비싼 데 가나. 비싼 요양원도 다 자식들 허영이다. 부모 임종 앞두고 수의 가지고 관 가지고 싸우는 자식들을 많이 봤다. 나는 이미 시신 기증 서약도 했으니, 몸에서 쓸 만한 건 다 빼내고 가루만 주겠지. 애들은 엄마가 죽어도 각막은 살아서 누군가 볼 수 있으니 또 얼마나 좋나. 어차피 우리가 사는 게 죽으러 가는 거다. 배고픈 애들 밥 먹이다 가면 황천길이 편하잖나. 죽으러 가는 길에 골짜기도 건너고 강도 건너고 평야도 건너는 거다. 누구는 금수저 물고 태어나고 누구는 수저도 없이 태어난다고들 불평한다. 그런데 나무젓가락 들고 막노동판에서 먹어도 동료들과 웃으며 식사하면 그게 행복이다.”

내 자식조차 사적인 보상과 욕망을 개입시키지 않고, ‘다음 세대’로 선을 긋고 선대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 기저에 자신을 더 큰 세계라는 맥락 속에 던져놓고 생각하는 겸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밀라논나는 8월 18일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라는 에세이를 발간했다. 사진 김영사
밀라논나는 8월 18일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라는 에세이를 발간했다. 사진 김영사

삶에서 진짜 귀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나
“시간이다. 오늘 24시간의 시간. 부자나 빈자나 24시간은 똑같이 받는다.”

시간의 본질은 뭔가
“성실이다. 성실은 내 인생에 대한 예의다. 자존과도 연결된다. 삶의 진짜 가치는 내 시간을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거다.”

인생은 나로 시작해서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말이겠지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다. 그저 받았으니 나누는 거다. 나는 실용적이고 가성비 있게 살고 싶은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도 비싼 데 가서 밥 먹는 거 좋아하면 배만 나온다. 이탈리아에서 오래 살았다고 비싼 파스타 사 주면 싫어한다(웃음). 나는 먹는 데 관심이 없다.”

나이 들면 먹는 낙이 크다고 하던데, 식탐이 없나
“없다. 맥주 외에는 먹고 싶은 게 없다(웃음). 그냥 코앞에 있는 걸 먹는다. 나는 약도 안 먹는다. 콜레스테롤 높다고 하면 1시간 걷는다. 비타민D가 부족하다면 햇볕을 충분히 쬔다. 내 몸에 케미컬을 넣고 싶지 않다.”

그 정도까지 절제하는 이유가
“내 몸이 아니잖나. 죽으면 드려야 하니까. 나는 자연 노화되고 있어서 돈 들일 필요가 없다. 염색도 안 하고 샴푸도 안 쓴다. 비싼 화장품 안 발라도 친구들 만나면 꿀리지 않는다(웃음). 옷도 가구도 식물도 다 정리해서 나눠줘서, 몸도 삶도 가볍다.”

장명숙은 41년 전 유학을 가서 유럽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걸 다 봤다고 했다. 유튜브 첫 영상에서 그는 이 사회의 패러다임이 좋은 길로 가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꿈이 있나
“없다. 지금까지 그랬듯 내 시간은 빼앗아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다만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은 건 있다. 보육원 나온 새내기 청년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베이비박스로 오는 아기들도···. 그 아이들이 잘살아야 이 땅이 밝아진다. 그래서 비행기 탈 때마다 태풍에 추락할지도 몰라서 생명보험을 꼭 든다. 보육원 ‘꼬맹이들’에게 보험금이 가도록.”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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