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 가상 인플루언서. 왼쪽 아래는 국내 1호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가 지난해 프랑스 에펠탑 앞에서 남긴 인증 사진. 사진 로지·릴 미켈라·이마·슈두 인스타그램
세계 각국 가상 인플루언서. 왼쪽 아래는 국내 1호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가 지난해 프랑스 에펠탑 앞에서 남긴 인증 사진. 사진 로지·릴 미켈라·이마·슈두 인스타그램

1998년 1월, 사이버 가수 ‘아담’이 국내 가요계에 등장했다. 당시 기술의 한계 탓에 가상인간이라기보다는 3D 애니메이션 느낌이 강했지만, 파격적인 콘셉트 덕분인지 제법 인기도 끌었다. 1집 앨범은 20만 장 판매를 기록했고, CF 광고도 찍었으며, 팬클럽도 생겼다. 그러나 2집이 실패하며 아담은 ‘컴퓨터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설’ ‘입대설’ 등을 남긴 채 조용히 사라졌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2020년 8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으로 전 세계 국가가 빗장을 잠갔던 당시, 한 인스타그램 계정이 이목을 끌었다.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한 소녀 때문이었다. 주근깨 있는 볼에 긴 팔다리, 쌍꺼풀 없는 눈매에 힙한 패션. 소녀는 아프리카 나미비아 하늘에서 스카이다이빙을, 이집트 바닷속에서 스쿠버다이빙을 즐겼고, 짐바브웨 빅토리아 폭포와 프랑스 에펠탑 등 유명 관광지에서 인증 사진을 남겼다. 사회 이슈에도 적극 동참했다. 사람들에게 친환경 운동과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사람들은 코로나19로 답답한 현실 속 소녀의 자유로운 일상에 주목했다. 특히 MZ 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며 팔로어가 급격하게 늘었다. 같은 해 12월 이 계정의 팔로어는 1만 명을 돌파했고, 이후 소녀의 정체는 가상인간으로 밝혀졌다. 그가 바로 ‘국내 1호 가상 인플루언서’가 된 ‘오로지’다. 그의 나이는 ‘영원한 22세’. 1년이 지난 지금, 로지는 광고계를 휩쓰는 스타가 됐다. 그가 올해 올린 수익만 15억원이 넘을 전망이다.

그야말로 가상인간 전성시대다. 미국 시장조사 업체 비즈니스 인사이더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기업이 인플루언서 마케팅에 쓰는 비용은 2019년 80억달러(약 9조원)에서 2022년 150억달러(약 17조원)로 두 배가량 증가할 전망이다. 미국 블룸버그는 이 자료를 인용해 이 중 상당 부분이 가상 인플루언서가 차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상 인플루언서는 해외에서 먼저 성공을 거뒀다. 브라질계 미국인 설정의 ‘릴 미켈라’는 미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브러드(Brud)가 2016년 선보였다. 미켈라는 그간 프라다·디올 등 명품 브랜드 모델로 활동했으며, 싱글 앨범과 뮤직비디오도 발표했다. 인플루언서 마케팅 분석 업체 ‘인플루언서마케팅허브’에 따르면, 미켈라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무려 311만 명, 게시물당 수익은 6033~1만55달러(약 733만~1221만원) 수준이다. 연간 수익(2019년 기준)은 약 1170만달러(약 140억원)로 알려졌다. 이 밖에 브라질 ‘루두 마갈루’, 영국 ‘슈두’, 일본 ‘이마’, 중국 ‘화즈빙’, 태국 ‘아일린’ 등도 세계가 주목하는 가상인간이다. 이들은 수십~수백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보유, 여느 인기 스타 못지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롯데홈쇼핑이 선보인 가상 인플루언서 루시. 사진 롯데홈쇼핑
롯데홈쇼핑이 선보인 가상 인플루언서 루시. 사진 롯데홈쇼핑

국내서도 가상인간 개발 열기가 뜨겁다. 특히 인공지능(AI) 등 관련 기술 스타트업의 활약이 돋보인다. 마인즈랩이 선보인 ‘M1’, 디오비스튜디오의 ‘루이’ 등이 활동 중이다. 대기업도 이미 시장에 뛰어들었다. LG전자는 지난 1월 온라인으로 열린 세계 최대 정보기술·가전 박람회 ‘CES 2021’에서 가상인간 ‘김래아’를 공개했다. 이에 앞서 삼성전자는 2020년 1월 같은 박람회에서 가상인간 ‘네온’을, 이어 올해 6월에는 브라질 법인에서 영업직원 교육을 위해 만든 가상인간 ‘샘’을 선보였다.

지금 가상인간이 뜨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AI·가상현실(VR)·증강현실(AR) 등 관련 기술의 발전, 팬데믹 기간 비대면의 일상화와 함께 부상한 메타버스(metaverse·현실과 가상이 혼합된 세계)의 성장 등을 이유로 분석했다. 여기에 실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실수나 과거사 문제 등, 위험성이 없다는 점이 광고계의 구미를 당기며 가상인간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가상인간의 활동 영역도 무한 확장할 전망이다. 실제로 롯데홈쇼핑은 지난 2월 선보인 자체 개발 가상인간 ‘루시’의 쇼핑 호스트 데뷔를 준비 중이다. NH농협은행은 AI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한 가상인간을 정식 직원으로 채용, 실제 업무에 투입할 계획이다. 앞서 중국 관영 매체 신화통신은 2019년 AI 아나운서 ‘신샤오멍’을 공개했다. 국내 종합편성채널 방송사 MBN도 2020년 유명 아나운서 김주하씨를 본떠 만든 AI 아나운서를 선보였다. 로지의 경우 연기자와 가수 활동도 준비 중이다.

다만 가상인간의 급부상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일자리 이슈가 대표적이다. 가상인간이 활동 영역을 확장하면서 실제 인간의 일자리를 꿰찰 것이라는 지적이다. 가상인간을 대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도 과제다. 가상인간에 대한 성적 평가나 성희롱, 욕설 등이 무분별하게 이뤄질 수 있다. 일례로 올해 초 불거진 AI 챗봇 서비스 ‘이루다’ 사태가 있다. 일부 사용자들이 20대 초반 여성 설정의 이루다에게 성적인 답변을 요구해 논란이 일었고, 결국 이루다는 20여 일 만에 서비스를 잠정 중단했다.

‘이코노미조선’은 ‘가상인간 창조 시대’ 기획을 통해 국내외 가상인간 개발 현황을 진단하고 앞으로 긍정적인 발전 방향을 모색해 봤다. 가상인간 개발과 활용에 앞장서고 있는 국내외 기업의 목소리를 듣고 전문가의 진단도 담았다.


plus point

[Interview] 진호 롯데홈쇼핑 디지털사업부문장
“가상인간, 고부가가치 있어…부작용 해결은 우리의 몫”

이선목 기자

진호 롯데홈쇼핑 디지털사업부문장연세대 정치외교학, 연세대 경영전문대학원(MBA), 전 롯데홈쇼핑 DT부문장, 전 롯데백화점 옴니채널팀장
진호 롯데홈쇼핑 디지털사업부문장
연세대 정치외교학, 연세대 경영전문대학원(MBA), 전 롯데홈쇼핑 DT부문장, 전 롯데백화점 옴니채널팀장

롯데홈쇼핑은 최근 올해 2월 선보인 가상인간 ‘루시’를 쇼핑 호스트로 기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루시는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29세 모델이자 디자인 연구원이다.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6만 명에 육박한다. 지난 10월에는 롯데홈쇼핑 자체 쇼핑 행사인 ‘대한민국 광클절’의 홍보 모델로도 활동했다. ‘이코노미조선’은 루시 개발을 총괄한 진호 롯데홈쇼핑 디지털사업부문장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루시를 왜 개발하게 됐나.
“가상 인플루언서 개발을 염두하고 사전 기획을 시작한 건 2020년 5월쯤이다. 당시 디지털 전환이 가속하면서 미래 먹거리에 대한 고민과 함께 장기적으로 메타버스 시장을 이끌 수 있는 아이템을 모색하고 있었다. 여기에 미래 주요 소비층인 MZ 세대가 구매를 결정할 때 친구보다 SNS 인플루언서의 영향을 더 받는다는 점에 주목, 가상 인플루언서 지식재산권(IP) 사업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디지털사업부문 내 MCN(인터넷 유명인의 콘텐츠 관리) 셀에서 루시를 기획하게 됐고, 같은 해 9월 본격 개발에 착수, 올해 2월 루시를 세상에 공개했다.”

루시 개발에 활용된 기술은.
“현재 가상인간을 구현하는 데 사용되는 기술은 크게 두 가지다. 딥페이크 기술과 3D 에셋(asset) 모델링 기술이다. 루시는 3D 에셋 모델링 기술로 탄생했다. 이 기술은 실제 촬영한 이미지에 가상의 얼굴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솜털, 안구의 핏줄 등까지 구현 가능하다. 루시의 외모는 MZ 세대가 좋아할 만한 특성을 조합해 샘플을 만든 뒤, 사내 투표를 통해 결정했다.”

현재 루시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나.
“루시는 현재 SNS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로, 다양한 뷰티 브랜드를 비롯해 쉐이크쉑, 빼빼로 같은 식음료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했다. 10월에는 롯데홈쇼핑 대표 행사 ‘광클절’의 대표 모델로도 활동했다. 쇼핑 호스트로서의 활동도 준비 중인데, 구체적 시기는 조율 중이다. 이 밖에 유튜버, 디지털 엔터테이너로서 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최종 목표는 루시가 메타버스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국내 가상인간 관련 산업이 최근 급성장세다. 이유가 뭘까.
“최근 일부 유명 연예인의 사생활 논란으로 이들을 광고모델로 기용한 기업들의 피해가 잇따랐다. 이런 리스크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 가상인간의 주가를 올리는 큰 요인이다. 또 가상인간은 통제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해 활동할 수 있다. 아직 팬데믹의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는 매우 매력적인 장점이다.”

가상인간 산업 전망은.
“아직 산업 초기인 만큼 앞으로 관련 기술의 발달과 함께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것이다. 특히 가상인간은 물리적인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한 고부가가치가 있다. 아직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에 가상인간이 활용될 수 있고, 지금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접목해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더 희미해질 수 있다. 물론 고민해야 할 부분도 많다. 어떻게 하면 가상인간이 대중에게 ‘불쾌한 골짜기’로 여겨지지 않고 우리의 삶과 함께 할 수 있는지 등인데, 이 역시 관련 산업을 꾸려가는 이들의 몫이다.”

이선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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