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의 삶과 리더십을 그린 드라마가 꾸준히 방영되고 있다. 배우 유아인이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태종을 연기하고 있다. 사진 SBS
태종의 삶과 리더십을 그린 드라마가 꾸준히 방영되고 있다. 배우 유아인이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태종을 연기하고 있다. 사진 SBS
박현모 여주대 세종 리더십연구소장
서울대 정치학 박사, 현 한국형리더십개발원 원장, ‘세종처럼’ ‘정조평전’ ‘세종의 적솔력’ 등 저자

대한민국 리더들에게 조선 제3대 왕 태종 이방원(1367~1422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거대한 시대의 전환을 인식하고, 스스로 조타수가 돼 조선이라는 배를 안전하게 목적지에 정착시키는 능력이다. 훌륭한 선장이 그러하듯이 뛰어난 리더는 항해의 목적지와 바람과 조류의 흐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서로 선장이 되겠다고 나서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방향키를 잡아야 한다. 14세기 말 태종이 그랬다.


정확한 정보와 신속한 실행력

태종은 중원대륙에서 일어나는 패권의 변화를 정확히 인지했다. 명나라의 수도 난징(南京·남경)을 두 차례 다녀오면서 신흥 패권국 명나라 모습을 세심히 관찰했다. 1388년(우왕 14년) 10월 처음 중국에 갔을 때, 명 태조 주원장은 장수 남옥에게 15만 군대를 맡겨 몽골 잔존 세력을 지금의 바이칼호까지 추격해 대파시켰다. 두 번째 중국행은 제국 명나라를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는 기회가 됐다. 1394년(태조 3년) 6월 한양을 출발해 이듬해 11월에 귀국했으니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태종은 난징에 머물면서 주원장이 어떻게 조직을 장악하는지를 관찰했다. 주원장의 전각(殿閣)정치, 즉 문연각(文淵閣)·무영전(武英殿) 등을 설치해 전각의 대학사(大學士)로 하여금 각종 국가 서류를 관장하고, 황제를 시종하며, 자문에 응하게 하는 정치가 그것이다. 승상을 없애고 6부(部) 힘을 강화했을 때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지도 봤다.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패권국이 바뀌면서 국가 간 관계도 달라져 있었다.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제국이었던 원나라와 달리 명나라는 배타적이고 일원적인 나라였다. 대륙의 실크로드는 초원으로 돌아간 몽골족에 의해 차단됐다. 동중국해로 나가던 배들은 왜구 약탈이 극심해지면서 운행을 거의 멈췄다. 당시 60년간의 남북조 혼란 상태 끝 무렵에 있던 일본이 왜구를 금압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백성을 먹여 살리는 길은 무역 이익이 아니라 안정된 농업이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환을 20대 이방원은 목격했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머리털이 희끗희끗해질 때까지’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태종실록 3년 9월 22일). 지도자가 시대의 흐름을 놓치는 순간 국가라는 배는 헤매기 마련이다.

태종이 주목한 또 다른 현상은 ‘성리학 르네상스’였다. 성리학, 즉 정자(程子·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와 주자(朱子)를 축으로 하는 정주(程朱)성리학은 이미 패망한 송나라와 원나라에 영향을 끼쳤던 ‘낡은’ 이념이었다. 그런 정주성리학이 고려 말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사회개혁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사회이념으로서 불교의 내재적 한계, 예를 들면 배우고 도를 닦은 사람일수록 현실 세계를 부정해야 하는 출세간(出世間)의 딜레마를 성리학 공부와 실천으로 넘어설 수 있다고 봤다.

정몽주와 정도전에게 사숙(私淑)했고, 과거시험에 합격할 정도였던 이방원 역시 성리학의 효용성을 꿰뚫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주자가례’, 즉 관혼상제(冠婚喪祭) 예법은 일반 백성의 생활 양식(modus vivendi)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혁신적인 글로벌 매너였다. 왕위에 오른 후 그는 주자가례를 인쇄해 신하들에게 나눠줬다(태종실록 3년 8월 29일). 어전회의에서 주자 말을 인용해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도 했다(태종실록 4년 9월 19일). 성리학이야말로 새로운 ‘조선인 만들기’를 위한 혁신적 대안임을 강조하곤 했다. 

부왕 태조가 사망했을 때 그는 창덕궁 동남쪽에 여막을 지어놓고 주자가례를 매일 읽는 모습을 보였으며(태종실록 8년 5월 26일), 하륜이 사망했을 때 주자가례의 상례(喪禮)를 따랐다고 칭찬하기도 했다(태종실록 16년 11월 6일). 요컨대 태종은 정주성리학의 내용과 가치를 본인 스스로가 충분히 이해한 다음, 그것을 국가 경영의 도구로 활용했다.


대한민국 리더가 태종에게 배워야 할 결정적인 것은 위기 극복 능력이다. 

국가라는 배를 성공적으로 목적지에 도달시키려면 뛰어난 선장이 방향타를 잡아야 한다. 정적들의 숱한 공격과 많은 장애물을 넘어서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 태종이 정치 세계에 뛰어든 1388년부터 왕위에 오르는 1400년까지, 12년 동안 수많은 진전과 반전의 순간이 있었다. 

매 순간 그는 ‘선발제지(先發制之)’의 방법으로 위험한 순간을 기회로 만들었다. 선발제지란 ‘먼저(先·선) 일어나(發·발) 그것(之·지=사태)을 제압한다(制·제)’는 뜻으로 정도전 제거 때를 회상하며 태종이 한 말이다. 정몽주를 척살할 때(1392년 4월), 그리고 두 차례 ‘왕자의 난(1398년 8월, 1400년 1월)’에서 정도전과 이방간을 제거할 때 태종은 정확한 정보와 신속한 실행력으로 위험한 도전을 새로운 기회로 바꿔 나갔다.


정권 상관없이 당대 최고 인재 중용 

태종이 민심을 획득하는 방법이야말로 우리나라 정치가들이 꼭 배워야 할 점이다. 왕위에 오른 그가 헤쳐나가야 했던 일은 돌아선 민심을 달래는 것이었다. 스승과 동생들을 죽이고 아버지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냉혈한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신민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나라가 얼마나 오래가겠는가?’라는 즉위 초 변남룡 부자 이야기(태종실록 1년 2월 9일)나, 죽은 신덕왕후 강씨(이방원의 계모) 원수를 갚겠다며 반란을 일으킨 ‘조사의(趙思義) 난(1402년)’에서 보듯이, 태종 즉위를 사람들은 좋지 않게 바라봤다. 

태종은 어떻게 돌아선 민심을 포용할 수 있었을까? 태종이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인사(人事)를 제대로 하는 일이었다. 인사, 즉 사람 쓰는 일을 잘하면 저절로 말이 순조로워지며, 민심도 결국 돌아온다고 믿었다. 조준·하륜·권근 등 당대 최고 인재들이 중용되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점차 바뀌었다. 그전 정권 사람이든(조준), 고려 충신 이색의 제자이든(권근) 간에 능력 있으면 크게 쓰인다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태종은 법이나 제도를 함부로 바꾸지 않았다. 신하들에게 새 제도를 만들려 애쓰지 말고, 기왕에 있는 제도를 잘 운용하라고 강조했다. 백성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정책은 마치 ‘엉킨 실타래 풀 듯이(如治亂繩·여치란승)’ 세심하고 신중하게 접근하라고 당부하곤 했다(태종실록 15년 7월 6일).

태종 리더십은 성공적이었다. 1422년 음력 5월, 그가 54세 나이로 사망했을 때 사람들이 내린 최종 평가가 그 점을 말해준다. ‘20년 동안 백성은 평화로웠고(四境按堵·사경안도), 물산이 풍부해 창고가 가득 찼다(倉庫充溢·창고충일).’ 그의 일하는 방식이 그 비결이었다. 정적, 즉 난적(亂賊)을 대할 때 그는 선발제지 방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백성 삶에 관계된 일은 엉킨 실타래 풀듯 조심스레 그 실마리를 찾았다. 

2022년에 대통령 선거, 지방 선거 등 큰 선거가 두 차례나 있다. 새로 뽑힌 대통령과 지자체 리더들은 헝클어진 실타래 풀어내듯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지치고 무너진 민생을 섬세하게 보살피되,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읽고 적극 대응해 나가면 어떨까. 태종처럼.

박현모 여주대 세종 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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