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하이저 헤드폰은 착용한 남성이 노트북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 젠하이저
젠하이저 헤드폰은 착용한 남성이 노트북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 젠하이저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에 나온 독일의 항복 선언 한 달 뒤인 1945년 6월 1일, 전기공학자인 프리츠 젠하이저 박사를 비롯한 독일 하노버대 공대 소속 연구원 8명이 하노버 인근 베데마르크에 있는 한 실험실에 모여 진공관 전압계를 생산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3000개가 넘는 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글로벌 이어폰·헤드폰 시장에서 70년 넘게 ‘최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성능 음향기기 전문기업 젠하이저의 시작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젠하이저는 1968년 세계 최초로 오픈형 헤드폰(HD414)을, 3년 뒤에는 고성능 다이내믹 마이크의 대명사가 된 ‘MD441’을 출시하는 등 앞선 기술력과 엄격한 품질 관리로 고급 음향 시장의 트렌드를 선도해 왔다. 현재 전 세계 90여 개국에 약 28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이어폰·헤드폰 시장 규모는 약 140억달러(약 15조1600억원)로 추정된다. 그중 약 3분의 2를 젠하이저를 비롯해 ‘닥터 드레’ 브랜드로 유명한 비츠 일렉트로닉스와 노이즈 캔슬링(Noise Cancelling) 분야의 최강자 보스, 일본 소니와 아웃도어용 헤드폰으로 인기가 높은 스컬캔디 등 5대 업체가 차지했다.

브랜드마다 강점이 달라 직접적인 성능 비교는 쉽지 않다. 보스나 비츠 같은 미국의 음향기기는 재즈와 힙합 등에, 젠하이저와 바우어스앤드윌킨스(B&W) 등 유럽 제품은 섬세한 클래식에 어울린다는 것이 오디오 마니아들 사이에선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젠하이저는 보스와 소니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무대 모니터링 시스템과 콘퍼런스 장비, 방송 녹음 시설, 항공기 통신용 헤드셋 등 첨단 음향 장비 시장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지난해 젠하이저의 매출은 6억6770만유로(약 8540억원)로 2016년 대비 1.4% 증가했다. 같은 해 매출의 9%에 육박하는 5780만유로를 연구·개발에 쏟아부은 것도 인상적이다. 젠하이저의 성공 비결을 분석했다.


성공비결 1│ 신속하고 유연한 조직 운영

젠하이저는 음향기기 업계에서 ‘린 경영(Lean management)’ 접목으로 성공한 대표 기업이다. 린 경영은 일본 도요타의 생산 시스템(TPS·인력 및 설비 등을 낭비가 없도록 필요한 만큼만 투입하는 방식)을 미국식 환경에 맞춰 재정립한 개념이다. 생산에 초점을 맞춘 TPS와 달리 린 경영은 구매와 생산·관리·마케팅·유통 등 전 과정에서 낭비 요소를 제거해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젠하이저의 린 경영은 신속성과 유연성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이어폰·헤드폰 시장처럼 짧은 기간에 시장 트렌드가 바뀌는 업종에서 빠르고 유연한 대응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젠하이저가 유행에 민감한 한국 시장에서 1~3년 단위의 장기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프리미엄 음향기기 업계의 경쟁자들이 스마트폰의 확산과 모바일 음원 시장의 급성장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 발 빠른 모바일 전환과 과감한 투자로 3D 몰입형 오디오 기술 ‘앰비오 3D(AMBEO 3D)’를 개발하며 한발 앞서갈 수 있었던 것도 신속하고 유연한 조직 문화에 힘입은 바가 크다. 앰비오 3D 기술은 인공지능(AI) 알고리즘 분석을 통해 ‘2채널’ 스테레오 사운드를 9.1채널 입체음향으로 재구성하는 기술이다.


성공비결 2│ 치열한 토론을 통한 의사 결정

신속하고 유연한 젠하이저의 린 경영을 뒷받침하는 것은 치열한 토론이다. 일단 결정된 사안을 실행에 옮기는 속도는 빠르지만 의사 결정에 이르는 과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다. 젠하이저에는 유통·공급·재무·판매·마케팅 등 각기 다른 분야를 담당하는 7명의 부문별 사장(president)이 합의를 통해 회사를 운영한다. 전 세계 지사를 통해 모이는 주요 사안도 모두 사장단 회의를 통해 최종 결정된다. 때로는 회의 과정에서 고성이 오가기도 한다. 사장단 내부에 정해진 서열은 없다. 모든 사장이 자기 분야에서 같은 권한을 갖고, 발언권도 같다. 사장단 구성원 중 두 명(전략 및 회계 담당인 다니엘 젠하이저와 공급망 담당인 안드레아스 젠하이저)이 3세 경영자라고 해서 봐주는 일도 없다. 과정은 힘들어도 논리적으로 매우 튼튼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온갖 종류의 반론을 이미 겪었기 때문에 실행이 빠를 수밖에 없다. 전략 담당 사장이 회계를 겸하도록 한 것은 ‘신의 한 수’다. 다니엘은 2013년 기자회견에서 고성능 마이크 ‘D900’ 개발 과정을 예로 들며 “내가 재무 부문만 담당했다면 불황기에 이런 제품 개발에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략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결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집단 지성’의 힘으로 결정을 내린 만큼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책임 소재를 따지며 시간을 보내진 않는다. 각자 맡은 부분에서 자신의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질 뿐이다. 이를 통해 당장의 이익이나 손해에 집착하기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회사의 미래를 위한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다.


성공비결 3│ 안정적인 기업 승계와 가족 경영

젠하이저는 창업자 가족 중심으로 10명 미만이 주식을 나눠 보유하고 있는 비상장 기업이다. 2008년 창업자 프리츠의 아들 요르그가 은퇴하면서 3세 경영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차입 경영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시야에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례로 젠하이저는 중국과 인도 시장 진출을 각각 20년, 12년 전부터 준비할 만큼 새로운 시장 공략을 위한 준비에 많은 공을 들인다.

젠하이저의 3세 경영자인 다니엘 젠하이저(왼쪽)와 안드레아스 젠하이저. 사진 젠하이저
젠하이저의 3세 경영자인 다니엘 젠하이저(왼쪽)와 안드레아스 젠하이저. 사진 젠하이저

젠하이저엔 ‘가족헌장(Family Charter)’이 있다. 이 헌장은 승계를 위한 구체적인 자격 요건뿐 아니라 정기적인 감사 등을 명시하고 있다. 후계자는 우선 젠하이저가 아닌 다른 회사에 취업해 평범한 직장인으로 경험을 쌓은 뒤 젠하이저에 입사한다. 3세 경영인 중 형인 다니엘은 P&G와 글로벌 광고 회사 오길비에서 마케팅 전문가로 활동했다. 동생인 안드레아스는 리히텐슈타인에 있는 힐티AG(Hilti AG)에서 기업 물류 및 통제 관련 업무를 맡아 경력을 쌓았다.

젠하이저 오너 일가 구성원들은 지분 규모에 차이가 있어도 동등한 의결권을 행사한다. 많은 지분을 보유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인 것이다. 이와 함께 가족회의를 연 3회 별도로 진행해 모든 가족 구성원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감정적인 유대감을 갖도록 돕는다. 가족의 단결이 회사 발전의 초석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용성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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