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메모리(Good Memory)’. 하이닉스반도체(이하 하이닉스)의 기업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에는 두 가지 뜻이 중첩돼 있다. 하나는 ‘좋은 메모리 반도체’를 만드는 최고의 반도체회사를 지향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주·고객·임직원·협력업체 등 회사를 둘러싼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겠다는 것이다.
하이닉스는 한때 모질고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하지만 ‘좋지 않은 기억’은 어느덧 깨끗이 사라졌다.
앞으로는 영원히 ‘좋은 기억’만을 남기고자 한다. 실제 그럴 만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스퀴즈’의 명수,

 극한승부에 빛을 발하다

하이닉스는 세계 반도체업계 7위 기업이다. 하이닉스 위로는 인텔, 삼성전자, 도시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퀄컴 등 6개사가 있다(2009년 12월 매출 기준). 통상적으로 순위 산정에 포함되는 유력 반도체업체가 15개사 안팎인 점을 감안하면 하이닉스는 중위권인 셈이다.

하지만 D램 반도체 시장만 떼놓고 보면 양상이 확 달라진다. 하이닉스 위로는 딱 한 기업, 삼성전자밖에 없다. D램 시장의 세계 2위 기업이 바로 하이닉스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한국을 대표하는 양대 반도체업체다. D램 시장에서는 세계 1, 2위를 두 한국 회사가 차지하고 있다. 단순히 1, 2위가 아니다. 두 회사의 세계 시장점유율을 합치면 50%가 넘는다.

D램은 메모리 반도체 가운데 중심이다. 한국이 압도적인 분야가 바로 D램 시장이다. 하이닉스 아래로는 엘피다, 마이크론이 따라붙고 있지만 제법 차이가 난다. 그 나머지 업체들은 현재로선 하이닉스와 아예 ‘게임’이 안될 만큼 격차가 벌어져 있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 반도체업계의 강호로 군림해왔다. 메모리 시장에서는 늘 선두주자로 달려왔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젠 하이닉스도 ‘반도체 코리아’의 한 축을 당당히 떠맡고 있다. 이 역시 하나의 공식이 되어가고 있다. 그만큼 하이닉스의 위상이 탄탄해졌다는 것이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은 이런 때 쓰는 표현이다. 2000년대 초반 엄청난 적자 수렁에 허덕이며 채권단 관리를 받던 부실기업이 불과 수 년 만에 글로벌 강자로 거듭났으니 말이다. 더욱이 세계 반도체업계는 최근 수 년간 경기침체가 이어지는 와중에 서로 생사를 건 무한경쟁, 이른바 ‘치킨게임’까지 벌였던 터다. 그 치열한 전쟁터를 뚫고 하이닉스는 거뜬히 살아남은 것이다.

반도체산업은 전형적인 자본·기술 집약적 산업이다. 생산설비와 연구개발에 대규모 투자가 이뤄져야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것도 한발 앞서야만 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닉스는 자금력이 넉넉지 않았다. 남들보다 투자를 많이 할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도 하이닉스가 우뚝 일어설 수 있었던 비책은 무엇일까?

김형준 서울대 공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하이닉스가 굉장히 어려운 시절을 이겨낸 것은 무엇보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비결을 찾아낸 덕분입니다. 즉, 적은 투자로 많은 효과를 내는 방법을 알아낸 거죠. 아마도 메모리 부문만 볼 때 삼성전자에 비하면 그 동안 투자 규모가 절반 수준밖에 안될 겁니다. 하이닉스는 경쟁업체들만큼 투자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주어진 여건에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기존 구식장비로 수율을 높이고 넷다이(웨이퍼 1장당 칩 생산개수)를 더 늘리는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궁즉통’으로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때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하이닉스 역시 극한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 끝에 돌파구를 찾은 셈이다. 김 교수는 “궁즉통”이라는 말로 압축했다.

사실 하이닉스의 생산성에 관한 한 대다수 전문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이 회사의 첫 번째 핵심 경쟁력으로 생산성을 꼽는 것이다. 증권가 애널리스트들도 마찬가지다. 이승우 신영증권 연구원의 견해다.

“하이닉스는 기술을 중시하는 문화가 오랫동안 쌓여 왔습니다. 그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거치는 동안 비록 적자를 보기는 했지만 다른 기업들보다 ‘수익 방어’를 잘했지요. 제가 보기에 하이닉스 엔지니어들은 삼성전자 엔지니어들과 비교해도 능력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삼성전자 엔지니어들보다 ‘배고픈’ 상황에서 일을 할 따름이죠.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코스트(비용)를 줄이기 위해 기술개발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짜내기’를 통한 원가경쟁력 확보에 성공했고, 올해 반도체 업황이 좋아지면서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2006년 세계 D램 반도체 시장은 큰 호황을 맞았다. 그 해 D램 시장 규모는 약 330억달러에 이르렀다. IT 버블이 절정을 이루던 2000년(약 280억달러)보다 경기가 더 좋았다. 당시 세계 반도체업체들은 돈을 쓸어 담았다. 특히 난야, 파워칩, 프로모스 등 대만 업체들의 수익성이 아주 좋았다.

물론 하이닉스도 호황의 덕을 많이 봤다. 2006년 하이닉스는 7조6930억원의 매출에 2조58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영업이익률이 무려 27%에 달했다. 이후 3년 동안 반도체 경기침체와 치킨게임의 이중고가 겹치면서 영업이익률이 6%(2007년), -28%(2008년), 2%(2009년)로 바닥을 친 것과 비교하면 그 해 반도체 업황이 얼마나 좋았는지를 알 수 있다.

2007년 불어닥친 반도체 경기침체는 불과 2년 전 채권단 공동관리를 조기 졸업하고 모처럼 탄력을 내고 있던 하이닉스에게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하이닉스는 이미 위기를 넘는 노하우를 체득한 터였다.

김정수 하이닉스 상무(IR·PR그룹장)의 말이다. “사상 유례 없는 반도체 경기침체에도 위기를 기회로 반전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비용을 줄여도 연구개발(R&D) 투자는 오히려 늘렸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업계를 선도하는 기술을 꾸준히 개발했고, 제품 포트폴리오 개선을 통해 수익성을 높여 왔습니다. 그 결과 시장의 변동폭을 흡수할 수 있는 기술경쟁력과 다양한 제품군을 확보할 수 있었지요.”

실제 하이닉스는 지난 수 년간 R&D 투자를 점차 확대했다. 2006년 약 4000억원에서 2007년 약 5000억원으로 늘렸고, 불황 심화로 대부분 업체가 투자를 줄이던 2008년, 2009년에는 더욱 투자를 늘려 약 7000억원을 R&D에 투입했다.

그러는 사이 세계 반도체업계의 경기침체와 치킨게임은 서서히 종착역으로 다가갔다. 길고도 추운 겨울은 드디어 지난해 하반기 무렵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하이닉스는 살아남았고, 승자가 됐다. 반면 경쟁업체들은 멀찌감치 도태됐다. 올 1분기 매출 기준으로 난야, 파워칩, 프로모스 등 대만 3인방은 D램 시장점유율이 4%대 아래로 추락했다. 같은 기간 하이닉스는 21.7%였다. 독일 반도체업체 키몬다는 이미 파산해 이름조차 사라졌다.

‘9회말 투아웃, 역전 만루홈런’을 날리다

지난 4월 이승우 신영증권 연구원은 하이닉스에 대한 리포트에서 “2010년 하이닉스의 실적 개선은 지루하고 어려웠던 치킨게임에서 9회말 투아웃 이후 주자를 모두 모아놓고 역전 만루홈런을 쳐낸 것”이라고 비유했다. 그의 말이다. “D램 시장 역사상 가장 호황기였던 1995년 무렵 세계 D램 업계에는 IBM, 지멘스, 모토롤라, 텍사스인스트루먼트, NEC 등 쟁쟁한 회사들이 모여 있었지만 이후 10여년 사이 모두 나가떨어졌습니다. D램 시장은 경쟁력을 갖춘 기업만 살아남는 시장이 됐어요. ‘위너 테익스 잇 올(Winner takes it all)’, 즉 승자독식의 시장이라는 겁니다.”

하이닉스는 이제 당당히 승자로 대접받고 있다. 올해 실적도 눈부실 것으로 보인다. 지난 2분기 하이닉스는 분기 기준으로 사상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매출액은 3조2790억원, 영업이익은 1조450억원이었다. 분기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각각 3조원과 1조원을 넘어선 것도 사상 처음이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영업이익률이다. 1분기 28%에서 2분기에는 32%로 4%포인트나 높아졌다. 완연한 상승세다.

오늘의 하이닉스는 모든 임직원이 혼연일체로 반도체 전쟁의 격랑을 헤쳐온 결과다. 더욱이 넉넉한 ‘실탄’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이룬 성과이기에 더욱 값지다는 평가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하이닉스의 노사(노경)화합 문화다. 하이닉스는 세계 주요 메모리 반도체 기업 중 유일하게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다. 하지만 노조와 경영진 사이에 상호 신뢰와 존중의 문화가 자리잡아 별 갈등이 없다. 오히려 회사와 근로자는 하나라는 ‘노사불이(勞使不二)’ 정신으로 수 차례의 경영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온 전통을 자랑한다. 어려운 시절 동고동락했던 연대의식이 하나로 뭉치게 하는 바탕이다.

김정수 상무의 말이다. “하이닉스는 위기를 극복해본 경험을 가진 회사입니다. 임직원들은 불황이 오래 지속될 때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단합했습니다. 다양한 문제해결 방안을 자발적으로 마련해 실천하기도 했지요. 역사적으로 위대한 성공을 이룬 조직의 이면에는 반드시 위대한 정신이 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개개인의 안위보다 더불어 성공하는 ‘성공 공동체’ 정신으로 무장해 위기를 극복한 하이닉스의 사례는 아마 다른 회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이닉스는 상장 주식의 80% 가량이 시장에서 유통되는 물량이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대주주가 없다는 뜻이다. 다만 예전 채권단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주식관리협의회(주주협의회)가 현재 1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경영권도 아직은 주주협의회가 행사한다.

하지만 하이닉스의 실질적이고 일상적인 경영은 권오철 대표이사와 이사회가 맡고 있다. 하이닉스는 효율적이고 투명한 ‘이사회 중심 경영 모델’을 추구한다. 이를 바탕으로 주주이익과 기업가치를 극대화하는 한편 선진적 지배구조를 확립한다는 방침이다. 하이닉스 사외이사이기도 한 김형준 서울대 공대 교수의 평가다.

“하이닉스의 이사회 중심 경영은 매우 잘 되고 있습니다. 오너가 있으면 사외이사든 사내이사든 눈치를 보게 되는데, 주주협의회는 재정적 문제 외에는 모든 의사결정을 이사회와 경영진에 맡겨 둡니다. 다른 기업 사례도 많이 봐왔지만 하이닉스는 국내 어떤 기업 못지않게 좋은 경영 시스템을 가진 것으로 봅니다.”

하이닉스는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 회사’로 성장한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또한 ‘오래 가고 좋은 회사’가 그들의 꿈이다. 모진 시련을 이겨낸 지난 10년의 세월은 100년의 자양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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