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글로벌 화두인 ‘사회적 책임’은 누구나 함께 져야 할 몫이다. 이제 그것을 국제표준으로 정립하려는 노력이 거의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이른바 ISO 26000이 그것이다. ISO 26000 시대의 개막은 우리 기업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사회적 책임’선택 아닌 필수다

‘지속가능한 지구촌’을 위한 신 국제규범 등장 초읽기

국내 기업 준비 태세 다소 미흡, 글로벌화 디딤돌 삼아야

지난 5월 하순 캐나다 퀘벡에서는 국제표준화기구(ISO)의 사회적 책임(SR: Social Responsibility) 총회가 5일간 개최됐다. 50여 개 회원국과 40여 개 관련기관이 대거 총회에 참석한 것은 이르면 내년부터 ‘사회적 책임의 국제표준’으로 등장할 이른바 ‘ISO 26000’의 국제표준안(DIS: Draft International Standard)을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그 직전인 4월에는 ISO 26000 개발 참여국을 대상으로 온라인 투표를 실시한 결과 3분의 2 이상이 찬성함으로써 국제표준안이 이미 성립된 바 있다.

ISO 26000은 21세기의 글로벌 이슈로 떠오른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규범으로 보면 된다. 세계인권선언,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기후변화 협약, 유엔 글로벌콤팩트(인권, 노동, 환경, 반부패 관련 10대 원칙) 등 보다 나은 인류사회 건설을 촉구하는 국제지침을 총망라한 신(新) 국제헌장이나 마찬가지다. 기업과 관련 지어 보면 1990년대 이후 선진 경영 트렌드로 부각되기 시작한 투명경영, 윤리경영, 지속가능경영 등의 경영 이슈를 사실상 모두 아우르고 있다.

ISO 26000 제정을 위한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2005년이다. 지난 5년 동안 수많은 실무회의와 총회 등을 통해 구체적인 가닥을 잡아 왔다. 한국 대표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ISO26000 제정은 거의 기정사실화 단계에 들어섰다. 예정대로라면 최종국제표준안(FDIS: Final Draft International Standard) 회람과 투표 절차를 거쳐 내년 9월쯤에는 ISO 중앙사무국이 ISO 26000을 발간하게 된다. 발간은 곧 공식 발효와 같은 의미다. ISO 26000 시대 개막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셈이다.

강충호 한국노총 홍보선전본부장은 “국제표준안이 나옴으로써 ISO 26000과 관련해 거의 모든 내용들이 완성 직전에 와 있다. 수정 여지는 별로 없는 상태”라고 밝혔다. 강 본부장은 ISO 26000 실무그룹(working group) 전문가다. ISO 26000 제정 작업에는 지식경제부, 기획재정부, 노동부, 중소기업청 등 정부기관은 물론 한국표준협회, 한국노총 등 공공기관과 일부 기업 관계자들이 한국 대표단으로 참여 중이다.

사회적 책임은 지속가능의 핵심요건

사회적 책임의 국제표준화를 위한 시도는 어느 날 불쑥 제기된 의제가 아니다. 나름대로 역사적 맥락을 가졌다는 뜻이다. 1996년 다국적 스포츠용품업체 나이키는 제3세계 국가에 세운 현지 공장에서 아동 노동 착취를 한 실태가 독일 언론을 통해 밝혀지면서 큰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또 2001년에는 미국의 거대 에너지 기업 엔론이 천문학적 회계부정을 저지른 여파가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처럼 초국적 기업들의 불미스러운 스캔들이 잇달아 터지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본격적인 공론화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연원을 좀 더 거슬러 오르자면 1990년대 이후 국제 사회의 핫이슈로 대두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지속가능성은 환경을 파괴하고 자원을 무작정 낭비하는 20세기식 성장 방식을 고수하다가는 인류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는 반성에서 비롯된 지구촌 담론이다. 1992년 브라질에서 열린 ‘리우 지구정상회의’와 200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된 ‘지속가능한 발전에 관한 세계정상회의’ 등을 통해 지속가능성은 21세기의 신(新) 국제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적 책임은 쉽게 말해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모든 구성원들이 책임 있게 행동하자는 도덕적, 규범적 선언이다. ISO 26000은 사회적 책임을 “투명하고 윤리적인 행동을 통해 사회와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직의 결정과 활동에 대한 책임”으로 정의한다. 또 ‘투명하고 윤리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지속가능한 개발 및 사회의 건강과 복지에 기여하는 행동 ◀이해관계자의 기대를 고려하는 행동 ◀적용 가능한 법에 합치되고 국제규범과 일치하는 행동 등으로 범주화하고 있다.

ISO이사회가 2001년 처음 ISO26000 제정의 타당성을 검토하던 단계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2002년부터는 기업은 물론 정부, 비정부기구(NGO) 등 모든 조직에 적용하는 광범위한 사회적 책임(SR) 표준을 제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회적 책임 의제는 기업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공감대에 따른 것이다.

안윤기 포스코 경영연구소 녹색성장연구실장의 설명이다. “사회적 책임 활동이라는 게 기업만 해서 될 문제는 아니다. 정부, 소비자, NGO 등이 모두 관련돼 있다. 그래서 ISO26000은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공히 합의할 수 있는 규준을 만들어 각자 지킬 수 있는 건 지키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몫 가장 커

하지만 ISO 26000이 제정될 경우 일차적인 영향권 안에 드는 것은 기업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글로벌 시장경제 체제에서 국경을 넘나들며 경제활동을 구가하는 기업들은 정부나 NGO보다 훨씬 강한 힘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도 가장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ISO 26000은 강제적인 규정이 아니라 권고적인 지침표준(Guidance Standard)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른 ISO 표준이 기업활동의 특정 분야에서 요구되는 기준을 명시하고 그 이행을 강제하는 것과는 차이점을 지닌 대목이다.

그렇다면 ISO 26000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유명무실한 규범이 되지 않을까? 물론 아니다. 만약 그런 표준이라면 애초부터 제정 작업을 추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ISO 26000은 초기단계에서 ‘인증’을 요하는 표준으로 제정하자는 논의까지 이뤄지다가 자율적 준수를 요구하는 ‘지침’으로 완화됐다. 하지만 일단 ISO 26000이 제정되면 기업활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실제 많은 전문가들은 ISO 26000의 지침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막상 제정되면 실질적 구속력을 지니는 국제표준으로 정착할 공산이 높다고 내다본다. 특히 ISO 26000 제정을 주도한 선진국 정부와 기업들이 국제교역의 파트너를 검증하는 도구로 활용할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전망이다. 즉, ISO 26000 그 자체는 강제 규정이 아니지만 널리 준용되다 보면 강제성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도 있다. 유럽연합(EU)은 품질경영에 관한 국제표준인 ISO 9000이 제정되자 공산품의 품질관리체제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ISO 9000 인증서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EU의 수입업체들이 다른 지역 수출업체들에게 ISO 9000 인증서를 요구하면서 결국 ISO 9000이 사실상의 구속력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노동 관련 규범 ‘발등의 불’

이런 점으로 미뤄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ISO 26000은 모든 기업들에게 새로운 경영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 국내 기업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도전에 직면할 것인가?

ISO 26000의 행동규범은 크게 ◀지배구조 개선 ◀인권 ◀노동 관행 ◀환경 ◀공정운영 관행 ◀소비자 이슈 ◀공동체 발전 참여 등 7가지 핵심 이슈로 이뤄져 있다. 전문가들은 7대 이슈 가운데 대체로 국내 기업들이 취약한 부분을 지배구조와 노동 문제로 보고 있다. 특히 노동 문제가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의 설명이다. “ISO 26000의 노동 이슈는 대부분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준용한다. 이 협약은 회원국들이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ILO의 핵심 협약 8개 가운데 아직 비준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같은 조항들이다. 이 상태로 ISO 26000 시대를 맞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강충호 한국노총 본부장도 “결사의 자유, 차별금지 같은 노동기본권은 인권 이슈에도 포함된다. 한국은 노조가 없는 기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안고 있는 기업들이 ISO 26000으로 인해 직접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며 비슷한 전망을 내놓았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ISO 26000의 규범적 성격이 강한 데서 비롯되는 모호성도 문제다. 위은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 선임연구원의 지적이다. “사회적 책임은 누가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범위가 오락가락할 수 있다. 정부와 기업, 시민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국제표준처럼 ‘규격’이 정해져 있으면 기업은 거기에만 맞추면 된다. 하지만 사회적 책임은 누가 요구하느냐에 따라 범위가 커질 수 있는 것이다. 기업으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새로운 비용이 발생하는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ISO 26000 규범을 충족하는 경영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경우에 따라 적지 않은 자원이 소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관련 부서를 신설해야 한다든지 이해관계자 여론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든지 하는 ‘가욋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정도는 소소한 부담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거의 모든 경영활동 관행을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야 한다는 압박이다.

국내 일류기업들 대응체제 완비

그러나 ISO 26000에 대해 모든 기업들이 똑같은 수준의 부담감을 갖는 것은 아니다. 국내 일류기업들은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ISO 26000에 준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재화해 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국내 100대 기업 중 약 30%가량이 현재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기업들은 곧 ISO 26000 대응체제를 갖춘 것으로 봐도 된다는 설명이다.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 조영돈 연구관은 “국내 기업 가운데 포스코와 유한킴벌리가 특히 ISO 26000에 대한 대응을 잘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대기업, 중소기업 상당수가 ISO 26000 시대의 도래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다. 아울러 ISO 26000은 ‘자율적인 표준’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각자 상황에 맞춰 대응하면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의 전반적인 준비 태세는 미흡하다는 게 ISO 26000 실무그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강충호 한국노총 본부장은 “지난 3월 커미티 드래프트(Committee Draft: 위원회 초안)에 대한 국내 이해관계자들의 투표가 있었는데, 노동계와 NGO는 찬성했지만 기업들은 반대했다. 우리 기업들은 당초부터 경영에 부담된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ISO 26000이 새로운 국제표준으로 공식 발효되려면 앞으로 두 차례의 회원국 투표를 통과해야 한다. 각각의 투표에서 회원국의 3분의 2가 찬성해야만 한다. 중국, 인도 등 일부 국가가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지만 대세에는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표준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표준을 잡아야 세상을 얻을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는 “ISO 26000은 불가피한 환경 변화다. 국내 기업들은 부담으로 느끼기보다 글로벌화의 디딤돌을 놓는 계기로 삼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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