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여름부터 본격화한 미국 금융위기에도 한국 기업은 2008년 상반기까지 수출을 기반으로 호조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8년 상반기 제조기업의 매출액이 전년 동기보다 22.4% 증가하고 매출액 영업 이익률도 8.7%로 나타나는 등 1996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하반기 들어 전 세계적으로 금융위기가 확산되면서 세계 경제가 불황의 늪으로 빠져 들자 한국 기업도 그 영향권에 진입했다.

재무 유연성·소프트 경쟁력에 따른 맞춤형으로 돌파해야

유가증권시장 비금융상장사는 2008년 3분기에 매출은 늘었으나 수익이 악화돼 영업 이익률이 전 분기 9.2%에서 6.6%로, 세전 순이익률은 8.7%에서 3.4%로 급락하고 말았다. 수출 의존도가 높고, 글로벌 경제가 불황의 늪에 빠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다가올 위기는 동아시아에 국한됐던 외환위기 때보다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강해진 한국 기업의 역량

이와 같이 전반적인 경제 여건은 악화되었으나 불황 극복을 위한 한국 기업의 역량이 외환위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제조기업의 이자보상배수는 1.2배에 불과했으나 2008년 상반기에 6.3배로 높아졌다. 이자보상배수란 영업 이익을 이자비용으로 나눈 수치로 1이 안되면 기업이 번 돈으로 이자조차 갚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실질적인 부도상태를 뜻하며 통상 3 이상이면 재무능력이 양호한 것으로 평가한다. 또 부채비율도 무려 425%에서 96%로 대폭 하락했다. 한편 브랜드, 디자인, 기술력 등 소프트 경쟁력은 크게 강화됐는데, 예를 들어 2008년 세계 100대 브랜드에 삼성전자(21위: 177억달러)와 현대자동차(72위: 48억달러)가 포함됐으며, 2007년 세계 3대 디자인상인 iF, Red Dot, IDEA에서 주는 총 2553개 상 중 한국인이 8.1%인 208개를 받았다. 미국 특허건수도 1996년 1567건에서 2007년 7264건으로 4.6배 증가해서 세계 5위를 기록했다. 이처럼 한국 기업의 역량이 크게 높아진 반면, 글로벌 경쟁 기업은 전에 없는 극심한 어려움에 빠져 있어서 오히려 글로벌 불황이 한국 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 같은 배경하에서 우리 기업은 이번 불황을 글로벌 판도 변화의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개발한 충격-유연역량 모델에 기반을 두어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 기업들의 성공적인 불황 극복 요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도출하고, 이어서 기업별로 보유하고 있는 역량을 유형별로 나눠 바람직한 불황 대응전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SERI 충격-유연역량(S-R: Shock-Resilience)’ 모델

삼성경제연구소는 불황기에 기업들이 받은 충격과 대응능력을 파악함으로써 기업의 상황에 맞는 맞춤형 전략을 도출하기 위해 ‘SERI S-R(Shock-Resilience)’ 모델을 개발했다. 여기서 ‘충격(Shock)’은 불황이 기업에게 원가를 높이거나 매출을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원가율 상승(비용 측면)과 매출 증가율 둔화(수요 측면)로 측정한다. 그리고 유연역량(Resilience)이란 그 충격에 대응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각 기업이 보유한 재무 유연성과 소프트 경쟁력으로 측정한다. 여기서 재무 유연성은 ‘이자보상배수(영업 현금흐름/이자비용)’로 소프트 경쟁력은 ‘PBR(주가순자산비율, 시가총액/순자산(장부가치))’로 측정했다. PBR이 1보다 크다는 것은 시장에서 그 기업의 가치를 장부가치 이상으로 평가한다는 의미다. 그 초과분은 무형자산으로 볼 수 있으며 이를 소프트 경쟁력의 지표로 선정한 것이다.

유연역량과 대응전략이 성패를 좌우

SERI S-R 모델을 이용해 외환위기 당시 한국 기업의 판도 변화를 살펴본 결과 발견된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불황 직전인 1996년 상위 25%에 속했던 기업 중 3분의 2가 불황기를 거친 직후인 2000년에 하위 75% 그룹으로 떨어지는 등 극심한 판도 변화가 일어났다. 둘째, 고성과군(불황 직후 상위 25%)에 속했던 기업들이 받았던 불황의 충격 강도는 저성과군(불황 직후 하위 75% 기업)과 비교할 때 비슷하거나 오히려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고성과군과 저성과군의 차이는 주로 불황 직전에 확보해둔 유연역량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넷째, 불황을 거치면서 성과로 구분한 네 그룹 중 고성과군으로 부상하거나(저→고) 저성과군으로 추락한 경우(고→저) 두 그룹 간 유연역량은 유사했지만, 불황기 대응전략의 차이가 성패를 갈랐다. 대응전략이 어떠했기에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 것일까?

전략적 비용 절감과 선별적 투자가 불황기의 공통 전략

맞춤형 전략을 보기 전에 먼저 불황기에 기업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먼저 ‘선택과 집중’이다. 비핵심 사업은 팔거나 통합하고 거기서 확보한 돈으로 핵심 사업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핵심 사업인가? 바로 고수익 고객, 차별적 기술, 유통 역량, 소프트 역량을 확보하고 있는 사업을 말한다. 힘이 부칠 땐 무거운 것을 버려야 하는데 최근 글로벌 기업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업을 매각하고 철수하는 등 사업구조조정에 매달리고 있다. <수익지대(Profit Zone)>의 저자인 슬라이워츠키는 불황기 기업들에게 ‘Cut 2, Invest 1’의 지침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비용 절감(Cut 2)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미래 성공을 위해 필요한 부문에 선별적으로 투자(Invest 1)하라는 의미다. 

다음으로 전략적 비용 절감에 주력해야 하는데, 단기적 효과만을 고려한 비용 감축은 기업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미래 성장에 저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2001~2003년 미국 자동차 빅3는 인력 구조조정을 통해 불황기를 넘겼으나 체질개선 및 경쟁력 강화에 실패해 오늘에 이르고야 말았다. 반면 도요타는 고가 부품을 통합하고 공정을 개선해 절감한 28억달러를 R&D에 투자해 경쟁력이 크게 높아졌다.

일반적으로 비용 삭감과 실적개선은 다음과 같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즉, 기업 실적의 90%가 10%의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에 비해, 비용의 90%는 실적을 내지 못하는 90%의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경영학의 구루였던 피터 드러커는 “실적을 내는 사업은 일반적으로 자금이 충분치 않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코스트를 삭감하면 실적을 올릴 수 없다”고 하며 일률적인 비용 삭감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공통 전략을 기본으로 불황기에 기업은 다음과 같은 유연역량별 맞춤형 전략을 펼칠 때 성공 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

유연역량의 유형별로 맞춤형 불황 극복 전략을 구사

① 그룹 I: 공격 앞으로

먼저 재무 유연성과 소프트 경쟁력 모두 강한 그룹은 시장 지배력을 더욱 높이는 전략을 구사하는 게 좋다. 불황 때는 우량한 매물이 싸게 나오기 마련이므로 이를 인수하는 M&A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세계 1위의 철강 기업인 아르셀로 미탈은 다수의 광산을 확보해 원자재를 싼값에 공급받고 경쟁 철강업체를 인수함으로써 급속히 성장했다. 또 일본의 동경해상화재보험은 국내 자동차보험 시장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저출산으로 잠재수요가 더욱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자 미국, 영국 등 해외 시장 진출을 가속화했다. 2008년 7월에 필라델피아 콘솔리데이티드를 약 46억달러에 인수해 일본 보험사 사상 최대 규모의 외국 기업 M&A 기록을 세웠다. 2007년 12월에는 영국 보험사 킬른(Kiln)을 인수해 유럽 시장 진출의 기반을 마련했다.

한편 호황기에 대비한 선행투자도 매우 중요한 전략 수단이다. 강력한 재무 유연성을 통한 선행투자로 소프트 경쟁력의 격차를 확대하자는 것으로, 고성과 기업은 불황 시에도 R&D와 광고비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예를 들어 신일본제철은 장기불황에 시달리던 1996∼2005년 중에도 10년간 순이익의 70%에 달하는 4000억엔을 R&D에 투자해 생산성과 기술력을 업그레이드했다. 또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중공업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들이 과거 이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장치산업은 불황기에는 너도나도 감산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선진기업은 주주 중심의 기업 경영이 정착된 관계로 불황기에 대규모 투자를 할 만한 자금을 자본시장에서 조달하기가 쉽지 않으며 주주들의 동의를 받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을 역이용해 오히려 대규모 증설에 나서거나 기술개발에 주력한다면 호황기가 왔을 때 크게 성장할 수 있다.    

② 그룹 II: 실력 보완

재무 역량은 괜찮지만 소프트 역량이 부족한 기업은 갖고 있는 재무력을 기반으로 브랜드나 기술을 값싸게 매입함으로써 부족한 소프트 역량을 강화할 수 있다. 불황기에는 경쟁사들이 대개 긴축 경영에 치중하므로 호황 때보다 적은 투자로 소프트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OEM 업체에 불과했던 성광전자는 외환위기로 주문조차 끊어지자 ‘쿠쿠’ 브랜드를 출시해 마케팅에 주력함으로써 1년3개월 만에 국내 압력밥솥 시장 1위에 올랐다. 롯데제과는 2008년 6월에 고디바(벨), 페레로로쉐(이) 등과 더불어 명품 초콜릿으로 유명한 길리안(벨)을 1700억원에 인수해 프리미엄 초콜릿 생산라인을 확보하고 세계 시장에서의 인지도를 제고했다. 또 동원산업은 2008년 6월에 글로벌 브랜드 및 안정적 수요처 확보를 위해 미국의 참치 캔 제조업체인 스타키스트(북미 시장 점유율 37%)를 3억6000만달러에 인수했다.

③ 그룹 III: 차별화로 승부

반대로 재무력은 약하지만 소프트 경쟁력이 강한 기업은 강력한 구조조정 속에서도 소프트 경쟁력을 활용해 지속 성장을 추구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무형자산을 활용해 제품 및 서비스를 고부가가치화 하는 것인데, 기존 유통망과 노하우 등을 이용해 신제품을 도입하거나 기존 브랜드 제품을 새로운 유통망을 이용하는 것과 같이 보유하고 있는 무형자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또 보유하고 있는 고유기술이나 브랜드를 활용해 라이선스 수입을 올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미약품은 2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폴리펩타이드성 경구제제’ 제조기술을 1997년 4월에 스위스의 노바티스에 10년간 6300만달러에 수출한 바 있다.

IBM과 HP는 각각 ‘변신’과 ‘차별화’로 성공한 좋은 사례다. 먼저 IBM은 강력한 소프트 경쟁력을 바탕으로 사업 변신에 성공했다. 2000년대 초 IT 버블 붕괴로 시장이 침체되고 PC 가격이 하락해 제조 분야의 수익성이 악화되자 비핵심 분야를 지속적으로 매각함으로써 재무력을 회복했다. 2002년에 하드디스크 부문을 히다찌에, 2004년 PC 부문을 레노버에 매각해 ‘하드웨어’ 회사에서 지식기반의 ‘서비스 회사’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다.

HP는 기존 PC 사업의 고부가가치화를 통해 부활했다. IBM도 철수하고 델(DELL)도 고전하던 PC업계에서 HP만이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바로 '와우(WOW: 대성공, 열광시키는 상품)'에 있다. CEO 토드 브래들리는 "우리가 팔아야 할 것은 와우"라고 강조하며 디자인을 강조한 PC, 눈길을 끄는 독특한 광고 등을 통해 자사 제품에 대한 이미지를 쇄신했다. 또 혁신에 대한 투자와 제품 가격의 인하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 전략을 구사했다. 

④ 그룹 IV: 살아남는 게 급선무

재무 유연성과 소프트 경쟁력 모두 부족한 기업은 생존을 위한 재원 확보가 최우선이며, 대개 자력 생존이 어려우므로 적극적으로 제휴 파트너를 물색해야 한다. 사실 불황이 본격화되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상책이다. 일례로 홍콩의 복합그룹인 허치슨 왐포아는 외환위기 발발 직전인 1997년 7월 20억달러 규모의 채권을 발행해 확보해둔 자금으로 무선통신, 호텔과 항만 등 주요 사업에 효과적으로 투자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미리 현금을 확보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다. 현금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위기를 맞으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유동성 확보에 나서야 한다. 1998년 하이트맥주는 미국 투자회사 캐피털그룹에 3000만달러의 무의결권 우선주 전환사채를 팔고, 1999년에 덴마크 칼스버그그룹에서 외자 1억달러를 유치해 위기를 넘긴 바 있다.

자신감, 맞춤형 불황 극복 전략, CEO 리더십이 핵심

이러한 불황기의 대응전략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불황을 극복하고 글로벌 재계 판도 변화의 주역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불황의 파고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외환위기의 상흔 때문에 한국 기업들이 막연한 공포감이나 비관론에만 사로잡혀 있을 경우 수비에 급급하거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할 우려가 크다. 하지만 한국 기업이 처한 상황이 글로벌 경쟁사보다 결코 불리하지 않고, 과거 몇 차례의 위기를 겪으면서 역량도 크게 개선돼 얼마든지 불황 극복이 가능하며 나아가 글로벌 재계 판도 변화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다음으로 한국 기업이 직면한 불황을 극복하고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는 경쟁 환경과 기업의 보유 유연역량을 고려한 ‘맞춤형 불황 극복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불황의 파고를 넘어 글로벌 강자의 지위를 지킨 것은 불황을 통해 자사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약점을 지속적으로 보완한 결과다. 과거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상위 기업의 3분의 2가 교체된 주요 원인도 불황의 충격보다는 기업의 유연역량과 전략의 차이였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황 대응 능력을 갖춘 기업은 이번 국면을 주도하는 적극적인 전략을 구사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위기 극복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CEO는 통찰력을 갖고 헌신과 협력의 조직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불황기라는 현재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미래를 조망하는 통찰력은 CEO 리더십의 핵심이다. CEO는 불황일수록 여러 전문가를 만나 세상의 흐름을 읽고, 위기 극복의 큰 그림을 그리는 ‘위대한 디자이너(Grand Designer)’인 것이다. 그런 다음 임직원 모두와 함께 헌신과 협력의 조직문화를 만들어 간다면 이번 불황의 끝에서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김종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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