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포스코 창립 40주년 기념식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가(社歌)가 울려 퍼지는 기념식장은 이내 숙연한 분위기로 반전됐다. 34명의 포스코 창설요원들이다. 그러나 얼굴을 내민 이들은 절반에도 못 미친 16명에 불과했다. 이미 13명은 고인이 됐다. 5명도 건강상의 이유로 기념식장에 참석하지 못했다. 40년이라는 세월이 가져다준 변화다. 포스코 창립기념식에 창설요원들이 참석한 것은 지난 4월1일 포항 본사 대회의장에서 개최된 창립 40주년 기념식이 처음이다. 후배들과 함께 회사 창립의 의미를 되새기고 성공적인 비전 실현을 기원하기 위한 포스코 측의 배려다.

“이윤·출세·성취 동기보다 더 강한 것은 순수한 사명감”

 이날 창설요원들은 창업정신을 바탕으로 도전과 각오를 내용으로 하는 신입사원들의 뮤지컬 공연과 포스코의 성장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역사관을 관람하면서 철강 불모의 땅에 제철 자립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렸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었다. 이들과 함께 제철보국, 우향우를 외쳤던 박태준 명예회장도 끝까지 자리를 함께 했다. 성공적인 포스코 건설로 세계 철강사의 살아있는 신화로 불리는 박 명예회장만큼 이날의 감격을 되새길 수 있는 이가 있을까.

 “포스코 40년이 한국 근대화 40년의 기반이 되었다는 긍지를 가져도 좋을 것”이라는 기념사에서 박 명예회장의 심경은 충분히 읽혀졌다.

 <이코노미플러스>는 포스코 창립 40년을 맞아 박태준 명예회장 인터뷰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정신과 미래 100년을 향한 글로벌 포스코를 위해 넘어야 할 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박 명예회장은 오늘날 기업 및 기업인들에게 포스코 창업정신과 40년 역사가 가져다주는 의미에 대해서도 평가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인터뷰는 박 명예회장의 건강과 일정상의 이유로 부득이 서면으로 진행했다.

먼저 포스코 창립 40주년을 맞이한 감회가 어떠하신가요.

 아주 특별한 날이니까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숱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수밖에 없지요. 인생이 짧다고들 하는데, 사람이 세운 어떤 큰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할 정도로 짧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포스코는 순수한 사명의식과 생사를 건 뜨거운 정열로 창조해낸 불후의 예술품이라는 자부심도 느끼게 됩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와 경제성장에서 포스코 창립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합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 측면에서 포스코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계십니까.

 1962년이 우리 현대사에서 기억돼야할 해로 기록될 수 있다면, 그해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됐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그해 신정(新正)부터 단기(檀紀) 대신에 서기(西紀)를 쓴 신문도 있었지요. 말하자면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가 막을 올렸던 거지요. 그때 이미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팀에서는 종합제철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조강 연산 3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계획했지만 그런 소규모마저 결국은 계획으로 끝나버렸고, 종합제철소는 다시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핵심 사업으로 포함돼서 내가 그 책임을 맡게 되었어요.

 왜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종합제철소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느냐. 이유는 간단하지요. 철은 국가기간산업이기 때문이오. 철은 기간(基幹)이라는 말 그대로 바탕이고 줄기입니다. 철이 있어야 건설, 조선, 자동차, 가전 산업을 비롯한 관련 산업들이 발전될 수 있으니까. 포스코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사에서 기간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그리고 포스코 40년은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반 위에 올라서는 40년이기도 합니다. 이 자랑스럽고 놀라운 현대사에서 포스코는 산업화의 기간으로서, 견인차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냈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를 위한 물적 토대를 든든하게 만드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창업 당시 제철보국을 내걸고 우향우를 외쳤습니다.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오늘날 포스코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까.

 제철보국, 우향우는 한마디로 포스코의 사명의식을 집약한 말입니다. 포항제철소 제1기 103만 톤이 가장 힘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때 우리는 자본, 기술, 경험, 원료 등이 전무한 상태였소. 특히 KISA가 애를 먹였어요. KISA는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5개국의 8개 철강사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자본과 기술에서 책임을 지겠다고 했던 그들이 ‘한국에서 종합제철소는 시기상조’라는 세계은행의 권고에 따라 1969년 2월에 일방적으로 등을 돌렸던 겁니다. 그 막막한 상황에서 내가 박 대통령에게 대일 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전용하자고 건의해서 천신만고 끝에 성사를 시켰어요. 그러니까 포항 1기에는 대일 청구권 자금 7370만달러가 투입되던 겁니다. 그 돈이 어떤 돈인가요? 나는 ‘조상의 혈세’라고 규정했어요. 조상의 피의 대가라는 말입니다. 그런 제철소를 실패해요?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지요. 그래서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자는 ‘우향우’정신과 기필코 성공하여 철로써 보국하자는 ‘제철보국’이 탄생되었던 겁니다. 제철보국은 애국적 사명이고, 우향우는 민족적 사명입니다. 이 제철보국과 우향우가 지금에 이르러서 어떤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느냐? 나는 두 갈래로 봐요. 하나는 어떤 일을 성취함에 있어서 ‘순수한 사명감’이 가장 큰힘이 된다는 거요. 이윤 동기, 출세 동기, 성취 동기보다 더 강한 것이 나는 순수한 사명감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차원에서는 제철보국이나 우향우의 가치가 영원한 것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글로벌 경쟁시대를 헤쳐 나가야 하는 요즘의 환경에서 제철보국이나 우향우에 박혀 있는 자기 헌신의 정신을 중시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오늘날의 포스코가 있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너무 많아서 ‘가장’이라는 말을 수용할 수가 없소. 건설과 조업의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제쳐두고 본다면…. 요즘 국제 정세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일이 초기에 일어났는데, 그게 ‘주은래(저우언라이) 4원칙’이라는거요. 1970년이면 세계 질서가 그야말로 냉전체제의 한복판 아니오? 그해 4월1일에 포스코가 역사적인 포항 1기 착공식을 했는데, 딱 한 달 지난 5월2일에 갑자기 북경에서 그게 나왔어요. 주은래 4원칙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남한이나 대만과 거래하는 기업들과는 모든 거래를 단절하겠다는 거요. 그러니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을 개척해 나가고 있던 일본 기업들은 된서리를 맞은 것처럼 숨을 죽였지. 그런데 포항제철은 그 일본 기업들에서 설비와 기술을 들여와야 했단 말이오. 어떻게 되었겠소? 우리 정부는 정부대로 열심히 뛰고, 나는 나대로 속이 까맣게 타서 동경으로 날아가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을 설득했지. 거의 2주일 만에야 이나야마 회장이 주은래 4원칙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되고, 나도 한숨을 돌렸어요.

그렇다면 가장 보람을 느꼈던 기억은 무엇입니까.

 포스코 전체가 보람이오. 1973년 6월9일 아침에 첫 쇳물을 받아낸 일은 포스코의 선배들 모두가 가장 잊지 못할 환희의 순간일 테고…. 1978년 여름에 등소평(덩샤오핑) 중국 주석이 신일본제철을 방문했어요. 개혁개방과 근대화를 설계하는 등소평도 낙후된 중국 제철 산업의 현대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직시했을 겁니다. 그때 등소평 주석이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 같은 제철소를 건설해 달라”고 부탁을 하자, 이나야마 회장이 “그건 불가능하다. 제철소는 사람이 건설하는 것인데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고 답을 하니, 등소평 주석은 “그러면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다” 고 했답니다. 이 일화를 전해 듣고 크게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주은래 4원칙’과 비교하면 불과 8년 차이였는데 이만저만 격세지감이 아니었어요. 바로 그해 12월에 포스코는 550만 톤 체제를 준공하고 세계와 경쟁할 궤도에 올라섰습니다. 등소평 주석과 이나야마 회장의 나에 관한 그 대화는 뒷날에 포스코가 중국으로 진출할때 듬직한 지원군이 되어줍니다. 그만큼 중국 최고지도층이 포스코에 대해 우호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포스코 재임 당시 이것만은 해야 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일이 있으신지요. 재임 당시 하지 못해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재임 당시의 아쉬움은 없어요. 주기적으로 반복되어온 포스코에 대한 객관적 평가들만 봐도 내 말을 이해할 겁니다.

40년 역사를 통해 포스코만이 가지고 있는 DNA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또 이 같은 DNA를 유지하고 한층 향상시켜 나가기 위해 포스코 임직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포스코의 DNA는 제철보국과 우향우, 창의정신과 도전 정신입니다. 이러한 DNA를 면면히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길은 일차적으로 ‘작은 이기심’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물론 임원이 솔선수범을 해야지요. 그러자면 직장을 갖는다, 일을 하고 봉급을 받는다, 이런 기본을 넘어선 정신적 가치를 정립해야 하고, 또 그것이 포스코에 몸담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배어들어야 해요. 이러면 그 정신적 가치가 고유한 기업문화의 핵이 되는 겁니다.

포스코는 민영화를 통해 국민 기업으로 거듭났습니다. 포스코가 국민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갖고 이에 걸맞은 경영과 문화를 가지는데 있어 좀 더 보완해야 할 문제들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방금 말씀드린 그 정신적 가치를 거듭 강조하고 싶군요. 창업 세대는 민영화 이전부터 ‘다음 세기의 번영과 다음 세대의 행복’을 기약했고, 그것을 실현했어요. 다음 세기의 번영, 다음 세대의 행복을 목표로 내걸었을 때는 무엇보다 국민 기업으로서의 포스코의 사명과 위상을 강조하고 있었던 겁니다. 요즘은 ‘글로벌 시대’가 어디서나 통용되고 있지 않소? 포스코는 당연히 철강 산업에서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는 확고한 비전과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이건 우리의 국가적 비전이나 목표와도 관련이 깊어요. 이제 우리나라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장기적인 국가 전략과 정책적 차원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 나아가야 하는데, 포스코가 글로벌 리더로서의위상을 확보하는 일은 우리나라의 선진화에도 자연스레 이바지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포스코의 글로벌 사업에 대해서는 한 발 늦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1992년 하순부터 나는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진출에 관한 구체적 설계를 하고 있었지요. 그것이 내가 1993년 이른 봄에 포스코를 떠난 뒤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아까 ‘아쉬움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내가 포스코를 떠난 뒤에 생겨난 큰 아쉬움이 있다면 당시의 계획들이 대부분 구체화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떠날 때 ‘원료 광산’을 사라고 당부해뒀지만 이것도 이뤄지지 못했고…. 그런 아쉬움이 있는 가운데 현 경영진이 중국에 스테인리스 일관생산설비를 세웠고 또한 인도, 베트남, 남미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M&A 등 경영 환경이 변화하면서 세계 철강 시장도 재편되고 있습니다. 포스코가 글로벌 철강 회사로 발돋움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면서도 중요하게 접근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기본적으로 덩치가 더 커져야 합니다. 그러자면 현재 추진하고 있는 해외 프로젝트들을 순조롭게 잘 풀어 나가야 하고 신 사업 영역에서도 포스코의 전통에 걸맞은 성과를 올려야지요. 여기에다 원료 확보와 기술개발은 필수고. 물론 인재 육성은 핵심 중의 핵심이지. 일이란 결국 사람이 하는 거니까.

베트남에 일관제철소 건설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1년 전쯤에는 직접 방문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내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베트남 투자에 관심을 가지셨는데 어떤 계기에서였습니까.

 1992년 하반기에 포스코는 성장사의 큰 획을 그었어요. 그해 10월에 광양 4기를 준공하여 2100만 톤 체제를 갖추면서 포스코 사반세기 건설의 대역사(大役事)를 매듭지었으니까. 자, 이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이것이 매우 중요한 때였소. 수출 시장의 확대, 해외 직접 진출을 본격적으로 모색해야할 시기였지. 나는 1차로 중국, 베트남, 버마 등 동남아를 경영전략의 차원에서 주목하고 있었소. 그때 포스코 안에는 ‘중국에서 제2의 창업을 한다’는 말이 생겨났어요. 내가 그렇게 말했던 거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2년말에 베트남을 방문했어요. 두 모오이 서기장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나보다 연세가 많은 분이었는데, 그분과의 만남에서 인민에 대한 사랑과 청렴으로 필생을 살았던 호지명(호치민)의 제자답구나, 이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내 마음에도 베트남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지요.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쟁 시기에 베트남에서 달러를 벌어들였으니 인간의 기본예의로써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요. 두 모오이 서기장은 정말 진실한 태도로 한국의 경제개발 경험에 대해 듣고 싶어 했습니다. 몇 시간을 대화한 뒤에 내가 ‘수상과 약속이 있어서 일어나야 한다’고 했더니, 그분은 “내가 다 말해뒀다. 오늘 만나지 말고 내일 만나라”고 하더군요. 이래서 우리는 장시간 대화를 나눴는데, 그런 정도로 열성적이고 진실한 분이었어요. 나도 마음이 확 열렸지요. 헤어질 때는 그분이 내 손을 잡고 “내가 왜 이리 늦게 당신을 만나게 되었는지 원망스럽다”고 했어요. 그 방문에서 연산 20만 톤 규모의 미니밀 건설에 합의하고, 하노이-하이퐁 간 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하는 것도 논의했어요. 2007년 4월, 오랜만에 다시 베트남을 방문했더니, 베트남에는 활력이 돌고 있었지만 그리운 친구 같은 사람은 다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태생적인 배경도 있었겠지만 한때 포스코는 정치 외풍에 취약한 기업으로 인식되었는데, 이에 대해 명예회장님의 단절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그 때문 아니었습니까. 어떤 평가를 하고 계십니까.

 광양제철소 1기를 완성한 다음이었나? 나는 당시의 우리 중역들에게 ‘외풍 차단에 90%를 써야 했다’는 심경을 토로한 적이 있어요. 박 대통령이 계실 때는 누구보다도 그분이 나를 믿고 포스코로 불어오는 정치 외풍을 막아주는 울타리 역할을 해주시긴 했지만, 사실 그 시절에도 여당 쪽에서 정치자금을 요구하는 압박이 집요했어요. 이번에는 어느 회사와 설비구매 계약을 맺어라, 이런식으로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하면서 압력을 넣기도 했지. 물론 그 회사의 설비는 다른 회사에 비해 훨씬 비싼 조건 이었소. 정치권으로 넘겨줄 액수가 큼직한 혹처럼 더 붙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끝내 거절했어요. 오죽하면 나를 보고 여당 고위인사들이 ‘소통령’이라고 비아냥거렸겠소? 그 말을 듣고 나는 “이왕이면 ‘중통령’이라 불러 달라”고 맞받았고…. 이런 식으로 재임 25년 동안 어떤 경우든 원칙을 지키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외풍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주로 지인들 만나시는 것으로 소일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을 만나시고, 그 분들과는 어떤 주제로 대화를 많이 하십니까.

 인생이 뭔가요? 인연의 자계(磁界) 안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군인, 포스코, 포스텍 설립, 정치, 이것이 내가 걸어온 길이니 포스코, 재계, 군대, 정계, 학계 쪽에서 인연이 깊은 사람들과 편안하게 만납니다. 더러 젊은 사람도 만나고. 대화의 주제야 주로 세상 걱정이지 뭐. 나는 과학기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오.

이번 포스코 창립 40주년을 기념해 포항제철소 앞길이 ‘포스코路’, 포항의 5호 광장이 ‘청암광장’으로 개칭됐습니다. 감회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포항 시민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포스코는 앞으로도 지역사회와 ‘윈-윈’의 길을 가야지요.

포스코 창업 당시와 비교해 최근 기업과 기업인들의 기업가 정신에 대해 조언해 주십시오.

 모두들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하겠다고 하니 특별히 주문할 것은 없습니다. 시대적 환경이 바뀌면 경영의 방법론에도 변화는 생기기 마련인 것이고…. 그런데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생이 추구해야 할 어떤 불변의 가치가 있는것처럼 기업활동에도 이윤 창출을 바탕으로 추구해야 할 어떤 불변의 가치가 있지 않겠소? 그래서 ‘천하는 공(公)’이라는 생각이 정신의 바탕에 깔려 있기를 바랍니다. 손문 선생의 그 말씀에 대해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공감하게 됩니다.

한정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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