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어텍스를 만드는 미국 화학소재 업체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지난해 3조616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사진 :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

현존하는 최고의 알피니스트로 불리는 라인홀트 메스너는 1978년 세계 최초로 산소통 없이 에베레스트(초모룽마)에 올랐다. 세계 언론이 앞다퉈 소식을 보도했고, ‘인간의 능력을 한층 진화시켰다’는 찬사가 잇따랐다. 이때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이 있었다. 8000m가 넘는 봉우리를 등정한 메스너가 입고 있던 ‘고어텍스 재킷’이었다. 생산된 지 불과 6년이 지나지 않은 고어텍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정복한 사나이가 입은 옷으로 유명해졌다.


듀폰 출신 화학 기술자가 창업

40년이 지난 지금 고어텍스의 사용 범위는 훨씬 넓어졌다. 등산복뿐 아니라 인체 이식용 의료기구, 지구 밖 우주 공간에서 신호를 전송하는 전자 케이블 등 다양한 제품에 사용되고 있다. 덕분에 고어텍스를 만드는 미국 소재 업체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이하 고어)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 25여 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고어는 미국 200대 비상장 기업으로 꼽힌다. 고어의 공동소유자는 ‘동료(Associate)’라고 불리는 전 세계 1만여 명의 직원들이다. 실적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지만 후버 등 전문 시장조사 업체에 따르면 고어 매출은 최근 10년 동안 연평균 10%씩 증가하며 지난해 32억달러(약 3조6160억원)를 기록했다. 고어는 설립 후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독일·영국·중국·일본에 생산 공장이 있다.

고어는 화학 기술자 윌버트 고어가 1958년 아내 제네비브와 미 델라웨어주 뉴어크 자택 지하실에서 설립했다. 글로벌 화학 기업 듀폰에서 강력 합성수지인 폴리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PTFE)을 연구하던 윌버트는 절연체로 활용해 케이블을 만들고자 했지만, 회사가 자기 생각을 받아주지 않자 직장을 나왔다. 그리고 아내 제네비브의 설득에 따라 창업에 나섰다. 고어는 전자부품 업체로 출발했다. 고어가 처음 출시한 제품은 PTFE 절연 전선과 케이블이었다. 창업한 지 2년 만에 고어가 생산한 제품은 불티나게 팔렸고 고어는 큰 성공을 거뒀다.

1963년 창업자 윌버트의 아들 로버트가 회사에 합류하며 고어는 새로운 성장 국면을 맞이한다. 기업가이자 혁신가였던 로버트는 새로운 다기능 폴리머를 발견해 고어 제품이 더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후 고어는 의료·섬유·제약·생명공학·석유·항공우주·자동차·전자 제품·음악·반도체 산업 등에 진출했다. 1969년 달 착륙에 성공한 미 항공우주국(NASA) ‘아폴로 11호’에도 고어가 만든 케이블이 부품으로 사용됐다.


성공 비결 1 |
2000여개 기술 특허 확보

고어가 세계적인 기업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기술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고어가 생산하는 제품의 핵심기술은 PTFE에 있다. PTFE는 고장력·저유전율(低誘電率)·뛰어난 자외선 저항력을 가진 폴리머로, 1969년 로버트가 확장형PTFE(ePTFE)를 발견한 이후 PTFE의 활용성은 더 확대됐다. ePTFE는 매우 가벼우면서도 내구성과 통기성이 뛰어나다. 고어의 엔지니어들은 다양한 수요의 제품에 PTFE를 활용하기 위해 물질의 구조·모양·두께 등을 변형해 다른 보조 물질과 짝을 맞춰 배열했다. 이렇게 탄생한 제품은 그 용도에 따라 다양한 투기성·강도·유연성·두께를 가진다. 고어는 소재를 다양한 분야에 활용하며 세계적으로 2000여개의 특허를 취득했다.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고어 기술의 정수는 고어텍스다. 고어텍스가 다양한 제품 소재로 활용되는 이유는 방수·방풍·투습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고어텍스로 통칭되는 얇은 필름 형태 멤브레인(0.5~1.2㎜ 정도의 아주 얇은 막) 표면에는 1제곱인치(약 6.45㎠)당 90억개가 넘는 미세한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은 물방울 입자보다 작고(2만분의 1) 수증기 분자보다는 크다. 덕분에 외부에서 물이 들어오는 것은 차단하고 몸에서 배출되는 열기는 원활히 배출한다. 고어는 품질 좋은 고어텍스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모든 생산 단계를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 모든 고어텍스 제품은 100여 가지가 넘는 각종 테스트를 거친다. 내구성 시험과 울이나 사포를 이용해 천을 반복해서 문지르는 검증을 몇 시간, 심지어는 며칠 동안 멈추지 않고 반복한 뒤에야 합격 판정을 받는다.

기술력을 강화하기 위한 투자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고어는 매년 매출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을 연구·개발에 투자하며 세계 주요 대학·연구기관과 기술 개발을 위해 협업한다. 경쟁이 치열한 소재 업계에서 고어가 꾸준히 기술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보상 시스템과도 관계가 있다. 고어는 훌륭한 발명과 혁신을 내놓는 엔지니어들에게 크게 보상한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1978년 고어텍스 재킷을 입고 세계 최초로 산소통 없이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사진 :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

성공비결 2 |
의료·전자·우주 분야로 시장 개척

고어는 다양한 변형 기술로 ePTFE를 제작해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아웃도어 시장뿐 아니라 전기전자, 의료 시장에서 고어 제품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어 제품 라인에는 산악인들의 몸을 보호하는 원단뿐 아니라 액체·고체·미립자를 함유한 필터, 스마트폰 음질을 보호하는 벤트 제품, 우주복에 사용되는 섬유 제품, 임플란트 의료기구, 코 성형에 사용되는 보형물 등 수천가지가 있다. 고어는 극지방의 혹독한 환경에서 탐험가들을 지킬 뿐 아니라 환자의 회복을 돕고 탄소 배출 감축에 기여하는 한편 화성 탐사에도 기여하고 있다. 방수성, 우수한 생체 적합성과 같은 ePTFE의 특성은 극한 환경에서 고어의 제품과 응용기술의 가치를 더 높여주고 있다.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는 고어텍스 소재를 사용한 제품에 ‘Gore-Tex: Guaranteed to Keep You Dry’ 란 꼬리표를 달게 했다. <사진 :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

성공비결 3 |
고어텍스 기술력을 마케팅에 활용

고어가 글로벌 기업으로 명성을 얻은 데에는 경쟁사들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기술력이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영리한 마케팅 전략도 한몫했다. 1972년부터 생산된 고어텍스 소재는 처음엔 전문 산악인들에게 그 기능성을 인정받았다. 메스너가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데 입은 것이 고어텍스 재킷이었고 1981년에는 NASA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 우주비행사들이 입은 우주복 소재로 사용됐다.

1990년 국제남극대륙횡단팀과 2005년 남극 사우스 조지아 카약탐험대 ‘어드벤처 필로소피’ 역시 고어텍스 기능성 의류를 입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와 극지방은 물론 우주에 갈 때도 믿고 입을 수 있는 옷이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고어텍스 브랜드 이미지는 크게 높아졌다. 일반 소비자 사이에서도 고어텍스 기술력이 회자됐고 다양한 의류·신발 업체가 고어텍스 원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고어가 다른 소재 기업과 달리 일반 소비자에게도 친숙한 이유는 자신의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인그리디언트 브랜딩’ 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인그리디언트 브랜딩 전략이란 최종 제품에 포함된 부품이나 소재 같은 구성 요소(인그리디언트)를 브랜드화하는 것으로, 이를 많은 소비자에게 알리고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고어는 고어텍스 소재를 사용한 제품에 ‘Gore-Tex: Guaranteed to Keep You Dry’란 꼬리표를 달게 했다. 혹독한 환경에서도 몸을 쾌적하게 유지시키겠다는 약속을 소비자에게 직접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노스페이스·K2·라푸마 등 고어텍스를 사용한 의류 업체 제품을 사는 소비자들은 고어텍스 브랜드를 보고 구매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이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고어의 독보적인 기술력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정보기술(IT) 업체 인텔도 고어를 벤치마킹해 인그리디언트 브랜딩 전략을 활용해 성공했다.



고어는 동료의 성공을 지원하는 ‘스폰서’ 제도를 운영한다. <사진 :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

성공 비결 4 |
수평적 조직문화 구축

고어는 유연하고 수평적인 조직문화로도 유명하다. 지난해에는 일하기좋은기업연구소가 세계 기업들의 문화를 평가해 일하기 좋은 상위 25개 기업을 선정하는 조사에서 ‘세계 최고의 다국적 기업’ 3위를 차지했고, 미국 경제지 포천이 발표하는 ‘미국 내 가장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에도 매년 빠지지 않고 순위를 올리고 있다.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스웨덴·중국·한국에서도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으로 선정됐다.

창업자인 윌버트는 권위주의와 수직적인 관계가 직원의 창의성을 발현하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해 새로운 조직문화를 조성하기로 했다. 듀폰에서 근무할 당시 그는 직원들이 자유롭게 대화하는 순간은 동료들끼리 카풀을 할 때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라도 합승하며 출퇴근할 때는 생산적인 대화와 아이디어를 나눴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기업 고어에서 직급·직함, 상하관계를 없애면 언제나 대화와 에너지가 흐르는 조직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윌버트는 “기업의 목표는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신념은 고어 조직문화에 고스란히 적용됐다.

고어에서 직원들은 서로를 ‘동료’라고 부른다. 사명(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 자체가 ‘고어와 그의 동료들’이다. 고어 직원들은 자유·공정성·헌신·수위선이라는 4가지 기본 원칙을 지킨다. 동료가 서로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고, 모든 직원은 동료, 협력업체, 고객사 등 사업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한다. 또 직원들은 주어진 임무만 수행하기보다 주체적으로 약속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한편 기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는 ‘수위선’ 아래에 있는 사안은 동료와 충분히 논의한 뒤 결정한다. 전통적인 상하 관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수평 조직은 아니다. 직원들의 경험과 업무 능력은 존중되기 때문이다.

소규모 팀 단위로 조직돼 프로젝트 단위로 업무를 수행하는 고어는 ‘격자형 의사소통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직원들은 격자형 구조를 통해 동료와 자유롭게 의사소통하고 다양한 관점과 능력을 모아 신속하게 결정을 내린다. 세계적으로 동료가 1만명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이런 구조 덕분에 고어 직원들은 최상의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팀원과 지속적으로 협력한다.

고어는 동료의 성공을 지원하는 ‘스폰서’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고어에 입사한 모든 직원에게는 스폰서가 배정된다.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직원이 직접 본인의 성장과 발전에 가장 적합한 스폰서를 선택할 수 있다. 스폰서와 리더는 동료의 성장을 뒷받침하고, 조직 내에서 다른 동료들과 잘 융합할 수 있도록 후원한다. 상사나 선임이 아니라 멘토로서 동료가 올바른 방향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세계적인 경영 혁신 컨설턴트 게리 해멀 교수는 혁신 사다리의 꼭대기에 있는 ‘관리 혁신’을 실증해낸 대표적 기업으로 고어를 꼽았다.


plus point

직원 투표로 선정된
테리 켈리 CEO


테리 켈리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 CEO. <사진 : 블룸버그>

수평적인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는 직원 설문조사를 통해 최고경영자(CEO)를 선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어 CEO는 직원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사회가 임명한다. 현재 고어 CEO인 테리 켈리는 2005년 직원 투표를 통해 선출된 첫 CEO다. 미국 델라웨어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 고어에 입사한 그는 섬유사업 공정 개발 엔지니어로 일했고, 고어텍스 제품 개발도 담당했다. 산업용 섬유사업팀에서 일할 당시 ‘고어텍스 군복’을 개발해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자유로운 업무 환경과 수평적인 조직문화에서 창의가 싹트고 이것이 기업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창업자의 신념을 기업 경영에 적용하고 있다. 켈리 CEO는 “직급이나 직책으로 직원의 역할을 한정하면 이들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다”며 “이런 조직 시스템이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더 효율적이고 창조적”이라고 말했다. 켈리 CEO는 가장 가치있는 혁신은 다른 관점과 독특한 시각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의료 전문 지식이 없는 직원이 전문가보다 의료사업 부문에서 놀랄 만한 아이디어를 낼 가능성이 크고, 이는 더 큰 수익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3년째 고어를 이끌고 있다.

연선옥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