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 재료로 만든 러쉬의 핸드메이드 비누. 러쉬 매장에서는 비누와 입욕제 등을 별도의 포장 없이 덩어리째 진열한다. <사진 : 러쉬>

‘바나나 9t, 라임 5t, 레몬 1t, 꿀 62t, 올리브오일 19t, 코코아버터 220t….’

영국 남부 도셋 지방의 항구 도시 풀(Poole)에 본사를 둔 ‘러쉬(Lush)’가 2016년 사용한 주요 재료 목록의 일부다. 러쉬는 과일주스 회사가 아니다. 영국의 천연 재료 화장품 기업이다. 천연 재료를 사용해 만든 형형색색의 수제(手製) 비누와 입욕제로 인기가 높다. 러쉬가 지난해 판매한 비누 무게만 해도 28t이 넘는다.

러쉬는 올해 4월 기준으로 49개국에 931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이 중 200개는 세계 최대 화장품 시장인 미국에 있다.


창업 이후 수작업 생산 고수

지난해 매출 7230억파운드(약 1조484억원)를 기록하며 창업 22년 만에 매출 1조원을 넘어섰다. 2015년 대비 26% 증가했다.

러쉬의 전신은 두피 전문가 출신의 마크 콘스탄틴과 뷰티 테라피스트 출신의 리즈 위어가 1977년 풀에서 창업한 ‘콘스탄틴 앤드 위어(Constantine & Weir)’라는 공방이다. 이들은 과일과 채소, 식물, 꽃 등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염색약, 바디오일, 풋로션 등을 직접 만들어서 팔았다. 1980년대 초에는 세계적인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 ‘더바디샵(THE BODY SHOP)’에 제품을 공급하며 업계에서 인지도를 한껏 끌어올렸다.

당시 콘스탄틴 앤드 위어는 더바디샵 외에도 여러 곳에 거래처를 두고 있었고, 이 때문에 독점 공급을 원했던 더바디샵과 마찰을 빚었다. 결국, 콘스탄틴 앤드 위어는 1984년 더바디샵에 매각됐다. 인수 가격은 1100만파운드(약 160억원)였다.

이후 화장품 통신 판매 등으로 경험의 폭을 넓힌 콘스탄틴 앤드 위어의 핵심 멤버들은 1994년 겨울에 새로운 천연 재료 화장품 회사를 설립하고 회사 이름을 공모했다. 그 결과 ‘러쉬(LUSH·신선한, 신록 등을 뜻함)’라는 이름이 최종적으로 선정되면서 1995년 4월부터 새로운 회사의 이름이자 정식 브랜드명으로 사용됐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지금, 더바디샵의 제품 공급 업체로 쌓은 내공을 바탕으로 탄생한 러쉬는 실적 부진으로 매물로 나온 더바디샵 인수에 눈독을 들일 만큼 업계의 ‘큰손’으로 성장했다. 2006년 프랑스 화장품 회사 로레알에 인수됐던 더바디샵은 실적 부진으로 6월 말 10억유로(약 1조2800억원)에 브라질 최대 화장품 기업 내츄라 코스메틱스로 매각이 결정됐다. 당시 러쉬와 CJ그룹이 인수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비싼 천연 재료를 사용해 수작업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러쉬가 20년 남짓한 기간에 세계적인 코스메틱 업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러쉬의 창업자 마크 콘스탄틴. <사진 : 러쉬>

성공비결 1 |
포장과 광고 최소화해 비용 절감

콘스탄틴은 창업 당시 천연 재료를 고집하고, 광고를 하지 않으며, 포장을 세련되게 꾸미지 않겠다는 3대 원칙을 세웠다. 원가를 절감해 제품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화장품을 비롯한 뷰티 산업은 전통적으로 포장을 중요하게 여긴다. 토마토, 복숭아, 바나나 등 과일 모양의 독특한 용기로 큰 인기를 끌었던 국내 화장품 제조 업체 ‘토니모리’가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러쉬 매장에 가면 비누나 입욕제 같은 고체 상품들은 별도의 포장 없이 덩어리째 진열돼 있다. 포장이 필요한 일부 제품은 반드시 재활용이 가능한 용기를 사용한다. 또 용기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액상 제품은 고체화시켰다. 액상 샴푸와 치약을 압축해 고체 샴푸와 치약으로 만드는 식이다. 고체 제품은 액상 제품과 사용 기간은 같지만, 무게가 가벼워 운송비용을 낮추는 효과도 있다.

포장을 없앤 것은 단지 비용 절감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천연 재료 배합으로 만들어진 알록달록한 제품 고유의 색감 때문에 포장을 없앤 것이 오히려 독특한 시각 효과를 만들어낸다. 포장을 하지 않으니 강한 향기가 날 수밖에 없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러쉬 매장 앞을 지나가면 향기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게 된다. 포장을 없애 제품의 ‘맨살’을 드러내면서 비용 절감과 감각적인 마케팅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러쉬는 광고에도 거의 돈을 쓰지 않는다. 메이저 화장품 회사들이 매출의 20~30%를 광고에 쏟아붓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콘스탄틴은 이와 관련해 광고에 의존하는 것이 ‘도덕적 해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정보가 인터넷으로 공유되는 시대에 소비자들이 더 이상 기업이 말해주는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게 됐다는 것도 그가 광고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또 다른 이유다.


성공비결 2 |
‘진정성’을 부각시키는 매장 환경

경영학에서 진정성(authenticity)은 ‘고객이 원하는 가치에 부응하는 것’이란 의미로 널리 쓰인다. 러쉬 매장을 찾은 고객이 기대하는 가치는 무엇보다 ‘천연 재료가 주는 신선함’이다. 그리고 진정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러쉬의 노력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이 바로 매장이다.

러쉬 매장에 가보면 화장품 매장이라기보다 식품 매장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콘스탄틴은 제품의 진열 방식에 관한 아이디어를 과일 가게에서 얻었다고 한다. 고객이 주문하면 커다란 덩어리 형태의 비누를 원하는 만큼 썰어준다. 유럽의 시장에서 치즈를 썰어 파는 것과 비슷하다. 수제로 만든 비누에는 꽃잎과 과일 껍질, 씨앗 등 재료의 입자가 남아 있다. 여기에 더해 제품의 ‘신선도’ 관리에도 특별히 신경을 쓴다. 러쉬는 유통 기간이 통상 14개월인 제품들도 4~5개월 이상 매장에 두지 않는다. 이 같은 이유로 러쉬 매장에서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은 일반적인 화장품 매장에서 느낄 수 없는 매우 ‘자연 친화적’인 기분을 느끼게 된다. 러쉬의 공장을 ‘부엌(kitchen)’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의도에서다. ‘부엌’의 입지는 전통적인 공업 도시와 거리가 멀다. 러쉬는 현재 본사가 있는 영국 풀을 포함해 캐나다 토론토와 밴쿠버, 독일 뒤셀도르프 등에 생산 시설을 두고 있다. 하나같이 세계적으로 살기 좋은 친환경 도시들이다.

매장에 물을 담은 넓은 대야를 가져다 놓고, 입욕제를 넣어 거품이 나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등 소비자들이 제품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진정성 마케팅’의 일환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러쉬는 2015년 영국 소비자 단체 ‘위치(Which)’가 실시한 고객 만족도 설문조사에서 존 루이스 백화점을 제치고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성공비결 3 |
‘업의 본질’에 충실한 사회 공헌 활동

‘마케팅의 아버지’로 불리는 필립 코틀러 미국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교수는 저서 ‘착한 기업이 성공한다(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서 “기업의 사회 참여가 도덕적 의무나 자선 활동에서 벗어나, 기업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전략적 차원에서 실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러쉬는 그동안 다양한 환경문제와 사회문제에 대해 뚜렷한 목소리를 내 왔다. 상당수의 경우 코틀러가 이야기한 ‘전략적’ 접근과 잘 맞아떨어졌다.

가장 유명한 것이 ‘동물 실험 반대’다. 러쉬는 동물 실험을 조금이라도 한 업체와는 절대 거래하지 않는다. 중국이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은 제품은 수입할 수 없다고 하자 중국에 제품 공급을 중단하며 50조원이 넘는 시장을 걷어찼다. 이익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의 핵심 가치와 모순되는 방향으로 이익을 추구할 경우 기업의 존속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비누에 들어가는 팜 오일(야자유)의 소비 증가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열대우림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고 그곳 동물의 생존이 위협받자 제품에 팜 오일을 넣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팜 오일 대신 해바라기 씨 오일이나 유채 씨 오일, 코코넛 오일 등을 섞어 만든 비누에 식물 성분과 에센셜 오일을 첨가해 수제 비누를 만들고 있다. 이와 함께 다른 업체도 팜 오일 사용을 줄일 것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제품과 상관없는 환경운동과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이다. 석유 회사들의 석유 추출로 타르 샌드 매장량이 많은 캐나다의 자연과 거주민들이 고통받자 이를 막기 위해 ‘타르 샌드 채취 반대’ 캠페인을 전개했다. 탈북자를 지원하는 홍콩의 단체와 위안부 피해 역사 교육 및 자료 보존에 힘쓰고 있는 ‘민족과 여성 역사관’, 청소년 성 소수자들을 위한 단체를 후원하는 등 다양한 계층과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



‘러쉬 팬’을 자처하는 유튜브 스타 타냐 버. <사진 : 유튜브 캡처>

성공비결 4 |
공격적인 소셜미디어 활용

광고비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활용할 수 있는 채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러쉬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해 고객의 충성도를 높이고, 잠재 고객에게도 자연스럽게 접근한다.

러쉬의 북아메리카 페이스북 공식 계정은 팔로어 수가 120만 명이 넘는다. 최근 공유된 제품 관련 동영상도 조회 수가 기본적으로 수만 건에 달할 만큼 호응도가 높다. 러쉬는 북미 외에도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호주, 브라질, 싱가포르, 홍콩, 태국, 한국 등 진출 국가마다 별도의 현지어 페이스북 계정을 운영 중이다.


러쉬 인스타그램 팔로어 330만 명

러쉬의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330만 명이 넘는 팔로어가 등록돼 있다. 여기서 공유된 제품 관련 이미지는 13만 장이 넘는다. 지난해 봄에는 매장 정보와 다양한 읽을거리를 모아 제공하는 자체 앱(Lush Content)도 선보였다.

영국의 패션 및 뷰티 전문 브이로그(비디오와 블로그의 합성어로 일상을 그대로 담은 동영상을 뜻함)를 운영하는 조엘라와 메이크업 팁을 제공하는 동영상으로 유튜브 스타로 떠오른 타냐 버 등 ‘러쉬 팬’을 자처하는 유명 인사들을 활용한 ‘인플루언서 마케팅(SNS 스타 등 영향력 있는 인사를 활용한 홍보 활동)’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조엘라는 지난 4월 미국 ‘포브스’가 선정한 ‘뷰티 부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올랐다.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유튜브 뷰티 채널에서 1100만 명, 인스타그램에서 1000만 명의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으며 작년 한 해 월평균 수입이 5만8000유로(약 7500만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냐 버는 유투브 활동만으로 월 2만파운드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러쉬는 각 제품의 특성을 따서 지은 독특한 제품 이름과 이야기를 접목하는 스토리텔링 마케팅에도 적극적이다. 예를 들어, 붉은색 입술 보호제의 이름은 ‘키스와 함께 시작한다(It Started With a Kiss)’인데, 백설공주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세안제인 ‘나인 투 파이브(9 to 5)’는 (서구의 경우)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는 직장인의 지친 피부를 가꿔 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plus point

전 세계에서 좋은 재료 구매… 산지에서 테스트


러시의 ‘부엌(kitchen)’에서 파파야를 이용해 제품을 만드는 모습. <사진 : 러쉬>

러쉬는 ‘우리는 믿습니다(We Believe)’라는 슬로건 아래 다섯 가지 신념을 브랜드 운영에 적용하고 있다.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한 신선한 과일 및 채소의 중요성, 행복한 사람들이 만드는 행복한 비누, 세상을 향기로 채우는 소중함, 동물 실험 반대, 식물성 재료 사용과 포장의 최소화’가 러쉬가 이야기하는 브랜드 신념이다.

이와 관련해 러쉬는 ‘크리에이티브 바잉(Creative Buying)’이란 이름의 구매팀을 두고 믿을 수 있는 생산자로부터 재료를 직접 구매한다. 세계 어느 곳이든지 양질의 재료가 있다면 찾아가 재료 하나하나를 직접 테스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미 오일을 구하기 위해 구매팀은 산지인 모로코 현지에서 장미를 수확할 때부터 재료를 지켜본다. 단순히 좋은 품질의 재료만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현지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공정 거래’에도 특별히 신경을 쓴다.

러쉬가 천연 화장품을 지향하고 있지만, 제품에 들어가는 성분이 100% 천연은 아니다. 제품의 성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파라벤, 티타늄디옥사이드 또는 각종 향료가 첨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천연 재료’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천연 재료의 함량이 경쟁 제품에 비해 많고, 제조 과정에서 안전이 검증된 최소한의 인공 성분만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러쉬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다. 특히 숯으로 만든 비누 ‘콜 페이스’는 한때 전 세계 생산량의 60%를 한국에서 팔았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한국 제품 가격은 다른 나라에 비해 비싼 편이다. 이로 인해 한국 소비자들은 온라인 ‘직구(해외 직접 구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러쉬코리아는 보석디자인을 전공한 우미령 현 대표가 2002년 들여와 전국 70여 개 매장, 500여 명의 직원을 둔 조직으로 키웠다. 임직원 중 여성 비율이 70%에 달한다.

신입사원은 회사 임원이 아닌 2~3년 차 사원들이 면접을 보고 뽑는 등 독특한 조직 문화를 만들고 안착시켰다.

이용성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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