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환전소 앞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미 달러화 대비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는 올 들어서만 20% 넘게 곤두박질쳤다. / 블룸버그

아르헨티나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2000년대 초 외환 위기가 재현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통화인 페소화의 가치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40%까지 인상했는데도 디폴트(채무불이행) 우려가 나오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구제금융 규모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블룸버그와 일부 현지 언론에서는 300억달러(약 32조원) 수준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8일(현지시각) TV 연설을 통해 “(구제금융을 통해)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했던 과거와 같은 위기를 피하고, 우리의 성장 전략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초 미국 달러당 18페소대였던 아르헨티나 페소화 환율은 22페소대로 치솟았다(달러 강세, 페소화 가치 하락). 이 기간 페소화 환율이 20%가 넘게 오르면서 외채 비중이 높은 아르헨티나가 달러로 갚아야 할 부채 규모가 커져 외환위기 우려가 불거졌다. 통화가치는 국가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을 측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지표로 통한다. 통화가치가 폭락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가 취약해졌다는 뜻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통화가치가 더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50억달러(약 5조원)가 넘는 외환보유액을 쏟아부어 페소화를 사들이고, 기준금리를 최근 일주일 사이 12.75%포인트나 오른 40%로 끌어올렸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아르헨티나 페소화가 사상 최저치를 경신한 데는 미국 금리 인상의 영향이 컸다. 오태동 NH투자증권 투자전략부장은 “역사적으로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면(즉 긴축에 들어가면) 3년의 시차를 두고 위험에 빠지는 국가가 나온다”며 “2015년 12월 미국이 금리를 처음 인상한 뒤 만 3년이 돼 가는 올해 외채 비중이 높은 아르헨티나가 가장 먼저 타격을 받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긴축 발작(Taper Tantrum)’ 효과가 나타난 것이란 분석이다. 신흥국은 2013년 벤 버냉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긴축을 시사하자 막대한 자금이 빠져나가며 홍역을 치른 바 있다. 국제금융연구소(IIF)에 따르면, 미국 2년물 국채 금리가 2.5% 수준으로 급등한 4월 16일 이후 투자자들이 신흥국 시장에서 55억달러(약 6조원)를 빼내 갔다. 이는 2013년 긴축 발작 당시보다 속도가 더 빠른 것이다. IIF는 미국의 단기 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신흥국 투자 자금이 올해에만 430억달러(약 46조원) 빠져나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올해에 최소 두 차례, 내년 세 차례 추가 금리 인상을 시사하고 있는 점도 이런 우려를 가중시키고 있다. 1.75%(상단) 수준인 현재 기준금리가 올해 말까지 2.25%로, 내년에 3.0%로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가 취약한 다른 신흥국 통화가치도 동반 하락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비슷하게 외채 비중이 높고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보이고 있는 터키의 리라화 가치는 올 들어서 15% 곤두박질쳤다.


아시아 외환위기 때와는 상황 달라

최근 고공행진하고 있는 유가도 아르헨티나와 터키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유가가 빠른 시일 내에 배럴당 80달러까지 치솟을 것으로 점쳐진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두 국가의 물가가 폭등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같은 기간 러시아 루블화, 브라질 헤알화, 인도네시아 루피화 가치도 4~10% 하락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5월 7일 기준 주요 10개 신흥국 통화 지수는 3월 말 대비 4.9% 떨어졌고, 신흥국 주가(MSCI지수) 역시 2.7% 하락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발(發) 위기가 1980년대 초반의 남미 외채 위기나 1990년대 후반의 아시아 외환위기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변동환율제 도입과 충분한 외환보유액, 경상수지 적자 감소 등의 영향으로 많은 신흥국이 과거보다 자금 유출의 충격을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에 따르면, 터키와 아르헨티나를 제외한 신흥국의 최근 경상수지는 5년 전보다 적자 규모가 줄거나 흑자로 전환하고 있다.

오태동 투자전략부장은 “아르헨티나의 단발성 악재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신흥국들이 자국 통화로 채권을 발행하는 등 외채 상환 부담이 이전보다 줄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이 계속 예정돼 있고, 경기가 둔화하면서 시간 차를 두고 위기 국가가 나올 수 있는 만큼 신흥국 관련 투자는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Plus Point

“공공부문 지출 더 줄여야” IMF, 작년부터 경고

작년 12월 말 공개된 IMF의 아르헨티나 연례협의 결과 보고서에는 이미 아르헨티나에 대한 재정적자와 이로 인한 대외부채, 경상수지 적자 확대 등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IMF가 집계한 아르헨티나의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2017년 기준 각각 국내총생산(GDP)의 6.9%, 4.3%에 달했다. 이에 따라 GDP 중 모든 대외부채가 차지하는 비율은 36.2%다. IMF가 개선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최근 10년간 지출이 확대됐던 공공부문의 임금·연금 등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다. 보고서는 2015년 12월 출범한 아르헨티나 정부가 공공부문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건설회사 등에서 일한 기업가 출신인 마크리 대통령은 앞서 12년간 집권한 좌파 정권의 노선에서 완전히 방향을 틀어 친(親)시장적 색채를 뚜렷하게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동안 다른 남미 국가들보다 많이 거뒀던 사회보장성 세금, 법인세 등을 올해 1월부터 모두 내린 것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2017년 아르헨티나의 실질 GDP는 전년 대비 2.8% 성장했다. 향후 5년간은 지속적으로 2~3%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IMF는 예상하고 있다. 실업률 또한 2016년 정점(8.5%)에서 하락해 2022년에는 6.1%까지 낮아질 전망이다.

아르헨티나의 외환보유고는 2017년 말 기준 약 450억달러로 한국(3892억달러)의 약 11.5% 수준이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외국인 자금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면서 올해에만 보유외환의 10% 이상을 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