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준 BMW코리아 회장이 6일 오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최근 잇따른 BMW 차량의 화재사고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b>사진</b> 연합뉴스
김효준 BMW코리아 회장이 6일 오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최근 잇따른 BMW 차량의 화재사고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1996년 미국인 의사 아이라 고어(Ira Gore)는 자신의 승용차 BMW 535i를 정비소에 맡겼다. 정비소에서 고어는 이 차가 차체(車體) 결함을 숨기기 위해 판매되기 전에 덧칠을 했다는 것을 알고 격분했다. 이미 9개월 간이나 아무런 문제없이 운전을 해왔지만 BMW사에 ‘속았다’는 생각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Punitive Damage)를 이용해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200만달러를 배상금으로 받아냈다. BMW사는 덧칠 사실을 알리지 않은 죄로 고어가 당시 차를 구매한 가격(4만750달러)의 50배를 물어줬다.

22년 후 한국에서 BMW의 문제가 발견된 장소는 정비소가 아닌 도로 위였다. 올해 1월부터 현재까지 영동고속도로 등 도로 위를 질주하던 BMW 520d, 320d, X4 등 34대의 차량 엔진에서 불이 나 운전자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2016년부터 엔진에서 간간이 화재가 발생했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BMW코리아는 올해 집중적으로 화재가 발생하자 대국민사과 기자회견(6일)을 했지만 화재 원인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자발적 리콜도 발표했지만 피해보상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었다.

미국 등 해외 소비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피해보상을 하면서 국내 소비자들의 피해는 방치하는 BMW 등 외국기업들의 대처 때문에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 등 강력한 제재방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더 이상 국내 소비자를 우습게 보는 해외 기업들을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최근 “국토교통부와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부처가 협의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을 위한 검토를 진행할 계획”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제조물책임법, 자동차관리법 등 관련법을 국토부와 공정위, 법무부 등 범정부 차원에서 논의해 기업의 고의·과실로 국민들이 지속적으로 피해를 볼 경우에는 중징계를 내리는 방안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아직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법이 개정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진행을 해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장인 자유한국당 박순자 의원도 지난 6일 “자동차의 결함에 대해 제작사가 신속한 원인 규명과 사후 조치를 하지 않아 소비자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소비자원과 미 법무부 통계국에 따르면 미국의 주(州) 법원에서 다뤄진 불법행위소송 1만6000건의 표본 사례 중 약 10%가 징벌적 손배사건이었다. 존슨앤드존슨(2016년 베이비파우더 난소암 유발로 630억원 배상), 맥도널드(1994년 커피로 인한 화상으로 60만달러 이하에서 합의) 등의 사례가 있다.


국내기업 보호제도 악용하는 외국기업

외국 기업들이 국내 소비자들을 얕잡아보는 것은 국내법이 기업(제조사)을 보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2년 국내에 도입된 집단소송제(판결의 효력이 소송 당사자뿐만 아니라 피해자 전체에게 적용되는 제도)는 증권분야에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제품을 파는 기업이 한번의 패소로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어 문을 닫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소송범위를 제한해 놓은 것이다.

반면 미국 등에서는 업종에 관계없이 집단소송제를 적용한다. 이 때문에 미국의 실리콘개발사 다우코닝은 실리콘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숨기고 가슴확대수술용으로 판매하다 24억달러의 배상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 제조기업은 이런 제도를 적용받지 않는다.

국내법에선 제조물에 대한 과실의 책임을 증명해야 하는 의무도 소비자가 지도록 해놨다. 예를 들어 BMW처럼 주행 중에 화재가 나면 운전자(소비자)가 자동차의 결함이 있어 피해를 봤다는 것을 증명해 자동차 회사에 배상을 청구해야만 한다. 자동차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 사람일 경우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음에도 소비자들에게 과실 증명의 책임을 씌우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엔 자동차에 문제가 발생해 소비자들이 피해를 봤을 경우 관련 법(제조물책임법)에서 자동차의 문제가 제조사의 책임인지 아니면 운전자의 과실 때문인지 여부를 자동사 회사에서 조사토록 하고 제조사가 자동차의 결함이 아니라고 주장할 경우 이를 직접 증명해야만 하도록 규정해 놨다.

서문식 김앤장 변호사는 “미국의 규제는 기업에 적극적으로 소비자보호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경고를 주는 시스템”이라며 “우리 사회도 이번 기회에 (징벌적 손배제도 등) 소비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들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plus point

한 번에 ‘훅’가는 미국 제조물책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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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법 원칙에서는 가해자의 고의·과실이 입증돼야 불법이 성립하고 불법 행위 입증 책임은 배상금을 요구하는 피해자가 진다. 그러나 미국 제조물책임법은 제조자의 고의·과실이 없고 소비자가 제조물 결함에 따른 피해를 입증하지 못해도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제조물, 특히 자동차와 같이 복잡한 제품은 회사가 제조물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품질 결함으로 사고가 발생해도 소비자는 제조사의 잘못인지를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 연방법에서는 제조물책임법에 따라 제조사의 책임이 인정될 경우 피해액에 대한 배상액 최고한도를 정해놓지 않아 천문학적인 배상을 하는 기업들도 종종 나온다. 다만 주(州)법에서 배상액 최고한도를 정해놓은 곳도 있다.

국내에서도 이런 문제를 인식해 지난 4월부터 제조물책임법을 개정·시행하고 있다. 개정된 국내 제조물책임법에서는 제조물의 결함을 소비자가 명확하게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다음 3가지 경우에는 결함을 입증한 것으로 인정해준다. △해당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피해자의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 △그 손해가 제조업자의 실질적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부터 초래되었을 경우 △그 손해가 해당 제조물의 결함 없이는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않을 경우 등이다. 이렇게 제조물의 결함이 인정될 경우에는 피해액의 최대 3배까지 배상을 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미국 등에 비해 입증 책임을 면제해주는 범위가 제한돼 있고, 배상액도 훨씬 낮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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