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세운3구역 재개발 전면 재검토를 1월 23일 발표하자 이 지역 토지주들과 소상공인들이 정부 정책 방향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민아 기자
서울시가 세운3구역 재개발 전면 재검토를 1월 23일 발표하자 이 지역 토지주들과 소상공인들이 정부 정책 방향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민아 기자

서울시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와 수표도시환경정비구역의 재개발 사업을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재개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을지면옥‧양미옥 등 노포(老鋪‧오래된 가게)와 공구상가들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정비 사업은 연말까지 멈춘다. 을지면옥 등 맛집들 철거된다는 소식에 비난 여론이 나오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1월 16일 을지로 일대 개발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지 일주일 만이다.

서울시의 오락가락 재개발 정책에 토지주, 시행사, 소상공인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은 “정책 방향을 예측할 수 없으니 혼란스럽다”는 입장이다. 토지주 입장에서는 재개발 정책 진행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개발이 멈춰버리니 난감하다. 이 인근을 찾는 손님들 입장에서는 노후화된 시설에서 식사를 하고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불편하다. 소상공인들은 뚜렷한 세입자 재입주 대책 없이 재개발을 시행사에 맡겨버린 서울시가 야속하다. 을지로‧청계천 일대의 재개발 정책은 이해 관계자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 실패한 정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재개발 사업 재검토 정책을 발표한 1월 23일, 서울시청 앞과 을지로3가역 인근 세운‧수표지구를 찾았다. 이날 오전 서울시청 앞에는 세운3구역 영세 토지주 100여명이 모여 ‘서울시 전면 보류 결사 반대’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이들은 ‘세운지구’로 불리는 세운3구역에 약 50㎡(15평) 안팎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날 세운3구역 420명의 토지주가 서명한 “서울시의 정책 혼선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내용의 탄원서도 제출했다. 탄원서에는 “세운3구역은 2006년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됐지만 서울시의 정책 정책 혼선으로 십여년이 지나도록 진척 없이 지지부진했다”면서 “토지담보대출 등에 따른 금융 비용으로 일부 지주들이 고통받았고, 토지는 경매에 넘어갔다”고 했다.

같은 날 오후 1시쯤 찾은 세운‧수표지구 곳곳에는 ‘재개발 결사 반대’ ‘서울시는 거짓 정책 해명하라’ 등 재개발 정책에 반발하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수표지구 상가 세입자들은 각자의 가게에서 ‘생존권 사수’라는 글자가 적힌 붉은 조끼를 입고 일을 하고 있었다. 청계3가 사거리에는 이 구역 소상공인들의 연합인 청계천 생존권사수비상대책위원회 천막이 설치돼있었다. 이 지역에서 30년간 공구를 팔다가 최근 퇴거조치를 당했다는 박헌식 선일공구 대표는 “평생을 바친 이 가게로 다시 돌아오지 못 할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며 울먹였다.

이 구역을 찾는 손님들로부터는 노후화된 상가를 이용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논란의 중심이 됐던 을지면옥 관계자에게 이번 재개발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묻자 “사장님이 안 계시다”며 말을 아꼈다. 을지면옥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온 직장인 김성기(58)씨는 “맛은 둘째치고 시설이 아주 낡고 헐었다”고 했다.

재개발 전면 재검토를 두고 서울시의 일관성 없는 정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애당초 재개발을 추진하면서 노포가 가진 문화적‧산업적 가치를 충분히 검토했어야 하지만, 이를 놓친 박 시장이 뒤늦게 허겁지겁 여론에 떠밀려 내린 결정이라는 지적이다. 한 전직 공무원은 “을지면옥을 보호하려면 문화재로서의 가치 등 그에 상응하는 공익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면서 “위원회나 심의 절차 등을 거쳐야지, 권력자가 기분내키는 대로 정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했다.

세운지구 일대의 재개발은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나아간 경험이 없다. 서울시의 권력을 쥔 정치인이 바뀔 때마다 손바닥 뒤집듯 정책이 뒤집혔다. 세운지구는 실력 있는 공구상들과 오래된 맛집들이 모여들어 6‧25전쟁 후 한국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끌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이 노후화했다. 서울시는 이를 개선하겠다면서 1979년 세운지구를 정비구역으로 지정했지만, 이후에도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그러다 지난 2006년 10월,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세운3구역을 포함한 세운상가 일대를 ‘재정비촉진구역’으로 지정해 초고층 건물을 짓겠다고 했다. 하지만 계획은 2008년 금융위기 여파로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으며 선뜻 나서는 사업자가 없어 중단됐다. 이후 2014년 3월, 박 시장은 세운지구에 아파트와 업무시설, 상가 등의 복합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계획도 올해 1월 여론이 악화하면서 결국 4년여만에 전면 중단됐다.

서울시는 “지난 2015년 ‘생활유산’을 정리해 반영한 바 있었으나, 정비사업 추진 과정에서 제도 운영 사각지대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을지면옥‧양미옥 등을 보존 가치가 있는 생활유산으로 지정했던 사실을 정비사업을 추진하면서 놓쳤다는 이야기다. 서울시의 재개발 계획을 믿은 토지주와 부동산 개발업자, 제대로 된 대책 없이 평생을 바쳤던 가게를 떠나는 처지가 된 소상공인들 사이의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뚜렷한 방향 없다면 헛바퀴 반복

전문가들은 신중한 재개발 정책 수립 없이는 서울시의 도심 재개발 정책이 또다시 헛바퀴를 돌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서울시가 노포가 문화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명분만을 언급하고 한발 물러나기보단,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서울시가 해당 지역을 보존할지, 철거할지, 보존과 철거를 동시에 진행할지 명확하게 판단을 하고, 큰 틀을 잡은 후 그 속에서 재입주 절차, 생존권 보장 대책 등 소상공인을 보호하는 전략을 짜야 한다”면서 “관이 주도해 이해 관계자들이 충분한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줘야 도시 재생의 결과도 더 창조적인 방향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도시개혁센터 팀장은 “상가세입자에게는 4개월치 영업실적을 보상해주는 것 외에 대책이 없어, 이들에게 재개발이란 쫓겨난다는 의미”라고 했다. 남 팀장은 “시와 구청은 정비 구역만 지정하고 재개발로 인한 세입자의 퇴거 문제 등은 건물주와 시행사에게 다 넘기면 이런 문제는 계속 반복될 것”이라면서 “지금도 재개발 기간에에 이주할 수 있는 상가를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의 세입자 대책이 있으나, 부동산 사업자들이 편법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많은 상황이다.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재개발 전면 재검토가 발표나던 이날 오후 2시, 청계천 인근 공구상가 상인들과 시민단체들이 모여 출범한 ‘백년가게 수호 국민운동본부(백년가게본부)’는 서울 을지로동 주민센터에서 민주평화당과 ‘백년가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정책 협약을 맺었다. 백년가게 특별법은 100년 이상 오래된 가게들을 보존하는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는 일본 등 해외 사례처럼, 한국도 이런 노력을 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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