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CPTPP 각료회의에서 각국 참가자들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에서 네 번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EPA 연합
지난달 19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CPTPP 각료회의에서 각국 참가자들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에서 네 번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EPA 연합

미·중 무역전쟁에 위기감을 느낀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이 다자간 무역협정으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지난해 말 발효된 포괄적·잠정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출범을 주도했고,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인 일·EU 경제연대협정(EPA)도 체결(2월 1일 발효)하는 등 자유무역 수호의 선봉을 자처하고 있다.

CPTPP는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2.9%, 교역량의 14.9%를 차지하는 거대 자유무역 경제권이다. 총 11개 회원국 중 호주·캐나다·일본·멕시코·싱가포르·베트남 등 7개국은 비준을 마쳤고, 브루나이·칠레·말레이시아·페루 등 나머지 4개국도 머지않아 동참할 전망이다. CPTPP는 6개국 이상이 비준을 완료하면 2개월 뒤 발효하기로 한 규정에 따라 지난해 12월 30일 발효됐다.

동남아와 EU 시장에서 일본과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나라 입장에선 반갑지 않은 변화일 수 있다. 가뜩이나 ‘일본의 텃밭’ 인식이 강한 동남아에서 일본의 시장 지배력이 더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8월 동남아·인도와 협력 확대를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를 출범했지만, 최대 쟁점 중 하나인 CPTPP 가입에 대한 입장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1월 29일에는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고 있던 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대기업 고위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찬 강연에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라고 말하지 말고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국가를 가보면 ‘해피 조선’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가 논란이 커지자 이튿날 사퇴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 중 하나인 자동차의 아세안 시장 점유율을 보면 ‘일본의 텃밭’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 2017년 아세안 시장에서 팔린 자동차 중 일본 브랜드 점유율은 79%였지만, 한국 브랜드 점유율은 4.3%에 불과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일본 차 점유율은 97%로 독점이나 다름없다.

일본의 대(對)아세안 직접투자(FDI) 규모는 2016년 한 해 140억달러(약 15조6000억원)에 달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는 58억9000만달러를 투자해 일본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또 일본 인적자원개발센터가 2015년부터 지금까지 교육한 아세안 지역 인재는 총 1만7000명을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CPTPP 출범으로 일본과 아세안 국가 간 협력이 강화되면서 우리 기업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 있다. ‘박항서 열풍’과 한류 콘텐츠의 인기 등 호재를 등에 업고 선전 중인 베트남 시장의 상황도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다.

베트남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우리나라의 대베트남 수출은 연평균 19.5%, 수입은 24.7%씩 늘었다. 베트남에는 삼성, 현대차, SK 등 우리 기업 2700여 개가 진출해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현지 고용 규모만 11만명에 이르며, 현지 공장을 통해 베트남 전체 수출의 약 25%를 담당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시장 점유율이 0.2%에 불과한 현대차도 베트남에서는 20%의 점유율로 도요타에 이은 2위다.

하지만 일본이 최근 몇 년간 베트남 FDI를 늘리면서 상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일본은 2017년에 77억5000만달러를 투자해 연간 FDI 규모에서 우리나라를 제치고 최대 투자국이 됐다. 전체 누적 FDI에서 일본은 13.2%로 아직 우리나라(16.2%)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지난해 상반기에도 전체 투자액의 31.8%에 달하는 64억7000만달러를 투자(우리나라는 5억600만달러)해 빠른 속도로 격차를 좁히고 있다 .

제프리 쇼트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선임연구위원은 지난달 29일 세계경제연구원이 주최한 조찬 강연에서 “한국이 CPTPP에 가입할 경우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과 협상에서 힘이 세질 것”이라며 CPTPP 가입을 권했다.


대일 무역적자 2년 새 9조원 가까이 증가

우리나라가 CPTPP 가입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에 대한 두려움이다. CPTPP에 가입하면 일본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는 효과가 있다. 일본은 자동차, 철강, 반도체, 정밀기기, 농수산물 등 여러 부문에서 우리나라에 경쟁우위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일 무역적자는 2015년 203억달러에서 2017년 283억달러로 불었다.

신규 가입 시 요구되는 높은 개방 수준도 부담스럽다. 기존 11개국은 얼마 전 각료회의에서 새롭게 가입하는 나라에 대한 환영 입장을 밝히면서도 ‘최고 수준’의 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제시해 문턱을 높였다. CPTPP가 자유로운 데이터 이동과 서버 현지화 금지를 명시하고 있는 만큼 국내 정보보호법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미·중 무역전쟁이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미·중 두 나라에 대한 교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 입장에서는 교역 채널 다변화 외에 뚜렷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이를 위해 개별적인 접근도 필요하겠지만, 기왕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FTA를 맺은 나라와의 교역에서 우리나라의 흑자 기조가 두드러지는 것도 힘이 되는 대목이다. 1월 31일 관세청이 공개한 ‘FTA 활용 지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FTA 발효국과 교역은 수출 4386억달러, 수입 3346억달러로 전년 대비 교역 규모가 7.8% 증가하면서 1040억달러 흑자를 달성했다. 반면 비(非)발효국과의 무역수지는 지난해 339억달러의 적자를 기록, 전년 188억달러 대비 폭이 커졌다.

CPTPP 규모는 앞으로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미·중 무역전쟁 장기화 여파로 교역 채널 다변화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국가가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를 걱정해야 하는 영국과 2억6000만 인구로 전체 아세안 시장의 40%를 차지하는 인도네시아, 지나치게 높은 대중국 경제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당면 과제인 대만 등도 CPTPP 가입을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CPTPP에는 역내 관세 철폐에 더해 전자상거래 분야에서 역내 데이터 거래를 촉진하고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관세 부과를 금지하는 등의 내용도 포함됐다. 또 고급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 보장 등 역내 국가 간 인적 교류 촉진을 위한 내용도 담겼다.


Plus Point

CPTPP 능가하는 RCEP…타결 가능성은 작아

그동안 우리나라는 중국과 아세안 10개국이 주도하는 RCEP에 큰 기대를 걸어왔다. RCEP는 아세안 10개국과 중국‧일본‧인도‧한국‧호주‧뉴질랜드 등 총 16개국이 협상을 진행 중이다. 규모만 놓고 보면 RCEP는 CPTPP를 능가한다. 47억6000만명에 달하는 역내 인구에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5%나 된다.

참여국들은 올해 가을로 예정된 정상회의까지 최종 타결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쉽지 않을 전망이다. CPTPP와 달리 RCEP는 책임지고 이끄는 주도국이 없다. 다자 무역협상을 주도하려면 주도국이 일정 부분 손해를 감내해야 하는데 그런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초기에는 중국이 주도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중국이 미·중 무역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다, 중국 시장이 폐쇄적이어서 FTA를 주도하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참여국 간 경제력의 차이가 큰 것도 협상 타결의 장애물이다. 이런 이유로 RCEP가 합의되더라도 CPTPP보다는 훨씬 낮은 수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