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아시아 순방은 사우디의 외교 접촉면을 다변화하고 이를 과시하는 모습으로 해석됐다. 빈 살만 왕세자는 작년 10월 반정부 언론인 카슈끄지 살해의 배후로 지목돼 미국, 영국 등 서구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사진 연합 EPA
이번 아시아 순방은 사우디의 외교 접촉면을 다변화하고 이를 과시하는 모습으로 해석됐다. 빈 살만 왕세자는 작년 10월 반정부 언론인 카슈끄지 살해의 배후로 지목돼 미국, 영국 등 서구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사진 연합 EPA

‘중국과의 하이테크 협력 관계 강화’ ‘인도에 2년 안에 1000억달러 이상 투자 기회 기대’ ‘파키스탄 석유화학단지 건설 프로젝트 200억달러, 차관 60억달러 제공’.

일주일간 아시아를 순방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순방지에 안긴 선물 보따리다. 빈 살만 왕세자는 2월 17일 파키스탄을 시작으로 인도, 중국을 차례로 방문했다. 지난해 10월 자말 카슈크지 사태로 미국, 유럽 등 서방국으로부터 비난받았던 빈 살만 왕세자가 아시아 지역에 경제 협력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34세의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의 왕위 계승 1순위 인물로 지난 2년간 노쇠한 아버지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을 대신해 국정을 총괄하고 있다. 형제·연장자 승계 원칙을 깨고 사촌형을 축출해 2017년 왕세자 자리에 오른 빈 살만은 사우디 실세로 군림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란 별명으로도 불린다.

그런 빈 살만의 이번 아시아 순방은 대내외적인 배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전통적으로 사우디는 미국·유럽 등 서구 선진국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중동 최대 자원 부국이자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주축인 사우디가 석유를 이들 나라에 팔고, 이들로부터 다시 무기를 수입해오는 전략적 동맹이 양국 관계를 지탱해왔다.

이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셰일오일·가스 유전이 발견되면서부터다. ‘셰일 혁명’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미국은 단숨에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됐고, 미국 입장에서는 사우디의 지정학적 중요도가 하락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카슈끄지 사태다. 사우디 반정부 언론인을 무참하게 살해한 배후로 빈 살만 왕세자가 지목되면서 인권에 민감한 서구 우방국과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송상현 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는 “미국과 동맹으로 안정기를 누려온 사우디 입장에서 위기감이 커졌을 것”이라며 “아시아 지역과 관계를 통해 관계 다각화를 꾀하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서상현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곤경에 몰린 빈 살만 왕세자가 탈출구로 아시아로 발길을 돌린 것으로 해석된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를 움직인 가장 큰 동력은 경제적 요인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비전 2030’으로 대표되는 의욕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2016년부터 펼치고 있다. 2020년까지 석유 의존에서 탈피하고, 2030년까지 GDP에서 민간 비중을 65%로 하는 것이 골자다. 이를 위해 ‘비키니 리조트’로 불리는 무비자 관광특구, 5000억달러 규모의 미래 신도시 ‘네옴’ 프로젝트 등을 통해 민간 경제 활동 참여와 관광·엔터·제조업 육성을 추진한다.

여기엔 젊은층 실업률을 끌어올려 지지 기반을 다지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2011년 아랍권에 불었던 ‘아랍의 봄’이 높은 청년층 실업률 때문이었다는 점이 빈 살만 왕세자의 경제 개혁 개방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우디 인구의 70%에 달하는 청년층 실업률은 30%에 달한다.

하지만 비전 2030 성적표는 아직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작년 사우디로 유입된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10억달러(약 1조1200억원)에 그쳤다. 정책이 시작된 2년 전 75억달러에서 확 쪼그라들었다. 여기엔 호전적인 빈 살만의 리더십 리스크가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빈 살만은 지난해 자국 인권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트위터를 남긴 캐나다 총리에 대응해 캐나다 내 사우디 재산을 전량 회수하고 체류 교민의 전원 귀국을 명령하기도 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사진 블룸버그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사진 블룸버그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착하는 사우디

중동 전문가들은 이번 아시아 순방국들도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경제적인 부분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내수 경기 둔화에 따른 신규 시장 진출이 필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과거 “비전 2030과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에 유사한 부분이 많다”면서 양국 간 경제 협력 관계 강화를 다짐했다.

실제로 중국과 사우디 관계는 단순 원유 수출입국에서 기술, 전자상거래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의 협력 관계로 진화하고 있다. 지난달 화웨이는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 처음으로 사무실을 열었고, 중동판 알리바바를 꿈꾸는 전자상거래 회사 졸리시크도 사우디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해 있다.

IT 분야에서도 우의를 다지고 있다. 2017년 양국은 사우디에 드론 제조 공장을 열기로 합의했고, 2018년 사우디는 중국과 협력해 관측용 위성 2기를 쏘아 올리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카슈끄지 사태로 구글, 애플, 아마존, 버진 등과 IT 협력 관계가 무산된 사우디가 중국을 통해 기술 분야로 진출을 꿈꾸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재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팀장은 “중국은 철저히 경제적으로만 중동 시장에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도 사우디 민간·정부와 합동으로 경제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미국·중국·프랑스 등과 함께 사우디 원전의 유력 수주 후보로 꼽히고 있다. 이에 앞선 2017년 사우디는 일본, 한국과 각각 ‘장관급 비전 2030 협력 플랫폼’을 만들었다. 에너지 제조, 스마트 인프라, 디지털 역량 강화, 보건 생명과학, 중소기업 등 5대 분야 40개 사업을 추진키로 한 것이다. 사우디 현지 무기 생산, 기술 이전을 추진하고 IT 기반 교통관제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의 사업이 포함됐다.

하지만 이렇게 사우디와 한국이 끈끈한 경제 협력을 다짐한 지 2년이 흘렀지만, 빈 살만 왕세자가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다. 사우디 국왕의 방한은 1962년 양국 수교 이후 아직 한 번도, 왕세자 방한은 1998년 압둘라 왕세제 이후 없었다.

한 관계자는 애초 이번 아시아 순방에 한국도 포함됐지만, 일정상 미뤄졌다고 말했다. 작년 말 울산의 한 정유 시설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이 역시 무산된 바 있다. 또 다른 중동 지역 전문가는 “중동 지역에서 그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빈 살만의 방한이 경제 협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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