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 오후 7시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 사람이 많지 않다. 사진 최상현 기자
11월 12일 오후 7시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 사람이 많지 않다. 사진 최상현 기자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10년 전에는 ‘리어카 끌고 다니면서 떡볶이·오뎅만 팔아도 월 500만원은 거뜬하다’고 할 정도로 고시생이 바글거렸어요.”

서울 관악구 대학동으로 들어서는 버스정류장의 이름은 여전히 ‘고시촌입구’다. 1963년부터 시행된 사법고시 55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국에서 몰려든 ‘고시생’으로 호황을 누렸던 대학동은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가 도입되면서 점차 쇠락했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고시식당과 서점, 제본소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고시생이 떠난 대학동 고시원·원룸 건물 앞에 저마다 ‘빈방 있음’ 전단이 나붙었던 것도 잠시, 새로운 사람이 차츰 들어와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대학동 특유의 ‘값싼 월세’와 ‘낮은 물가’에 이끌린 이들은, 대부분 행정고시·공무원·전문자격증 시험 등을 준비하는 또 다른 수험생이거나 월급 통장이 넉넉지 못한 새내기 직장인이다.


고시촌 찾아든 각양각색 수험생

사법고시 폐지에 직격탄을 맞은 것은 학원가였다. 수험생 규모가 수십만에 달하는 ‘공무원 시험’ 시장이 대표적인 대체재로 꼽혔지만, 이미 노량진 학원가가 확고히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 대학동 학원가가 선택한 것은 다변화 전략이었다. 헌법이나 형법, 민법 등 법학 과목에 대한 오랜 노하우를 바탕으로, 법 관련 과목의 비중이 큰 행정고시·외무고시(현재는 외교관 후보자 선발시험)와 같은 고등고시나 공인노무사·관세사·법무사 등 전문자격증 시험, 경찰간부·순경 시험 등으로 종목을 변경했다.

특히 전문자격증 시험은 응시인원이 적다 보니 지방에는 관련 학원이 많지 않아 수험생이 대학동으로 몰리고 있다. 청주에서 올라온 노무사 준비생 류호영(26)씨는 “2차 시험 방식이 서술형이어서 아무래도 인터넷 강의로 혼자 공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며 “수험생끼리 스터디를 꾸리거나 강사에게 직접 물어볼 기회가 많은 대학동에서 공부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고 했다.

서울 다른 지역과 비교해 방값이 싸고, 물가가 저렴하다는 것도 수험생들이 대학동으로 모이는 이유다. 대학동 고시원 월세는 20만~30만원 정도다. 월세 40만원 정도면 꽤 그럴듯한 원룸을 구할 수 있다. 매일 메뉴가 바뀌는 고시식당은 식권을 구입하면 4000원 내외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수험생의 부담을 덜어준다. 스타벅스와 같은 고가 프랜차이즈 카페가 적은 대신 아메리카노 한 잔에 900원인 ‘가성비 카페’가 많고, 심지어 10분에 990원을 내고 이용하는 헬스클럽도 있다.

최근에는 노량진 공시생(공무원시험 준비생)도 대학동으로 몰리고 있다. 공시생 호황을 누려온 노량진의 방값이 고시원도 40만원에 달할 정도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1·9호선 역세권인 노량진에 비해 대학동은 교통이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활동 범위가 좁은 수험생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학동 학원가에서도 7·9급 공무원 시험 강좌를 늘리고 있다. 대학동 A법학원 관계자는 “사법고시 중심 학원에서 여러 시험을 다루는 종합 학원으로 전환하며 처음에는 어려움도 있었고, ‘다 합쳐도 사법고시만 못하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점차 안정되는 추세”라며 “공시생 수요에 더해, 변호사 시험 합격률이 낮아지며 로스쿨 학생도 대학동을 많이 찾고 있다”고 했다.


11월 12일 오후 7시,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에 있는 한 고시식당. 사진 최상현 기자
11월 12일 오후 7시,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에 있는 한 고시식당. 사진 최상현 기자

사회 첫발 내딛는 직장인에게 매력적

대학동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직장인이나 지방에서 갓 상경한 이들에게도 매력적이다. 부동산정보 플랫폼 다방에 따르면, 2018년 4월부터 2019년 4월까지 서울 원룸 월세 평균은 보증금 1000만원 기준 51만원이다. 반면 사법고시 폐지로 공실률 문제가 불거진 대학동은 기본적으로 주거비가 저렴하고, 가격에 따라 고시원부터 원룸 전세까지 선택지가 많다.

대학동에서 부동산 중개사무소를 운영하는 이춘봉 소장은 “7㎡ 남짓한, 소위 잠만 자는 고시원 방은 월세가 20만원 정도이고 풀옵션 원룸도 보증금 1000만원에 월 40만원 정도면 구할 수 있다”며 “싼 방이 많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요즘 찾아오는 손님 중 수험생과 직장인 비율이 6 대 4 정도 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수험이 아닌 주거 목적으로 대학동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다 보니 독서실 내부를 리모델링해 원룸으로 바꾸는 건물주도 늘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남 한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박모(28)씨는 “처음 서울에 올라와 강남에서 방을 구하려 했는데, 월세가 60만원부터 시작해서 기겁을 했다”며 “월급의 3분의 1이 주거비로 나가는 셈이라, 조금 멀긴 하지만 2호선 신림역으로 통근할 수 있는 대학동으로 오게 됐다”고 했다.

지난해 말 결혼한 정모(32)씨는 “아이가 있어 어느 정도 넓은 집을 구해야 했는데 모아둔 돈에 대출까지 받아도 적당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며 “이곳저곳 알아보던 차에 대학동에서 전세 8000만원 투룸을 발견하고 냉큼 입주했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은 모두 “치안이나 생활환경 면에서 솔직히 만족스러운 동네는 아니다”며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할 것 같다”고 했다.


빈방 찼지만 상권 회복은 어려워

대학동의 빈방이 줄고 주거 인구가 늘어나는 것과는 별개로, 대학동 상권의 전망은 여전히 어둡다. 저렴한 월세에 이끌려 유입된 수험생과 새내기 직장인 특성상 소비력이 높지 않다. 강남·서초·구로디지털단지 등으로 통근하는 직장인이 많아 베드타운화되는 경향도 보인다. 직장 근처 번화가에서 주된 소비가 이뤄지다 보니, 대학동에서는 지갑을 좀처럼 열지 않는 것이다.

기존 물가가 너무 낮게 형성돼 있다는 점도 상권 발전을 가로막는다. 대학동 B고시식당 사장은 “고시촌 상권은 기본적으로 박리다매(薄利多賣)인데, ‘다매’는 사라지고 ‘박리’만 남았다”며 “원가 상승을 틀어막아 낮은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만 살아남는 동네가 되다 보니, 새로 들어오려는 가게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인근 서울대입구역에서 ‘샤로수길’이라는 강력한 경쟁 상권이 부상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샤로수길은 하루 유동인구가 10만 명이 넘는 소위 ‘핫한 상권’이다. 다양한 국적의 음식점과 독특한 콘셉트의 가게가 모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인증샷 문화’를 즐기는 20~30대의 취향을 저격했다.

서원석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사법고시 폐지 직후보단 상황이 나아졌지만,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대학동이 주거비가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활력을 찾기는 어렵다”며 “불편한 교통과 낮은 소비력, 외부 상권 성장 등을 극복하려면 결국 사법고시를 대체할 시험이 나오거나 외부적 호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최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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