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세계무역기구(WTO) 특별 일반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7월 11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사진 연합뉴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세계무역기구(WTO) 특별 일반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7월 11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사진 연합뉴스

세계무역기구(WTO)는 첫 여성 수장을 임명할 수 있을까. 그 자리를 향한 한국의 세 번째 도전은 어떤 결론을 맺을까. 새 WTO 리더는 훼손된 다자주의(多者主義·multilateralism)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호베르투 아제베두 현 WTO 사무총장의 갑작스러운 사임 발표로 시작된 후임 사무총장 선거 레이스가 본격화했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비롯한 8명의 후보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전 세계의 찬사를 받는 한국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시스템이 유 본부장에게 얼마나 큰 힘을 실어줄지 관심이 쏠린다. 화려한 경력의 나이지리아 후보가 유 본부장의 강력한 라이벌로 꼽힌다.

WTO는 7월 15일(현지시각)부터 3일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차기 사무총장 임명을 위한 특별 일반이사회를 비공개로 열었다. WTO 회원국의 제네바 주재 대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 이번 이사회에서 유 본부장은 8명의 후보자 중 다른 2명과 함께 16일 정견 발표에 나섰다. 약 15분간의 발표 이후에는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정견 발표를 시작으로 후보자들은 9월 7일까지 치열한 선거운동을 펼치게 된다. 2013년부터 WTO를 이끌어온 현 아제베두 사무총장은 개인적인 사유로 8월 31일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다.

선거운동 기간이 끝나면 WTO는 164개 회원국 간 협의를 거쳐 지지도가 낮은 후보부터 차례로 탈락시킨다. 이 과정을 후보 한 명만 남을 때까지 반복한다. 최종 선출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제베두 사무총장이 당선됐을 때를 토대로 추측해보면, 연말쯤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도 이번과 비슷하게 9명의 후보가 도전장을 제출(2012년 12월 31일 마감)했고, 넉 달 반이 흐른 2013년 5월 14일 WTO 일반이사회가 아제베두 사무총장의 취임을 공식 수락했다. 구체적인 선출 방식·일정은 데이비드 워커 WTO 일반이사회 의장과 회원국이 논의해 정할 방침이다.

한국 후보자인 유 본부장은 서울대에서 영어영문학(학사)과 정책학(석사)을 공부하고 미국 밴더빌트대 로스쿨을 나왔다. 행정고시(35회)를 거쳐 외교통상부 자유무역협정 정책과장,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사무국 파견 참사관, 산업통상자원부 자유무역협정 교섭관 등을 역임했다. 25년간 통상 분야 전문가로 일해온 점이 유 본부장의 강점으로 꼽힌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 한국이 보여준 민첩하고 체계적인 대응 체계가 전 세계의 신뢰를 산 점도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유 본부장도 자신감을 내비쳤다. 앞서 한국은 김철수 전 상공자원부 장관과 박태호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WTO 사무총장직에 도전했으나 아쉽게 탈락한 바 있다.

걸림돌은 국제 무대에서 입김이 센 일본이다. 후보를 아예 내지 않은 일본은 유 본부장의 도전 소식에 언론을 통해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지난해 한국을 겨냥한 수출 규제 조치로 양국이 갈등을 겪고 있는데 유 본부장이 WTO 사무총장 자리에 오르면, 일본으로선 유리할 게 없어서다. 일본 경제신문인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은 “유 후보가 당선되면 일본에 골칫거리(厄介)가 될 수 있다”고 했고, 산케이신문은 소식통을 인용해 “각료 경험 없는 유 후보는 존재감이 약하다”고 깎아내렸다. 이에 대해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일본의 국제적 위상과 수준을 고려할 때 스스로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안 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나이지리아 전 재무장관 주목

유 본부장과 경쟁을 펼칠 후보자는 7명이다. 국가별로 보면 한국을 비롯해 나이지리아·몰도바·멕시코·사우디아라비아·영국·이집트·케냐 등 8개국에서 후보를 냈다. 모두 쟁쟁한 경력과 능력을 갖췄지만 이 중에서도 특히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이사회 의장이 유력 후보로,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오콘조-이웰라 이사장은 일단 이력이 화려하다. 22세에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27세에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저개발국 지역 금융과 신용 정책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세계은행에서 25년간 근무하며 부총재까지 역임했다. 나이지리아 재무장관으로도 두 차례 일했다. 경력만 풍부한 게 아니고 성과도 뛰어났다. 나이지리아 재무장관 재임 시절 추진한 여성 경제력 강화 정책과 청년 창업 지원책이 세계은행으로부터 “가장 효과적인 프로그램”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간 아프리카 출신 WTO 사무총장이 없었다는 점도 오콘조-이웰라 이사장을 주목하게 하는 요인이다. WTO는 1995년 창설된 후 총 6명(연임 포함)의 사무총장을 선임했다. 유럽 출신이 3명으로 가장 많았고, 오세아니아·아시아·남미가 각각 1명씩 배출했다. 다만 같은 아프리카 대륙인 이집트와 케냐에서도 이번에 후보자를 냈다는 점은 오콘조-이웰라 이사장의 표를 분산시킬 수 있는 요소다. 이집트 후보인 하미드 맘두 변호사는 WTO에서 20여 년간 일한 전문가다. WTO의 전신인 가트(GATT) 체제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케냐 후보인 아미나 모하메드 전 WTO 총회 의장은 오콘조-이웰라 이사장과 같은 여성인 데다 제네바에서 인지도가 높아 복병으로 꼽힌다.


WTO 정상화가 숙제

올해 연말쯤 결정될 차기 WTO 사무총장의 어깨는 어느 때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다. 현재 WTO 상황은 그야말로 ‘쑥대밭’ 수준이다. 미국과 중국은 수년째 무역 분쟁을 벌이고 있고, 영국도 유럽연합(EU)과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둘러싼 갈등을 지속 중이다. 아제베두 사무총장이 임기를 1년이나 남기고 돌연 사임 의사를 밝힌 것도 이런 여러 가지 문제에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미국은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이 WTO로부터 개발도상국 대접을 받으면서 많은 혜택을 누린다고 비판해왔다. 다자주의 대신 자국 우선주의를 택한 트럼프 행정부의 견제로 WTO의 분쟁 해결 기능은 지난해 말부터 마비된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제베두 사무총장의 조기 사임 소식을 들었을 때도 얼굴을 찡그리며 “WTO는 끔찍하다(horrible). 우리는 몹시 나쁜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전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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