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 서울 상암동 팬엔터테인먼트 사옥 1층에 다양한 드라마 포스터가 전시돼 있다. 사진 최상현 기자
10월 22일 서울 상암동 팬엔터테인먼트 사옥 1층에 다양한 드라마 포스터가 전시돼 있다. 사진 최상현 기자

한소희와 남편의 불륜을 알아챈 김희애가 박해준의 가슴에 가위를 박아넣는 순간, 버스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베트남 여성이 “!(미친 드라마!)”라며 입을 쩍 벌린다. 총구를 겨눈 남북 군인들 사이에서 현빈과 손예진이 애틋하게 포옹하자, 일본 도쿄의 한 가정집에서는 “美しい(아름다워)”라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Over The Top) 순위 차트를 제공하는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9월 한국 드라마 ‘부부의 세계’와 ‘사랑의 불시착’은 각각 베트남과 일본 넷플릭스에서 TV쇼 부문 랭킹 1위를 차지했다. 베트남과 일본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홍콩·태국·필리핀 등 대다수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넷플릭스 인기 순위 TOP 10의 절반 이상을 한국 드라마가 휩쓸고 있다.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려는 글로벌 OTT라면 한국 드라마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킬러 콘텐츠’다. 이 때문에 한국 드라마 제작사의 위상도 달라졌다. 방송사에 종속된 ‘외주 제작사’의 한계를 넘어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주도적으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황금알 낳는 거위’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현지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유럽 등의 OTT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46억 명의 인구를 보유한 아시아 시장으로 글로벌 OTT 경쟁 무대가 옮겨지고 있다”며 “구독자 유치를 위해 한국 드라마 쟁탈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드라마 제작사의 역사

‘드라마 제작사’라는 시장이 탄생한 것은 1991년 정부가 ‘외주 제작 의무 편성’ 제도를 시행하면서부터다. 이전까지는 방송사에서 모든 드라마를 자체적으로 제작해 방영하는 구조였다. 따라서 ‘외주 제작’은 어감 그대로 편성권과 투자 자본을 틀어쥔 방송사의 간택을 받아 드라마를 제작하는 종속적인 사업에 그쳤다. 수익은 제작비의 10% 내외 이상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판권은 대부분 방송사에 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2002년 팬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욘사마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드라마 제작사는 판권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됐다. 제작비 30억원이 투입된 ‘겨울연가’는 국내에서 76억원을, 해외 판매로 290억원을 벌어들였다. 일본 방송국에서 지불한 드라마 방영료뿐만 아니라 DVD·소설·기념품·공연·애니메이션 등 ‘원소스멀티유즈’로 인한 부가 수익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하지만 시장이 확대된 만큼 드라마 제작사가 져야 할 위험 부담도 커졌다. 해외 판권 선판매를 위해 캐스팅이 필수인 소위 ‘한류 스타’의 몸값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 제작사는 방송사에서 제작비의 70~90% 정도만을 보전받고 나머지는 간접광고(PPL) 등으로 알아서 메꾸는 구조였는데, 제작사가 판권을 요구하는 경우 제작비 보전 비율이 50%까지 떨어졌다. 일례로 2007년 ‘태왕사신기’의 경우 제작사가 대부분의 권리를 가져갔지만, 결국 제작비 430억원의 손익분기점을 맞추지 못해 배우 출연료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다.

OTT 서비스라는 또 다른 판로가 열린 것은 2013년부터다. ‘상속자들’과 ‘별에서 온 그대’의 판권을 회당 각각 3만달러(약 3400만원)와 4만달러(약 4500만원)에 구매한 중국 OTT인 유쿠와 아이치이는 수백 배의 수익을 올렸다. 특히 아이치이는 ‘별에서 온 그대’ 방영 덕분에 후발 주자라는 불리함을 극복하고 중국 1위 OTT 사업자로 성장했다. 이후 2014년 ‘괜찮아 사랑이야(12만달러)’, 2015년 ‘프로듀사(20만달러)’ ‘보보경심: 려(40만달러)’ 등 한국 드라마 회당 판권 가격이 상승했다.

2016년 한국 시장에 진출한 넷플릭스는 드라마 제작사에 ‘오리지널 콘텐츠’라는 새로운 수익 모델을 제시했다. 방송사 방영을 포기하는 대신, 제작비 전액에 더해 10~20%의 안전 마진을 보장한 것이다. 오리지널 콘텐츠가 아니어도 방송사 편성 매출에 넷플릭스 선판매 매출을 더한 것만으로도 제작비 이상을 건질 수 있게 됐다. 넷플릭스를 통해 글로벌 레퍼런스를 확보하며 사업 규모를 안정적으로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전성기

한국 드라마 제작사의 가치 상승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넷플릭스뿐만 아니라 디즈니 플러스, 애플 TV 등 글로벌 OTT가 아시아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이들에 대항하는 국가별 OTT까지 어우러져 ‘콘텐츠 확보 전쟁’이 심화할 전망이다. 말레이시아 기반의 OTT인 아이플릭스(iflix)나 홍콩의 뷰(viu) 등은 대부분 한국 드라마를 동력으로 성장해 온 회사다. 결국 킬러 콘텐츠는 한국 드라마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고, 나아가 경쟁사와 차별화할 수 있는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혹은 독점 계약이 절실하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2016년 이후 지속된 한한령(限韩令)이 해제될 경우 ‘큰손 고객’인 유쿠, 아이치이, 텐센트 비디오 등 중국 OTT로부터 막대한 판권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아이치이는 올해 상반기 ‘편의점 샛별이’와 ‘저녁 같이 드실래요’ 판권을 구매한 데 이어, 최근에는 2021년 방영 예정인 ‘지리산’의 판권도 구매했다. 한화투자증권은 아이치이가 중국과 한국을 제외한 ‘지리산’ 해외 판권을 200억원 후반대에 구매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참신한 소재와 높은 퀄리티, 자유로운 표현 등이 장점인 한국 드라마는 다양한 아시아 문화권에서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라며 “그에 반해 중국 드라마는 민족주의 프로파간다 성향이 강해 중국 밖에서는 소비되기 어렵고, 일본의 경우 드라마보다는 애니메이션 산업이 주력이라 경쟁력이 떨어진다”라고 분석했다.


시총 2조 넘긴 스튜디오 드래곤…신세계·카카오도 참여

가장 주목받는 드라마 제작사인 스튜디오 드래곤은 2016년 CJ E&M에서 분사한 후 시가 총액 2조3000억원(10월 28일 기준)을 기록하고 있다. 모회사인 CJ E&M의 시가 총액인 3조800억원에 비해 크게 뒤처지지 않는 수치다. 넷플릭스를 통해 ‘사랑의 불시착’뿐만 아니라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사이코지만 괜찮아’ 등의 드라마를 연이어 글로벌 히트시킨 덕분이다. ‘부부의 세계’ 제작사인 제이콘텐트리의 시가 총액 또한 4129억원에 달한다. 이 두 회사가 넷플릭스와 맺은 콘텐츠 공급 계약 기한은 2022년까지다.

중소 드라마 제작사들의 약진도 돋보인다. 팬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한 ‘청춘 기록’은 지난 9월 전 세계 넷플릭스 구독자들이 10번째로 많이 시청한 드라마다. 앞서 언급한 ‘지리산’ 제작사인 에이스토리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으로 좀비 블록버스터 사극이라는 신(新)장르를 개척하며 글로벌 레퍼런스를 확보했다. 도레미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한 ‘사생활’도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대기업도 드라마 제작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신세계 계열사인 마인드마크는 지난 6월 드라마 제작사 ‘실크우드’를 인수한 데 이어 9월에는 ‘스튜디오329’ 지분 55.13%를 45억원에 사들였다. 스튜디오329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인간수업’의 제작사다. 드라마 제작사 세 곳을 인수한 카카오M은 내년 1월부터 공모전을 개최해 오리지널 드라마 스토리를 발굴할 계획을 밝혔다.

최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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