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B 메모리 최초 개발자인 도브 모란 이스라엘 그로브벤처스 회장. 사진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USB 메모리 최초 개발자인 도브 모란 이스라엘 그로브벤처스 회장. 사진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스타트업 천국’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에서도 ‘스타트업 대부’로 불리는 이가 있다. 1989년 M시스템스를 창업한 뒤, USB(이동식 저장장치)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도브 모란(Dov Moran)이 주인공이다. 그는 당시 불모지였던 플래시 메모리(비휘발성 저장장치) 시장에 뛰어들어 USB 외에도 다양한 혁신 제품을 세상에 내놨다. 이 덕에 M시스템스는 18년 만에 매출 1조원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했고, 이를 눈여겨본 미국 플래시 메모리 회사 샌디스크가 2006년 회사를 16억달러(약 1조8560억원)에 인수했다.

그는 회사 매각 이후 다시 모듈형(조립식) 휴대전화 업체인 ‘모두(Modu)’라는 회사를 창업한다. 이 회사의 특허가 구글의 모듈형 스마트폰 ‘아라’의 밑바탕이 됐다. 모란은 동시에 반도체·집적회로 개발 업체였던 타워반도체(Tower Semiconductor), 혁신 의약품을 개발하는 바이오마스(Biomas)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연쇄 창업을 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특허권만 40개에 달한다. 모란은 2015년 벤처캐피털(VC) ‘그로브벤처스’를 세워 반도체, 클라우드, 인공지능(AI) 같은 전문 기술력을 보유한 딥테크(deep-tech) 스타트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창업을 통해 배웠던 경험담, 노하우, 네트워크 등을 적극 공유하고 있다.

국내 최대 스타트업 행사인 ‘넥스트라이즈 2021’에 참석하기 위해 사흘간의 짧은 일정으로 방한(訪韓)한 모란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만났다. 50번도 넘게 방한한 모란이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한국을 찾은 건 1년 반 만이라고 했다.

모란은 “성공한 스타트업·기업가도 성취를 얻는 데까지 수도 없이 실패를 거듭한다”며 “스타트업의 성공 스토리만 읽지 마라”고 했다. 그 안에서의 실패, 이를 극복해낸 맥락을 읽어내라는 취지였다. 한국에서 스타트업이 늘고, 인재들이 창업에 뛰어드는 변화에 대해서는 “실패에 대한 마음가짐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라고 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꽤 자주 한국을 찾는다
“30년쯤 전인가, 첫 회사에서 플래시 메모리를 만들 때다. (제품을 팔기 위해) 삼성전자를 처음으로 찾았다. 그때 이후로 한국에 정말 여러 번 왔다. 50번도 넘게 온 것 같다. M시스템스의 영업망이 한국에 있었고 삼성전자, LG전자와 긴밀하게 일했다. 이후 창업했던 ‘모두’라는 회사의 연구개발(R&D)센터를 한국에 뒀다. 여기에서 기계적인 디자인이 이뤄졌다. 수년에 걸쳐 SK하이닉스, 삼성전자와 일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그로브벤처스의 주요 출자자(LP)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매우 효율적이며 똑똑하고 무엇보다 열심히 일한다. 이스라엘인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스라엘은 ‘스타트업 천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에는 (모험적인) 사업가(기업가)가 정말 많다. 이스라엘인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유대인의 특성이라고 봐야 한다. 지난 2000년간 유대인은 항상 쫓겨났고 핍박받았다. 늘 떠돌아야 했다. 기업가 정신이 없으면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생존하기 어려웠다. 사방이 적으로도 둘러싸여 있었다. 혁신이 굉장히 필요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페이스북·구글 같은 대형 테크 회사들은 유대인이 차렸다. 이스라엘에는 이런 유대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돼 있다. 이를 통해 기업가들은 자신의 경험, 노하우를 공유하고,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젊은 인재들이 속속 스타트업에 뛰어들고 있다
“예전엔 한국에 스타트업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스타트업에 돈을 대는 VC 역시 많지 않았다. 당시 많은 창업가가 한국에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창업해서 망하면 빚만 생기고, ‘낙오자’란 딱지가 붙는다는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리스크(위험)를 감당해야 한다. 최근 한국에서는 실패에 대한 마음가짐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실패 가능성이 있더라도 일단 위험을 감수해보겠다는 창업가가 늘고 있다.”

연쇄 창업가이기도 하다. 실패도 여러 번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실패는 어느 단계에서든 수시로 경험할 수 있다. 실패는 무제한이다. 왜 실수했는지 이해하고, 이를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유니콘이 된 스타트업의 성공신화’ ‘성공한 기업가’의 스토리만 읽어선 안 된다. 이들도 성공하기까지 실망과 좌절, 어려움을 겪는다. 회사를 만들어 꾸려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먼 길인지 이해해야 하는 게 우선이다.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투자자를 만나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서라. 사업 계획과 사업 팀 등에 대해 인상적인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야 한다. 실탄이 있어야 더욱 큰 시장으로 나갈 수 있다.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많은 창업가가 이런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VC 관점에서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달라진 스타트업 업계 트렌드가 있을까
“코로나19를 통해 디지털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모든 것이 데이터다. 데이터는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수 요건이자, 모든 비즈니스의 핵심 요소다. 한 예로 데이터는 오랜 의료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같은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상황에서 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더 많은 사례 연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주일에 100명의 환자를 봤던 의사가 10년 뒤에는 1000명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 맞춤 치료법도 제시할 수 있다.”

딥테크에 주로 투자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어떤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지 소개해 달라
“‘윌리오트(Wiliot)’라는 소형 반도체 칩 개발 업체에 투자하고 있다. 이 회사는 2개의 프로세서(칩의 두뇌)를 가진 칩을 만든다. 칩에는 온도, 압력, 근접성 등 4개 센서가 있다. 칩은 아주 작다. 가로세로 각각 2㎜이고, 가격도 20센트(약 232원)가 채 안 된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배터리도, 전력도, 충전도 필요 없다는 점이다. 대신 칩은 와이파이 신호에서 에너지를 당겨 쓰는 방식으로 구동된다. 의약품부터 물류, 커머스(상거래)에 이르기까지 적용할 수 있는 분야도 무궁무진하다. 펩시가 고객이다. 아마존, 알리바바가 투자사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훌륭한 예라고 생각한다. ‘뉴로블레이드(Neuro Blade)’라는 회사에도 투자 중이다. 빅데이터를 다루는 컴퓨팅 환경을 위해 설계되는 칩을 만드는 회사다. 빅데이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중앙처리장치(CPU)와 메모리반도체 사이에는 병목현상(도로의 폭이 병목처럼 갑자기 좁아진 곳에서 일어나는 정체 현상)이 발생해 처리 속도가 크게 떨어질 수 있다. 뉴로블레이드는 메모리반도체 속에 로직반도체(논리적인 연산을 수행하는 반도체)를 넣었다. 이를 통해 한 번의 명령으로도 전체 데이터에 바로 접근할 수 있어 엔비디아의 칩보다도 빨리, 저렴하게 빅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