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순 교수와 로하나 로잔 아스트로 CEO가 대담하고 있다. <사진 :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홍대순 교수와 로하나 로잔 아스트로 CEO가 대담하고 있다. <사진 :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사람은 누구나 아침에 눈뜨자마자 ‘어제와 다르게 살아야지’하고 다짐하지 않습니다. ‘어제처럼 무사히, 별 일 없이 지나갔으면’하고 생각하죠. 하지만 지금은 변화의 시대입니다. 안주할 시간이 없어요. 끊임없이 스스로 재교육하고 더 민첩하게 움직이는 조직만이 살아남습니다.”

말레이시아 최대 미디어 기업 아스트로(Astro)의 로하나 로잔(Rohana Rozhan) 최고경영자(CEO)는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진 조직이 ‘혁신가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으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1995년 설립된 아스트로는 위성 TV채널 사업자로 출발해 라디오, 홈쇼핑, 영화 제작까지 하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다. 위성 채널수가 100개, 라디오 채널이 20개 이상일 정도로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올해 9월 기준 말레이시아 가구의 70%(500만가구)가 아스트로 채널을 시청하고 있다. 유료 TV시장 점유율은 96%에 이른다.

2011년부터 아스트로를 이끌어 온 로잔 CEO는 이 미디어 기업을 5년 연속 소비재 1위 기업에 올려 놓은 주역이다. 지난 10월 위클리비즈 10주년 포럼 연사로 참석한 로잔에게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는 조직 운영의 비결을 물었다. 인터뷰는 홍대순 이화여자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와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극심해 ‘싱귤래리티(Singularity·질적 도약이 생기는 특이점)’를 생각해야 하는 시대라고들 합니다. 미디어 산업도 마찬가지죠. 급변하는 환경에 대한 진단과 대응책이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매년 유행어 한 가지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라고 해서 특별할 게 없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거죠.”

아스트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무엇인가요.
“소비자가 가장 중요하지요. 소비자 개개인의 취향을 파악하는 데 주력합니다. 이 시대 시청자들은 거실에 모여 방송을 보지 않습니다. 각자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골라보지요. 우리가 공략하는 건 바로 그 점입니다. 700만가구가 아닌, 3000만명이 저마다 우리 앱을 내려받게 하는 것. 누구나 자신의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게 콘텐츠를 세분화하고 다양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콘텐츠마다 말레이시아 내의 모든 언어를 지원하도록 제작했어요. 그 결과가 수익에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보통 미디어 기업은 광고 수익 비중이 크기 마련인데, 우리는 구독료 수익이 전체의 90%를 차지합니다. 해외에 진출할 때도 시청자 중심으로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인도네시아를 예로 들면, 현지 콘텐츠 제작자들과 합작 콘텐츠를 만들어 최대한 현지인의 취향에 맞추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건 무엇인가요.
“콘텐츠, 상품, 서비스 등 시청자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아마존 같은 기업을 눈여겨보고 있어요. 아마존은 ‘디지털 온리(digital only)’로 출발했지만, 방대한 소비자망을 구축한 뒤에는 ‘무엇이든 파는’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됐죠. 아스트로의 목표도 비슷합니다. 아스트로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청자가 실제 물건을 소비할 수 있게 홈쇼핑 채널을 열고, 전자상거래 웹페이지와 배달 시스템을 구축했어요. 결국 아스트로 방송을 보는 시청자가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은 물론 실제 물건과 서비스까지 모두 이용할 수 있도록 해 하나의 생태계를 만든 겁니다. 다양한 협력과 제휴도 중요합니다. 아스트로가 모든 분야의 세계 최고가 될 순 없지만,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진 기업들과 협력하면 그 강점을 활용해 고객에게는 최상의 것을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 아스트로의 목표는 ‘미디어 업계의 우버’가 되는 겁니다. 모든 콘텐츠와 서비스, 상품을 연결하는 ‘엔드 투 엔드(end-to-end) 플랫폼’ 말이죠.”

아스트로가 자랑할 만한 강점을 꼽는다면요.
“다양성을 반영한 조직 구성입니다. 아스트로는 설립 초기부터 조직 자체가 소비자의 모습을 반영해야 한다고 굳게 믿어왔습니다. 말레이시아를 보면 다양한 인종, 종교, 언어를 가진 사람이 모여 살며 남녀 비율도 50 대 50 정도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스트로 조직 구성이 꼭 말레이시아와 비슷합니다. 50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는데 종교도, 인종도, 언어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고르게 섞여 있어요.”

조직의 중심이 되는 부서가 따로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아스트로 그룹 전체는 서로 다른 기업들을 끌고 가는 일종의 벤처캐피털 같다고 생각합니다. 조직 내의 젊은 혁신가들이 저마다 목표에 맞게 세분화된 작은 조직을 이끌고, 각각 독립적인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경영진은 각 조직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지원해주죠. 지금은 끊임없이 환경이 변화하기 때문에 더 빠르게 반응하고 더 민첩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행동은 둔해지죠. 빨리 움직이기 위해 스스로 더 쪼개고 혁신을 추진해나가는 겁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경영자는 충분히 다른 사람을 신뢰하며 권한을 나눠주고 위험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은 믿을 만한 좋은 사람을 고용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해도 안전한 환경으로 뒤받침해줘야 하죠.”

아스트로처럼 규모가 커지고도 ‘벤처 정신’을 유지하는 기업은 흔치 않습니다. 그 비결이 궁금합니다.
“중간 관리자 재교육에 많은 시간과 노력과 자금을 투자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조직 규모가 커지고 수직적이 될수록 기업은 모험을 꺼리고 안정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때 관리자들이 젊은 직원에게 ‘내가 너보다 훨씬 경험이 많으니까 내가 해온 대로 하면 된다’고 강요하기 시작하면, 조직은 혁신을 멈춥니다. 지금은 제품의 주기가 더 짧아지고 있기 때문에 ‘안정’을 추구할 시간이 없어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살아남습니다. 상대적으로 새로운 기술과 환경을 습득하기 힘겨워하는 중간 관리자들을 끊임없이 재교육해야만 조직 전체가 계속해서 젊게 유지됩니다. 그렇지만 중간 관리자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기를 마냥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하죠. 그래서 아스트로가 선택한 방식은 조직 내에 새로운 벤처 기업 같은 조직을 계속해서 만드는 겁니다. 각 조직에 권한을 위임해 저마다 목표에 따라 적합한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합니다. 30~35세 직원 몇명으로만 구성된 조직도 있고, 26~27세 직원끼리 모여 말레이시아 사상 최대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 로하나 로잔
영국 켄트대 경제학·회계학과, 말레이시아 에어라인시스템 사외이사, 아스트로 TV CEO, CNBC 선정 ‘올해의 아시아 경영인’

▒ 홍대순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 아서디리틀 코리아 부회장, 국토교통과학기술원 비상임이사


keyword

혁신가의 딜레마(innovator’s dilemma)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교수가 2007년 주창한 용어. 시장을 선도하는 기술을 가진 기업이 어느 순간 한계를 맞아 혁신하지 못한 채 기존 제품의 성능 개선만 반복하고, 신기술로 무장한 후발 주자에게 시장 지배력을 잠식당하는 현상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