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은 “자율형 사립대 허용 등을 통해 세계 100대 수준의 경쟁력 있는 대학을 10개 이상 키워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은 “자율형 사립대 허용 등을 통해 세계 100대 수준의 경쟁력 있는 대학을 10개 이상 키워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한국과 같은 경제 규모에서는 세계 100대 수준의 경쟁력 있는 대학이 최소한 10개는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외국 유학생이 몰려오고, 교육이 하나의 큰 산업으로 성장해 국가 경제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는 2002년 외국 유학생을 끌어들이기 위한 ‘글로벌 스쿨하우스 프로젝트(Global Schoolhouse Project)’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0년 만에 유학생 8만4000명을 유치해 8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었고, 교육 부문의 국내총생산(GDP) 기여율이 1.5%에서 3.2%로 높아졌습니다.”

정갑영 전(前) 연세대 총장은 한국이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 고등교육 수요가 매우 큰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아시아의 교육 허브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대학 교육에 대한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규제가 교육 발전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다고 강조했다.

교육을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해법으로 정 전 총장은 ‘자율형 사립대학’을 제시했다.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지 않는 대신 획기적인 규제를 완화해 정원, 등록금 책정 및 학생 선발에서 자율성을 갖는 대학을 허용, 세계 명문 대학과 경쟁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했다.

정 전 총장은 1986년부터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12년 2월 17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총장 재임 중 송도 캠퍼스에 기숙형 대학(RC·residential college) 체제를 도입하고, 백양로 재창조 프로젝트를 완공시켰다. 지난 1월 말 퇴임 후 한국생산성본부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내 대학들의 가장 큰 현안은 무엇입니까.
“대학들이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우선 학령 인구가 대폭 감소하고 있습니다. 2010~2020년에 거의 30%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기다 진학률이 하락세로 돌아서 작년에는 70%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대학 입장에서는 이중의 타격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학이 교육을 제대로 하기 위해 투자할 여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선 등록금이 수년째 동결 내지 인하되고 있습니다. 다른 공공요금과 임금 등은 오르고 있는데 등록금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니 학생을 위한 투자가 감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 스스로의 변화·혁신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대학 내부적으로 거버넌스(지배구조)가 아직 선진화돼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총장을 국회의원 뽑는 것처럼 선출하는 대학들이 많습니다. CEO를 외부에서 영입하는 경우는 드물지요. 학과 간 장벽도 높고 개방적이지 않습니다. 개방이 안 돼 있으니 대학 내부에서 경쟁이 적고 혁신도 잘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 등의 변화에 대비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전문화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공계 대학의 경우 대학원 학생뿐 아니라 학부 학생도 실험 교육을 해야 하는데 현재는 거의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국내 대학은 아직도 1970~80년대의 제조업 인력 양산 시스템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다 우리 사회가 대학을 보는 눈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듯합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은 360억달러(약 40조원)가 넘는 적립금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선 적립금이 가장 많은 대학이 7000억원 정도입니다. 적립금은 원금을 축내지 않으면서 이자 수입 등으로 운영하는 게 원칙인데 저금리로 인해 그 수입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언론 등에서는 적립금을 그렇게 쌓아놓고도 등록금을 내리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이래저래 대학들이 사면초가입니다.”

정부의 교육 개혁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오래 전부터 교육 개혁의 방향, 방안을 놓고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현실화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대선 때 나왔던 숱한 공약도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 정부의 교육 개혁 역시 성과가 있다면 자율학기제 정도입니다. 대선 후보들이 모두 반값 등록금을 공약했는데 그것에 밀려 다른 정책들은 전혀 진전이 없고 엄두도 내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싱가포르의 대학 경쟁력은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다. 사진은 싱가포르 난양기술대.
싱가포르의 대학 경쟁력은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다. 사진은 싱가포르 난양기술대.

반값 등록금 정책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국내 대학의 전체 등록금 규모는 14조원 정도입니다. 반값 등록금 정책은 정부 예산으로 4조원 가까운 장학금을 지급하고, 대학이 3조원 이상의 장학금을 지급해 모두 7조원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대학 입장에서 등록금을 누가 내든 수입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반값 등록금을 위해 정부가 많은 예산을 쓰고 있지만 대학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대학이 등록금을 조금이라도 올리면 페널티를 부과하면서 등록금 인하를 유도했기 때문에 대학 재정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렇게 반값 등록금 정책에 4조원 가까운 정부 예산을 쓰다 보니 대학 교육에 대한 다른 지원을 늘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에 유익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BK(Brain Korea) 예산입니다. 그 예산이 전체적으로 3000억원이 안 됩니다. 장학금 예산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정부가 대학 교육에 많은 예산을 쓰고 있지만 대학 경쟁력 향상에는 기여하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한국 교육의 큰 문제 중 하나로 평준화 정책이 거론되기도 합니다.
“평준화의 당초 취지는 사교육비를 줄이고 소외계층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늘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소외계층이 양질의 고등교육을 실시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진입장벽이 과거보다 더 높아졌습니다. 예전엔 지방마다 괜찮은 공립고등학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학교에서 공부하면 많은 사교육비를 들이지 않고도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학교가 다 사라졌고 대신 자율형 사립고, 외고 등이 생겼습니다. 지방의 여유 있는 계층은 서울이나 서울 근교로 옮기고, 지방에 남아 있는 소외계층 학생들은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는 기회가 과거보다 훨씬 줄었습니다.
실제 대학 입학생들의 소득 통계를 보면 소득 수준과 좋은 대학에 가는 상관관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연세대에서도 기초생계과정의 학생들을 위한 입학 쿼터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성적 때문에 인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교육 황폐화에 대한 대책으로 본고사 부활 주장도 있습니다.
“입시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사회적 이동성을 높이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복원하려면 대학 교육을 다양화, 특성화, 차별화해야 합니다. 대학들이 서로 다른 발전 모델을 추구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높여야 합니다. 지금처럼 획일적인 기준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는 교육 정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율형 사립대를 허용해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면서 동시에 이들 대학이 사회적 책무도 수행하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원, 등록금, 학생 선발과 학사 관리 등에 대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대신 10~20%의 소외계층을 선발해 제대로 교육을 시키라는 조건을 부여하면 됩니다. 장학금은 물론 일부 생활비까지 지원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소외계층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지금보다 훨씬 확대될 것입니다.”

자율형 사립대학 외에 국내 대학 전반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은 무엇입니까.
“자율형 사립대에 대해서는 정부 예산 지원을 없애는 대신 국공립 대학을 집중 지원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지방 국공립 대학들이 지역 혁신을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역 거점 대학’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경쟁력 있는 대학들이 분산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은 정부가 대학을 획일적으로 규제하고 관리하면서 대학 구조조정에 역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정부가 공식 자료를 내놓지 않고 있지만 국가 장학금 덕분에 지방의 경쟁력 없는 대학들이 연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대학을 획일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회적인 낭비입니다. 지방 거점 대학을 만들고 일부 대학은 구조조정하면서 특성화를 통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교육을 핵심 산업의 하나로 키워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교육은 경쟁력을 쉽게 갖출 수 있는 산업 중 하나입니다. 시설과 사람에게 투자하는 효과가 빨리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인구가 적고 국토가 작은 나라인데도 대학 경쟁력은 아시아에서 최고입니다. 싱가포르국립대와 난양기술대는 세계대학평가에서 항상 20~30위권에 드는 세계적인 명문입니다. 2006년 법인화하면서 정부의 재정 지원이 크게 늘어나고 자율성도 높아진 결과입니다. 덕분에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많은 학생들이 싱가포르에 유학을 가고 있고, 그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매우 큽니다.
한국도 중국, 동남아 등의 학생들을 끌어올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문제는 국내 대학들이 외국 학생을 교육시킬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국내에서 대학 교육에 대한 수요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대학들이 외국 학생 유치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과 같은 경제 규모에서는 세계 100대 수준의 경쟁력 있는 대학이 최소한 10개는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해외에서 많은 유학생이 몰려오면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산업이 될 수 있습니다. 국내 대학에서 교육받은 외국인 학생들이 많아지면 장기적으로 한국에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연세대는 국내 처음으로 송도 캠퍼스에 ‘기숙형 대학’ 체제를 도입했다. 사진은 송도 캠퍼스.
연세대는 국내 처음으로 송도 캠퍼스에 ‘기숙형 대학’ 체제를 도입했다. 사진은 송도 캠퍼스.

글로벌 대학 육성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연세대의 언더우드국제대학은 이미 미국 아이비리그에 준하는 대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원의 25%는 순수 외국 학생들이고, 100% 영어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교수진도 국제 수준입니다. 그런데 학교 입장에서 보면 비용이 아주 많이 들어가는 프로그램입니다. 외국인 교수 선발과 이들을 위한 지원, 외국 학생을 위한 기숙사 등 많은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정부 정책과 사회 시스템이 폐쇄적이어서 외국인 교수 한 명을 데려와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주택 마련과 자녀 교육, 문화생활 등 걸리는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 측면에서 송도국제도시의 입지 조건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송도는 글로벌 대학을 육성하고 외국 학생을 유치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를 비교적 잘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송도 글로벌캠퍼스를 조성하면서 국내 학생들이 외국 유학을 가는 대신 송도에 오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한국 학생들이 미국의 뉴욕대에 가는 대신 송도의 뉴욕대 분교를 택할 것인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아직 활성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하나 연세대 송도캠퍼스가 글로벌캠퍼스와 두 블록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규제 수준이 천지차이입니다. 교육도 일종의 클러스터입니다. 함께 가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송도캠퍼스에 기숙형 대학 체제를 도입했는데 얼마나 성과가 있습니까.
“연세대학이 세계적인 명문 대학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분석하기 위해 세계 30개 명문 사학들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첫번째 공통점은 기숙형 대학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캠퍼스에서 같이 생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외국 명문대 총장들은 한결같이 기숙형 대학 교육을 해야 사회성이 길러지고, 소통 능력이 향상되고, 리더로서의 역량과 문화적 다양성을 기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학교 안에서는 기숙형 대학에 대한 반대가 매우 심했습니다. 2000~3000명의 학생들이 매일 시위, 농성을 벌였습니다. 7번 이상 학생들을 만나서 어렵게 설득했습니다. 지금은 학생, 학부모, 교수 모두 만족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인천 지역 소외계층 학생들을 위한 무료 과외 등 사회봉사 활동으로 지역사회의 반응도 매우 좋은 편입니다. 학습 효과 외에 사회성과 리더십, 협동심을 키우는 효과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연세대 졸업생들은 기숙형 대학 세대와 그 이전 세대가 확연한 차이를 보일 것입니다.”


▒ 정갑영
연세대 경제학과, 미국 코넬대 경제학 박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교무처장·원주 캠퍼스 부총장, 총장 역임.


Plus Point

프롬(FROM) 100

10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프롬100 창립 총회.
10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프롬100 창립 총회.

10월 4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프롬(FROM) 100’이라는 명칭의 사단법인 창립총회가 열렸다. 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 주도로 경제산업·과학기술·교육문화·보건복지 등 여러 분야의 중견 학자와 젊은 지식인 100명이 참여했다.

연구력이 왕성한 중견 학자들을 중심으로 학제 간 논의를 통해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구체적인 해결책 제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정 전 총장은 “요즘 정부 정책에 전문가들의 참여가 너무 적고, 지나치게 정치적으로만 접근해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는 데 대해 많은 학자들이 공감했다”고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국가적 어젠다에 대해 전문가들의 토론과 의견 수렴 대신 여·야 대변인이 나서서 정반대 주장으로 갈등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립총회에서 제시한 10대 제언의 첫번째가 ‘경제의 탈정치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