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로디시나 AT커니 명예회장은 “수출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은 서비스 분야를 집중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폴 로디시나 AT커니 명예회장은 “수출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은 서비스 분야를 집중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 C영상미디어 이신영>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의 50%를 차지하는 한국이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가장 고민해야 하는 건 세계경제에 불고 있는 반(反)국제화 바람입니다. 수출 의존도를 낮추고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발 빠른 추격자)’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서비스 산업 경쟁력을 높이고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합니다.”

글로벌 경영전략 컨설팅사 AT커니의 폴 로디시나 명예회장은 지난 10년간 우리나라의 산업 지형도 변화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회장 재임 중이던 2005년 산업통상자원부(당시 산업자원부), 전경련 등과 함께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위한 발전 전략을 담은 ‘2015 산업 발전 비전과 전략 보고서’ 발간을 주도했다.

그는 한국의 국가 경쟁력 제고 방안을 묻는 질문에 수출 걱정부터 했다. 2007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국제화 관련 지표 대부분이 뒷걸음질치며 고립화 움직임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로디시나 명예회장은 2005년과 2007년 미국 <컨설팅매거진> 선정 ‘세계 최고 컨설턴트 25인’에 이름을 올렸다. 2012년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뒤 최고경영자(CEO)들에게 미래 경영환경 변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AT커니의 글로벌 경영정책협의회(GBPC) 의장을 겸하고 있다. 서울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로디시나 명예회장을 단독으로 만났다.


미국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 중 하나는 ‘공유경제’ 시대의 삶의 방식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우버 앱을 이용해 차량을 호출하는 모습. <사진 : 블룸버그>
미국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 중 하나는 ‘공유경제’ 시대의 삶의 방식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우버 앱을 이용해 차량을 호출하는 모습. <사진 : 블룸버그>
‘2015 산업 발전 비전과 전략 보고서’ 발간에 참여했을 당시와 비교해 한국의 국가 경쟁력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이 특히 의미 있다고 보십니까.
‘2015 산업 발전 비전과 전략 보고서’ 발간에 참여했을 당시와 비교해 한국의 국가 경쟁력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이 특히 의미 있다고 보십니까.

“2005년에는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과 높은 수준의 기술 경쟁력을 자랑하던 일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제 한국의 기술 경쟁력은 높아진 반면, 중국은 인건비 관련 경쟁력을 많이 잃었어요. 이제 경쟁력 면에서 세 나라가 어느 정도 비슷한 선상에 서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은 로봇 기술 분야의 세계 1위 투자국으로 떠오르는 등 ‘퍼스트 무버’로 변신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수시장의 한계로 오랜 경기 침체의 아픔을 맛본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의 해외 진출을 전례 없이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고요.”

중국과 일본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한국은 특히 어떤 분야에 역량을 집중시켜야 할까요.
“수출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은 서비스 분야를 집중적으로 키워야 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선진국 대부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서비스 산업 비중은 70% 정도인데 한국은 60%여서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서비스업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구매력이 큰 선진국으로 갈수록 상품보다 경험에 돈을 쓰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교육·헬스케어·여행·엔터테인먼트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7600만명에 달하는 미국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 세대)를 들 수 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 중 하나는 ‘공유경제(sharing economy)’ 시대의 삶의 방식에 익숙하다는 점입니다. 차를 사들이는 대신 우버 등 차량 공유 서비스를 이용하고 오프라인 호텔 대신 에어비앤비 등 숙박 공유 업체를 이용하는 식이죠. 서비스 산업이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2005년에 비해 재벌 기업들이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큰 변화인 것 같습니다.
“한국 재벌의 몸집 불리기는 위험해 보였습니다. 짐승이건 선박이건 덩치가 크면 방향을 빨리 바꾸기 어렵듯이 기업도 조직이 비대해지면 신속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지거든요. 지금의 기업 상황은 몇 년 전과는 또 다릅니다. 글로벌 시장의 상황 변화를 항상 예의주시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신속하게 방향을 바꾸는 ‘방향 전환 기술(art of pivot)’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물론 잭 웰치가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 시절 언급한 대로 덩치가 크더라도 창업자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최고가 될 수 없다면 몇 개는 포기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재벌 기업들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고 봅니다.”

세계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양대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차도 수출 여건 악화로 고전하고 있습니다.
“갤럭시노트7의 성급한 출시에 따른 부작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삼성전자는 여전히 애플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입니다. 현대차도 지난해 미국 시장 판매 감소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올해 1분기 유럽 시장에서 최고 판매를 기록한 데 이어 9월 미국 시장에서 역대 최고 판매를 기록하는 등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두 기업 모두 규모에만 의존하지 않고 혁신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삼성의 스마트폰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애플과 구글은 무인차와 인공지능(AI) 등 새로운 분야에서 혁신을 지속하고 있고,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화웨이와 샤오미 등 중국 업체의 추격이 매섭습니다.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혁신의 기회는 고도로 발달한 제조업과 사물인터넷(IoT), AI에서 두드러질 것입니다. 결국, 첨단기술을 일상의 모든 영역에 접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삼성도 이를 잘 알고 대비하고 있을 것으로 봅니다.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혁신은 ‘완성’이 아닌 ‘지속’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혁신에 근접했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하며 성장해 가는 것이죠.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후 혁신 동력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듣던 애플이 여전히 건재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삼성은 혁신을 위한 능력과 의지를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의 혁신 역량 강화를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게 있을까요.
“혁신의 주체는 정부가 아닌 기업입니다. 정부는 혁신을 위한 여건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2015 산업 발전 비전과 전략 보고서’를 준비하던 당시 한국 정부는 ‘퍼스트 무버’ 기업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뚜렷했고 정책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데 요즘은 그런 의지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한국은 여성의 기업 활동 참여율이 50% 정도로 선진국치고 매우 낮습니다. 반면 창업 비용은 OECD 평균의 3배로 매우 높습니다. 이 부분의 개선 노력에 더해, FDI 유치를 위해 규제 완화 등 투자 환경에도 앞장서야 합니다.”

경제 성장을 위해 경쟁력 있는 스타트업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한국의 창업 성공률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젊은 창업자는 실패의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실패 극복이 어려운 문화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미국 스타트업의 중심에는 실패를 통해 배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이라고 무작정 실패자에게 관대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실패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냥 실패자일 뿐입니다. 반면 미국은 실패를 통해 배운 사람들에게 재도전의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혁신을 위해서는 교육도 달라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교육을 통한 미래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라면 한국이 미국 대학 교육에서 배울 것은 많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수학과 과학, 언어 등 주요 분야에서 한국 학생보다 수준이 떨어지던 미국 학생들이 대학 진학 후 달라지는 이유는 미국의 독특한 교육 환경 때문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수준 높은 인재들이 미국 대학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창의성과 상황 대처 능력을 기르게 됩니다. 암기 위주의 교육과는 전혀 다르죠. 앞으로 20년 동안 가장 혁신적으로 변할 분야는 바로 교육입니다. 한국이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면 온라인 교육과 관련 기술 플랫폼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의 교육 수준 향상은 물론이고 국제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창업자들을 키워낼 수 있을 겁니다.”

북한의 위협이 여전한 상황에서 한국이 어떻게 하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으며 경쟁력을 키워갈 수 있을까요.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애증 관계’입니다. 경쟁도 하지만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어느 한 나라도 포기해선 안 됩니다. 기업도 여러 나라에서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이해관계가 어긋나는 경우가 있는데 풀어서 해결할 수 없고 그저 끝까지 함께 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한국이 서비스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중국보다 미국과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많습니다. 반대로 시장을 보면 중국이 훨씬 매력적이죠. 두 카드를 모두 갖고 있어야 합니다.


▒ 폴 로디시나(Paul Laudicina)
미 시카고대 정치학, 빌 클린턴 행정부 정부혁신위원회 부위원장, 조 바이든 부통령 수석보좌관(당시 상원의원), 스탠퍼드연구소(SRI)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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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일본과 경쟁하려면 서비스 산업 키워라 창업 비용 낮추고 온라인 교육 투자 늘려야”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 등을 제조업과 융합해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뜻한다. ‘인더스트리(Industry) 4.0’이라고도 표현한다. 우리나라에서 추진하는 ‘제조업 혁신 3.0 전략’과 같은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