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의 위세가 2006년에도 쉽게 꺾이지 않을 전망이다. 석유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는 긍정 요소보다 부정 요소가 더 많다. 그러나 정유산업만을 놓고 봤을 때 고유가는 ‘호황’의 다른 말이 된다. 단일 시설 규모로는 국내 최고, 아시아 빅 5에 들어가는 SK 울산공장을 찾았다. ※이 기사 작성에는 이홍표 인턴기자(hawlling@hotmail.com가 참여했습니다.

 2005년 12월7일, 울산공항에 내려서자 찬바람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다. 기내에서 품은 따뜻한 기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껏 움츠렸는데도, 동장군은 기세 좋게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중 나온 SK(주) 울산공장의 김병철(40) 대리도 “겨울에도 영하 15도 이하로 내려가는 일이 좀처럼 없을 정도로 따뜻한 남쪽 도시인데, 이번 연말 추위는 제법 매섭다”며 차량의 히터를 높였다.

 공항에서 SK 정유공장이 위치한 장생포까지는 20분이 채 소요되지 않았다. 최근 한국계 귀신고래가 회유하는 지점으로 색다른 주목을 받고 있는 장생포 일대 250만평의 부지(여의도 면적의 3배에 달한다) 위에 자리한 SK공장은 장생포를 가운데 놓고 맞은편에 위치한 현대중공업 조선소과 더불어 울산을 대표하는 대규모 산업단지로 손꼽힌다. 원통 모양의 집유 시설과 정유탑, 다양한 크기와 길이의 은빛 파이프라인의 결합체인 정유시설은 마치 설치미술 작품을 연상시켰다.



 성수기 겨울, 설비 가동 100<%BR> “대만의 포모사가 정유공장을 신설하기 전까지만 해도 단일 정유공장으로는 세계 1위의 정유 능력을 자랑했어요. 공장에 있는 파이프라인의 길이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배관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면 달나라까지 갔다가 3분의 2 가량 돌아올 수 있을 정도라고만 알고 있습니다.”(이용식 부장, 홍보팀)

 1964년 일일 정유 처리량 3만5000배럴의 정유 능력을 가진 제 1공장에서 첫 생산을 시작한 울산공장은 현재 5개의 정유공장과 2개의 중질유 분해공장(FCC)에서 하루 83만배럴의 원유를 처리하는 세계적인 정유공장으로 우뚝 섰다. 울산공장에는 현재 2800명의 임직원이 공장 설비를 24시간 풀가동하고 있다. 이용식 부장은 “겨울철은 정유공장으로선 성수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설비 가동률이 100%에 달한다”고 부연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비수기인 7~8월에는 가동률이 낮은데, 이 기간에는 설비 보수 등이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원유에 열을 가해 제품을 뽑아내는 공정이다 보니 이상이 발견되지 않을 때까지 계속 가동하는 게 생산성을 높이는 비결이기도 하다. 1964년부터 지속적으로 설비의 개·보수와 증설을 통해 오늘의 정유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된 SK공장의 생산성은 상대적으로 우수한 설비를 가진 선진국과 비교해도 결코 낮지 않다. 비결은 다름 아닌 지난 40년 동안 축적해 온 운용 능력. 잠재 경쟁국이자 SK 제품의 주요 수입국이기도 한 중국의 관계자들이 공장을 방문하면 “우리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인력으로 제품을 만들다니 놀랍다”며 혀를 내두른다.

 아닌 게 아니라, 공장 밖을 돌아다니는 작업자를 만나기란 조금 과장하자면 바닷가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려웠다.(오후에야 밸브 점검차 나온 제5공장 설비 담당 팀원 셋을 만날 수 있었다.)

 “원유 하역에서부터 제품 생산까지 모든 공정이 수많은 파이프와 자동제어기기의 작동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공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워요. 자동차가 노동 집약적이라면 정유는 대규모 자본 및 자동화 설비가 핵심입니다. 정유 과정은 물론 화학제품에는 독성도 많기 때문에 거의 모든 공정이 기계로 처리합니다.”(김병철 대리)

 장생포 외항 방향으로 향했다. 바다에 인접한 해안선에는 8개의 부두가 있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유조선은 부두에 접안을 한 다음 원유를 하역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유조선은 항구의 깊이가 얕아 접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바다 위에 떠 있는 부의(BUOY)라는 중간 하역 매개체를 통해 바닷가 원유 저장 탱크로 원유를 옮긴다. 취재진은 공장 측이 제공한 작은 배를 타고 하역 현장으로 향했다.



 원유 하역의 가장 큰 변수는 ‘날씨’

 파도는 비교적 잔잔했지만, 가끔씩 뱃전에 부서지는 포말은 겨울 바다답게 차가웠다. 15노트 속도로 20여분을 나아가자 씨 플래너(SEA PLANNER)라는 이름을 가진 파나마 국적의 유조선이 부의를 통해 원유를 하역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유조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배의 양쪽에 연결된 소형 선박 두 척이 악어 입 속에 앉은 악어새처럼 작았다.

 “해상 하역 작업은 날씨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부의와 원유선을 고정시키는 체인에는 파도의 높이와 바람의 세기가 50톤 이상의 하중이 되면 감지하는 센서가 달려 있어요. 그 이상이 되면 작업을 하지 못합니다. 하역 작업이 늦춰지면 그만큼 비용이 들기 때문에 날씨는 무척 중요한 변수인 셈이에요.”(법무팀 김성태 사원, 39세)

 하역 작업 중인 씨 플래너호는 대략 200만배럴의 원유를 하역 중이라고 했다. 200만 배럴이면 한국에서 사용하는 원유의 하루 소비량에 맞먹는다. 길이 330미터 가량의 유조선 원유 저장고 밸브에는 주황색 파이프라인이 해상의 부의와 연결돼 쉴 새 없이 원유를 흘려보냈다. 원유를 하역하는 만큼 가벼워진 배는 바닷물로 그 공간을 채워 배의 높이를 조절한다. 덕분에 물에 잠긴 부분은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데, 김성태씨는 “통상 바닷속에 잠긴 부분이 21미터에 달한다”고 했다.

 배에서 하역된 원유는 부의를 통해 지상의 원유 저장고로 옮겨진다. 원유 저장고의 최대 저장 용량은 약 2000만 배럴. 국민 전체가 한 달 동안 쓸 수 있는 양이다. 원유 저장고 주위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1급 보호 시설로 전쟁 등의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최우선으로 보호된다.

 “휘발유 같은 제품은 대부분 내수용으로 쓰이지만, 윤활유나 아스팔트, 벙커C유를 비롯해 벤젠, 톨루엔 등의 기초화학 제품은 50% 이상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의 건설 경기가 활발한데, 우리가 생산해 내는 아스팔트는 품질이 우수해 비싼 값에 팔리고 있어요.”

 점심식사 시간이 되자 공장 각처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구내식당으로 몰려들었다. 공장 각 부문에서 일하는 작업자들이 얼굴을 마주하는 흔치 않은 시간. 조용하고 적막감마저 감돈다고 느껴지던 공장분위기가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공장 내에는 화재에 대한 각별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데, 식당 건물 한쪽에는 흡연자들을 위한 흡연 공간이 설치돼 있었다.

 “공장에는 즉시 해고 사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공장 내에서 불을 피우는 행위, 또 하나는 흡연입니다. 공장 설립 후 아직까지 해고된 사람은 없지만, 화재에 대해 그만큼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공장에는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소방서까지 별도로 있다. 2대의 소방차는 24시간 출동 준비 태세에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사태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 중 한 대는 화학 물질 유출을 막는 화학소방차로, 국내에는 한 대밖에 없는 귀한 존재였다.

 오후 2시, 울산공장을 책임지고 있는 지성태 부문장(부사장)을 만났다. 전기 엔지니어로 1983년 입사해 22년째를 맞고 있는 그는 “현장 운영의 첫 번째 목표가 안전 생산”이라고 밝혔다. 2005년 3월 울산공장 총 책임자에 임명된 그는 “규모에서는 대만에 뒤졌지만, 생산성과 총생산량 만큼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정유산업은 내수산업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2005년 3분기 석유제품 수출이 사상 최초로 전체 판매량의 절반을 넘어서 3168만배럴(52%)을 해외에 수출했어요. 2004년에도 금액 기준으로 4조6000억원을 수출했고 내수는 7조2000억원 정도였습니다. 화학사업의 경우엔 전체 생산량의 60% 안팎의 물량을 수출하고 있어요. 2005년 3분기에는 총판매량의 62%인 36만6000톤을 해외에 수출했습니다. 특히 2005년 6월과 9월에는 최초로 월 수출액이 1000만 달러를 넘어서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중국은 최대 수출국이자 잠재 경쟁국

 석유제품은 자동차, 반도체, 통신 등에 이어 국내 수출품목 6위에 올라 있다. 2004년 국내 석유제품 수출 규모는 일본은 물론, 산유국인 중국의 2배 이상을 기록했다. 특히 중국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어 가장 중요한 수출시장이기도 하다. 윤무식 부장은 “가장 중요한 고객이자 잠재적 경쟁자를 생각으로 긴장을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제 5공장으로 향하는 길에 2005년 12월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간 중질유 분해공장(FCC)을 들렀다. 원유를 정유하면 43%가 벙커C로 나온다. 이 벙커C유에 수소 등을 첨가해 다시 한 번 분해해서 휘발유, 경유 등의 경질유를 만들어 내는 시설이 중질유 분해공장이다. 1차 정유 시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와 압력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운용 조건이 까다롭다. 그러나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설비인 만큼, 앞으로도 지속적인 설비 증강을 해 나갈 방침”이라고 지성태 부문장은 밝혔다.

 원유를 생산해 내는 제 5공장에서 3명의 현장 근로자들을 만났다. 제 5공장 설비팀원들로, 탈황시설 점검차 밸브와 계기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독성 물질이 많은 만큼 설비의 안전은 24시간 동안 첨단 센서와 전문 인력이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설비팀의 단위를 ‘쉬프트’(shift)라 부른다. 통상 5~7년 정도 함께 근무하는데, 팀워크가 생명이다. 더구나 지난 10년 동안 현장 신규 채용이 거의 없다 보니 입사 10년 차인 30대 중반의 ‘막내’를 종종 본다.

 “설비 증강이 빠르게 일어나던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공장에서 고졸자들을 대상으로 한 6개월 연수 학교가 있었어요. 그 중에서도 우수한 인력만 가려 뽑아 채용했죠. 하지만 설비가 고도로 전문화 되고, 대부분의 공정이 사람을 필요로 하는 요소가 적어지면서 학교도 문 닫고, 현장 실무 인력의 신규 채용도 줄어들었죠.”



 막내가 입사 10년차 ‘팀워크가 생명’

 실제 기기 운용을 담당하는 공장의 현장 인력은 대부분 이·공계 출신이다.  초급대학 이하의 학력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지속적인 학습과 노하우 축적을 통해 이들의 운용 능력은 세계 최정상급이다. 인력 육성은 단순히 생산 제품을 통한 매출뿐 아니라, 설비 운용 노하우를 외국에 파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지 부문장은 “설비 운용을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인데, 처음 토익시험을 치렀을 땐 200점대였던 사원이 800점 이상을 맞는 수준에 도달했을 정도”라고 했다. 양보다 질로 승부해야 하는 시대인 만큼, 지속적인 인력 경쟁력 제고가 결국은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점은 현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 부문장은 향후 1조3000억원에서 2조원대의 대규모 투자를 통해 세계 1위의 단일 공장 위상을 다질 것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공정위가 SK의 인천정유 기업결합 요청을 승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인천정유를 인수하게 될 경우 SK(주)의 하루 원유 정제 능력은 현재 84만배럴에서 111만5000배럴로 늘어나 2위인 GS칼텍스(하루 65만배럴)와 격차를 더 벌이게 된다. 2005년 10월까지 SK(주)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34.8%로, 인천정유(6.0%)를 합치게 될 경우 40%를 훌쩍 넘기게 된다.

 겨울 해가 짧기는 울산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후 5시를 넘어서자 초저녁 기운이 완연했다. 어둠이 다가올수록 공장 설비 곳곳에 달린 전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태양이 임무를 마치고 기울자, 공장의 전등이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린 전구처럼 공장 설비를 비추며 곳곳에서 밝은 빛을 발했다. 산업용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하루 동안 공장 안내를 맡았던 김 대리는 “울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 중 하나가 공장의 야경”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땅 석유화학 역사의 산 증인으로 40년 역사를 써내려온 울산공장.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와 불빛이 어울린 광경은 말 그대로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