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일본식이냐 혹은 독일식이냐며 경기침체의 장기화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는가 하면, 8년 전 외환위기 당시보다 더 위기상황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외환보유고 고갈로 인한 위기가 아니라 경제 운용 주체들에 의한 위기라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8년 전 ‘경술국치’에 비유할 만큼 한국경제가 겪어야 했던 치욕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지금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데에는 모두 한 목소리를 낸다. 이는 곧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지난 8년 동안 한국경제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의 길을 걸어왔고, 다만 그 과정에서 다시 넘어야 할 한계가 노출되고 있음을 뜻한다.
1 경제 패러다임의 대변화



  나라의 경제를 분석하는 잣대로 활용되는 지표는 분석 주체들에 따라 다양하면서도 각기 다르다.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는 제때에 금전적 의무를 다하려고 하는 정부의 의지와 능력이라는 총체적인 잣대를 들이밀면서, 화폐로 발행한 국채나 보증을 근거로 국가신용등급을 부여하고 있다. 즉 디폴트(default)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모든 지표들이 총동원된다.

 이에 반해 일반적으로 경제 전문가들이 활용하는 잣대는 그 나라의 거시경제지표다. 국민소득이나 물가수준 등 국민경제 전체를 대상으로 분석한 지표라는 점에서, 한 나라의 경제상황을 한눈에 파악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거시경제지표가 좋다고 반드시 그 나라 경제의 장래가 밝다고만 할 수 없다는 함정도 있다. 거시경제지표가 좋아도 미시경제지표는 나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시경제지표가 좋으면 거시경제지표는 이를 반영하기 때문에 좋게 나타난다. 이에 거시경제지표보다 미시경제지표를 통해 경제를 분석하는 전문가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8년 동안 한국경제를 들여다보면, 일단 거시경제지표는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완전히 회복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지난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이했던 당시에도 한국경제는 실업이나 인플레이션은 양호한 편이었다. 1997년 하반기 실업률은 2.2%였으며,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4.5%로 양호했다. 경제성장률도 7%선으로 유지됐으며, 제조업 설비 가동률도 90%를 상회했다. 재정수지도 거의 균형에 가까웠다. 다만 국제수지가 8월 이후 매달 20억달러 정도 적자를 기록하고, 대미환율이 점차 상승추세로 외환수급의 불균형을 예고할 뿐이었다. 즉 거시경제지표는 외환위기 도래를 예측할 만큼 위험하거나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에 미시경제지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외환위기는 경제위기가 원인이 아니라, 한국경제의 축적된 구조적 모순이 드러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총량 위주의 성장정책을 시행한 결과, 서구 여러 나라들이 100~200년에 걸쳐 이룩한 성과를 한국경제는 불과 30여년 만에 압축성장을 이루면서 경제체제 왜곡 등의 구조적 모순이 외환위기라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환위기의 극복은 경제시스템의 정상적인 가동, 즉 고도 성장기에 누적된 폐해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시장을 대신할 경제체제의 구축을 통해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구조조정으로 이뤄야 한다는 게 정 총장의 주장이다.

정 총장의 주장처럼 거시경제지표의 함정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또한 한국경제의 외환위기가 축적된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거시경제지표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다만 오늘날 선진국들의 경제정책은 모두 미시경제 정책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음은 재확인해야 한다. 선진국들은 ‘0%의 인플레이션율’을 목표로 경제정책을 구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미시경제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가격체제의 안정부터 확보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아직 이 수준에 도달해 있지 못하다. 어떤 미시경제 정책을 내놓는다 해도 그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여전히 거시경제지표의 변화는 한국경제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이유로 자리한다.



 외환위기는 축척된 구조적 모순이 드러난 결과

 지난 8년 동안 한국경제는 거시경제지표만을 놓고 볼 때, 위기를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하다. 외환위기 이후 8년 동안의 주요 경제지표를 살펴보면, 현 단계 한국경제가 위기라는 진단은 지나친 비관론자들에 의한 발목잡기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

 먼저 경제성장률을 보면 1997년 4.7%에서 외환위기 첫해였던 1998년 -6.9%로 10%포인트 이상 급락했다. 그러나 민간소비 확대와 수출호조로 1999년 9.5%까지 치솟았으며, 2000년에도 8.5%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외환위기 졸업을 공식선언했던 2001년 3.8%로 하락하기도 했지만, 2002년 들어 7.0%로 다시 올라섰으며, 2003년 3.1%, 2004년 4.6%, 그리고 2005년 6월 현재 3.0%를 보이는 등 비교적 안정적인 추이를 이어가고 있다.

 1997년 1만1176달러에서 1998년 7355달러로 감소했던 1인당 국민소득(GNI)은 점차 증가했다. 1999년에는 9438달러, 2000년 1만841달러, 2001년 1만160달러, 2002년 1만1499달러, 그리고 2003년에는 1만2720달러로 외환위기 이전인 1997년 수준을 오히려 상회했으며, 2004년에는 1만5000달러에 육박하는 1만4162달러로 증가했다.

 물가지수는 1998년 7.5%까지 치솟았지만, 2001년부터 3%대 전후에서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며, 경상수지 흑자 기조 역시 1998년 406억달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금리, 주가, 환율 등 금융 거시지표도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모두 회복했다.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요인이었던 외환보유고 및 총 외채도 적정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39억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고는 2001년 1028억달러로 1000억달러를 돌파했으며, 2005년 8월 현재 2067억달러로 50배까지 증가했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구조조정 지원과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외평채 발행 등 경제안정과 경쟁력 강화에 투입됐던 국가채무는 2004년 말 현재 GDP 대비 26.1%인 203조1000억 원. 그러나 외국에 비해서는 낮은 수준이며, 내용 면에서도 양호하다.

 국가신용등급은 S&P가 A, 무디스가 A3, 피치가 A를 부여함으로써 외환위기 전과 비교하면 두 단계 아래 수준까지 올랐다. 시장개방과 외자유입 등으로 대외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외풍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경기 변동 폭이 이전보다 확대된 점을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경제는 외환위기 8년 동안 외형적으로만 본다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특히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비슷한 금융위기를 겪은 북유럽 및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하더라도 한국은 실물경제의 회복속도가 빠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1994년 말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멕시코와 비교했을 때도, 한국은 물가와 금리, 환율 측면에서 보다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발표된 ‘OECD 한국경제보고서’에서도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작된 구조개혁의 진전, 견조한 해외수요 등에 힘입어 과거 5년간 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수준인 연평균 5.5% 성장했으며, 그 결과 국민소득은 OECD 평균의 3분의 2 수준까지 향상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같은 거시경제지표의 향상은 정부와 연구기관 및 경제학자들 간 뜨거운 설전의 불씨가 되고 있다. 지표상의 수치가 아니라 실제 경제활동에서 느끼는 내용이 더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외형적인 실적만 요란할 뿐 실질적인 성과물은 없다는 지적은, 비난이든, 비판이든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외환위기 8년을 맞는 현 시점에서 다시 점검되어야 하며,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채찍질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는 지적은 설득력을 갖는다.



 체감경기는 경제지표보다 훨씬 악화

 실제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사회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확대되었고, 가계파산이 증가하면서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또 그동안 지속된 경기부양 조치의 부작용으로 시중자금이 부동산시장에 몰리면서 주택가격이 급등하는 현상을 낳고 있다. 개혁을 통해 그동안 누적되어 온 부실과 비효율을 제대로 제거하지 못한 결과, 경제주체들이 아직도 기존 방식과 새로운 시스템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생존위기를 넘기고 구조조정을 성공리에 마친 기업들도 중국 등 새로운 경쟁 체제와 환경이 형성되면서 불투명한 생존전망을 내놓고 있다. 수출 2000억달러 시대를 맞이하면서도 민간소비는 3년 연속 마이너스성장이 기대하고 있으며, 수출의 과실을 내수로 연결하지 못하는 양극화도 산업, 기업, 지역 등 전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국내 정치의 불안요소가 상존해 있는 한편, 국제유가 급등, 달러화 강세 등 외부적 불안요소까지 새로운 변수로 가세하고 있다.

 외형적인 거시경제지표의 향상과는 무관하게 경제주체들이 겪고 있는 이 같은 현실은 장기적으로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는 복병으로 수면 아래에 도사리고 있다.

 이와 관련,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지난 5월 “총체적으로 보면 아직도 우리는 외환위기의 쇼크로부터 완벽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다”며, 거시경제지표의 향상에 대한 환상을 우려했다. 오히려 한 부총리는 “외환위기 직후 8~9%씩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던 것은 마이너스 성장률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이었다”며, “전체적인 국가 산업 및 경제구조가 아직도 구조조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부총리의 이 같은 인식은 외환위기와 함께 집권한 김대중정부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을 구사했다면, 노무현정부를 비롯한 앞으로의 정부에서는 한국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장기적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대다수 경제학자들의 지적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인위적인 시장개입을 통한 거시경제지표의 향상이라는 인식의 토대 아래, 향후 경제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을 위한 지속적인 개혁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외환위기는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한국경제 체제가 전환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 한국경제를 지탱해 왔던 보이지 않은 경제논리가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참히 깨진 은행불사·대마불사 신화

 한국경제는 외환위기를 겪으며 과거와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다. 단적으로 지난 4월 한국을 방문했던 토마스 번 무디스 사장은 “지금이 한국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한국경제 내에 (외국자본이) 이처럼 많이 개입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현재 한국경제에서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은 실로 막강하다. 주식시장에서 50%에 육박하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경영권까지는 아니더라도 금융기관은 사실상 독식하다시피 했다. 한국경제의 수출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자동차 제조사도 현대·기아자동차를 제외하곤 삼성자동차를 시작으로 대우·쌍용 자동차의 경영권이 모두 외국계로 넘어갔다. 서울 시내 대형건물들도 대부분 외국계 자본이 소유하고 있다.

 최소한 국내에서만큼은 국내 기업들끼리 경쟁했던 시대에서 벗어나 국내 역시 글로벌 경쟁시장으로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번 사장은 “결국 이것이 한국에게는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특히 대형 외국은행들이 금융부문에 대한 촉매역할을 함으로써 금융시스템을 강화하는 데에 플러스적인 작용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불사(銀行不死)와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도 무참히 깨졌다. 1998년 5개 부실은행이 퇴출된 것을 시작으로 많은 금융기관이 문을 닫거나 합병됐으며, 종금사 등 제2금융권의 몰락이 두드러졌다.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는 논리가 외환위기 이후 사라진 것이다.

 대기업도 줄줄이 도산했다. 외환위기 첫해였던 1998년까지만 해도 자산규모로 10대 대기업 집단에 속했던 대우·기아·쌍용 그룹이 해체됐으며, 동아·한라·한일 그룹 등 30대 대기업 집단에서만 모두 12개 그룹이 퇴출되거나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치적 논리가 아니더라도 대기업이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기업인들에게 각인된 것이다.

 시장원리의 기본법칙은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사실은 새삼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이윤을 내지 못하는 기업은 퇴출되는 게 마땅하고, 효율적으로 이윤을 내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나 이처럼 단순한 논리가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고도성장을 앞세운 정부의 보호 속에서 한국경제는 몸집 불리기를 30여년 지속해 왔으며, 효율성보다 규모에 따라 모든 것을 평가해 왔다. 그 속에서 대기업들은 정부통제 아래 금융기관으로부터 안정적인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금융기관 역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정부에 의해 손실을 보전받음으로써 다운사이드 리스크(down side risk)보다는 업사이드 게인(upside gain)에 관심을 가졌다. 결과적으로 비효율적인 투자계획이 집행될 수 있는 환경을 정부가 조성했고, 이는 고스란히 한국경제에 부담으로 떠넘겨졌던 것이다.

 기업들의 경영환경에도 적잖은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외국자본의 대량 유입으로 경영권 방어에 소홀했던 기업들이 지배구조 개선 요구를 받아들여 투명경영을 강조하고 있으며, 변칙세습에 의한 경영권 대물림에도 제동이 걸렸다. 즉 기업의 윤리와 투명경영 및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요구가 증대한 것이다. 특히 외국인 보유주식이 증가하면서 SK그룹이 소버린에 의해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등 과거에는 볼 수 없던 외국주주들과의 힘겨루기도 생겼고, 이는 외환위기 이후 새로운 주주총회 모습으로 등장했다. 자본국적론은 이때 등장한 새로운 논쟁거리였다.



 서강학파의 몰락, 학현학파의 부상

 한편, 외환위기는 한국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는데, 최초의 야당정권이 수립이 그것이다. 경제파탄으로 인한 새로운 체제의 갈망, 곧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 요구가 정권 자체를 바꾸는 힘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 결과 30여년 압축성장주의를 내걸며 한국경제를 이끌어 왔던 소위 서강학파가 경제정책 전면에서 대거 퇴진하고, 재야경제학자로 일컬어졌던 학현학파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박정희정부로부터 김영삼정부에 이르기까지 경제정책의 중심에서 일관되게 성장 기조를 유지해 왔던 서강학파는 경제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신화로까지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제파탄의 주범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피하질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학현학파는 김대중정부에 이어 현 노무현정부의 경제정책을 이끌고 있는 변형윤 서울대 교수의 제자그룹으로, 경직된 성장주의가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인식 아래 경제 구조의 전면 수술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서강학파의 성장주의 모델에 반해, 학현학파는 분배주의 모델을 제시하며 최근까지도 ‘성장 vs 분배’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부주도형 개발경제에서 벗어나 민간주도형 시장경제로 전환을 시도한 시점도 외환위기 이후다. 물론 아직까지 한국경제가 완전한 민간주도형으로 바뀌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외환위기는 한국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경제는 고도 성장기에 누적된 폐해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시장을 대신할 경제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당면과제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구조조정을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정부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김범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현 상황을 재도약과 장기정체의 갈림길로 인식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게 필요하다”며, “정부가 비전을 제시하고 정책을 일관성과 운영의 효율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경제주체들이 미래를 희망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독려하는 한편, 정책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민간의 역동성을 자극하는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경기가 위축된 상황에서도 무리한 경기부양 없이 안정적인 거시경제 관리로, 경제회복 속도는 다소 느리지만 자생력 있는 경기회복의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한 외부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스테파너스 요하네스 스쿠만 남아공 대사는 “한국의 상황이 그리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면서, “경제성장률 3~5%를 기록하고 있는 선진국들에 비해 유독 아시아 지역만 7~9%를 보이고 있어 상대적 빈곤을 느끼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어 그는 “침체해 있는 세계경제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한국경제는 기초체력이 튼튼하고 많은 잠재력을 갖추고 있어 경기회복은 시간문제”라고 덧붙였다.

 문석호 한국무역협회 미주본부장도 “월가를 비롯해 미국 경제계 인사들을 만나면, 그들은 한국경제를 무척 밝게 본다”면서, “특히 제일은행을 인수한 스탠다드 차터스 사장을 만났을 때 그 같은 말을 많이 들었다”고 전한다. 대부분 한국경제의 저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민간경제연구소들도 올해 경제성장률을 조정하는 등 한국경제에 대해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특히 외환위기를 겪으며 과거와는 달리 경제를 왜곡하는 시스템이 사라졌다는 점이 한국경제의 미래를 높게 평가하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 즉 경제성장의 인프라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스스로 밝혔듯이, 큰 틀을 바탕으로 중장기 로드맵 수립 등 경제시스템 선진화 대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성과는 미흡하다. 특히 구조조정을 위한 법·제도 마련이라는 성과에도 거의 실제 작동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경제의 불확실성만 증폭되고 있다.

 이 때문에 선진국이 경험했듯이, 경제가 발전하면서 잠재성장률이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국의 경우, 요소투입 증가율뿐만 아니라 요소생산성의 증가세까지 둔화되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 주고 있다. 정부가 요소투입형 경제에서 지식·정보에 바탕을 둔 혁신주도형 체제로 전환함으로써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제주체들의 사고도 바뀌어야

 그동안 한국경제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시장원리가 작용하는 경제시스템의 제도적인 틀은 어느 정도 마련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들 제도적 틀의 변화가 기업관행이나 금융관행으로 정착되어 경쟁력 확대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전망이다. 인위적인 구조조정과 시장 외적인 요인에 의존해 온 관행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경제주체들의 패러다임도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경제개혁을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밑그림 제시와 구조개혁을 위한 비전의 수립이 요구되고 있으며, 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당면과제라는 게 한국경제를 걱정하는 모든 이들의 의견이다.

정운찬 총장은 “내생적인 통제와 감시·감독을 통한 제도적 환류가 지속적으로 이뤄져 제도적으로 정착되어야만 개혁을 완수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