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은 사람’과 ‘실력 좋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면 과연 누구를 골라야 할까? 쉽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오늘 소개할 억만장자를 보면 ‘운 좋은 사람’이 좀더 나을 듯하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우연찮게 시작한 샌드위치 가게를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로 키운 주인공을 만나 보자. 성실한 데다가 운까지 겹쳐 프랜차이즈의 일가(一家)를 이룬 프레드릭 드루카 회장을 소개한다.

 재 미국 내 최대 패스트푸드 체인점은 어느 곳일까? 예상과 달리 맥도널드(McDonald’s)가 아니다. ‘잠수함 샌드위치’라는 별칭을 지닌 서브웨이(Subway)가 지난 2001년 12월 현재 1만4000개의 지점을 확보하면서 맥도널드의 점포 수를 앞질러 버렸다.

 맥도널드보다 10년 늦게 출범한 서브웨이는 현재 전 세계 81개국에 2만5000여개의 점포를 두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에도 지난 1991년 진출, 현재 서울, 부산 등지에 41개 점포가 운영 중이다. 독특한 모양의 샌드위치 빵을 주메뉴로 해서 지난해 말 현재 매출액 62억달러(약 6조8000억원)를 올린 것은 물론 <앙트레프레너>(Entrepreneur)지가 선정하는 ‘500대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식당 부문에서 지난 2001년부터 올해까지 5년 연속 1위로 뽑히는 성과를 거뒀다.

 <앙트레프레너>지는 미국 내 프랜차이즈 업체들을 대상으로 안정성, 성장성, 초기비용 등을 평가해 부문별 최고의 프랜차이즈를 선정하는데, 서브웨이가 패스트푸드 부문 5년 연속 1위로 지금까지 모두 13번이나 1위 자리에 올랐다고 밝혔다. 반면 맥도널드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적어도 미국 내에서는 맥도널드보다는 서브웨이의 성장성을 높게 평가한다. 지난 1986년 이 잡지가 처음으로 평가 대상에 서브웨이를 포함시켰을 때만 해도 서브웨이는 200위 바깥 순위였다.

 단돈 1000달러로 창업해 오늘의 서브웨이를 일군 프레드릭 드루카(Frederick DeLuca, 58) 회장은 샌드위치 가게 하나로 15억달러(2005년 6월30일 현재 <포브스>지 추산, 약 1조6000억원)의 재산을 모아 미국 내 207위의 부자로 기록됐다. 서브웨이의 기록을 통계로 잠깐 살펴보면 이렇다. 현재 1분당 2200개의 서브웨이 샌드위치(15cm짜리 기준)가 전 세계에서 팔려 나가며, 지난 한 해 동안 팔린 샌드위치를 일렬로 세우면 지구 둘레를 여섯 바퀴나 도는 길이가 된다.

 프레드릭 드루카 회장은 1947년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에서 공장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던 어린 시절, 그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빈 병을 주워다 팔곤 했다. 드루카 회장이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이 뉴욕 주 북부 암스테르담 시로 이사하면서 그는 ‘운명적인 조우(遭遇)’를 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피트 벅(Peter Buck) 박사라는 물리학자를 사귀게 되는데, 그는 드루카 회장의 표현대로 아버지와는 ‘외견상 어울리지 않는 친구’였다. 드루카 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노동자였고, 벅 박사는 명문 컬럼비아대 출신 물리학 박사였는데, 희한하게도 두 사람은 쉽게 의기가 투합했다. 그래서 가족들끼리도 자주 만나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버지의 친구였던 박사는 나중에 그의 사업파트너가 되어 줬고, 두 사람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65년 여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드루카 회장은 동네의 철물점 종업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그다지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등록금 조달 방법을 두고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집 뒤뜰에서 열린 바비큐 파티에서 벅 박사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고, 박사는 제안을 하나 한다. “프레드야, 샌드위치 가게를 하나 열면 어떻겠니?” 미국 북동부 메인(Maine) 주에 살면서 잠수함처럼 생긴 투박한 샌드위치 가게가 괜찮게 장사가 되는 걸 본 경험이 있던 벅 박사가 한 이 제안이 거대 프랜차이즈 서브웨이의 시작이었다. 벅 박사는 단순히 충고만 한 게 아니라 1000달러짜리 수표를 어린 프레드에게 내밀었다.

 여기서 잠깐, 현재 팔리는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살펴보면 왜 맥도널드보다 더 인기를 끄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서브웨이는 기름에 튀긴 고기를 쓰지 않는다. 콜드컷(Cold-cut)이라는 이 방식대로 하면, 기름에 튀긴 기존의 햄버거나 피자가 비만을 가져다줄 우려가 높은 데 반해 더운 물에 고기를 데치거나 훈제로 요리하는 방식이라서 칼로리와 지방 함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여기에다 고객주문방식(Order to be Made)이라는 독특한 서빙 방식을 채택해, 샌드위치 속도 손님이 직접 선택하도록 했다. 세트 메뉴나 빅맥, 와퍼 등의 이름으로 맥도널드나 버거킹에서 파는 햄버거는 이미 만들어진 햄버거를 기초로 한 변형에 불과하다. 하지만 서브웨이에서는 손님들이 그때그때 원하는 내용물을 조합해 ‘직접 만들어 먹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현재 서브웨이의 표준 메뉴를 보면 육류가 쇠고기부터 칠면조 고기까지 열다섯 가지 종류이다. 이 가운데 여덟 가지는 손님이 원할 경우 전자렌지로 데워서 제공하긴 하지만, 어쨌든 식용유는 들어가지 않는다. 야채는 양상추, 피망, 심지어는 고추까지 열여섯 가지가 제공된다. 이는 어느 나라 사람의 입맛에도 맞추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돼지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이슬람권 손님들은 대신에 닭가슴살 샌드위치를 메뉴로 즐기면 되는 것이다. 혹 남미 출신 손님이라면 매운 고추를 가미해서 먹을 수도 있다.

 샌드위치를 구성하는 빵 역시 기본적으로 통밀빵 등 다섯 가지 가운데서 고를 수 있으며, ‘랩(Wrap)’이라고 부르는 밀가루떡처럼 생긴 외피 메뉴도 있는 데다가 어린이 전용 메뉴까지 포함시키면 서브웨이에서는 자그마치 200만 종류의 메뉴 조합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이런 방식으로 샌드위치를 만들다 보니 최근 식료업계의 지배적인 추세인 ‘저칼로리-저지방-저콜레스테롤’ 위주의 메뉴를 경쟁업체보다 먼저 구축할 수 있었다. 

 다시 시곗바늘을 40년 전으로 돌려 보자. 벅 박사의 출자에 힘입어 드루카 회장은 마침내 1965년 8월 다소 길고 촌스러워 보이는 <피트의 수퍼 잠수함 샌드위치(Pete’s Super Submarines Sandwich)>라는 이름으로 첫 가게를 열게 된다. 두 사람은 첫날 312개의 샌드위치를 팔았다(드루카 회장은 생애 첫날 매상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 드루카 회장은 그의 가게에서 150킬로미터 반경 내의 농장을 직접 돌며 샌드위치 재료를 구입했다.

 드루카 회장이 이 첫 번째 투자를 성공시켰을까?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사업이 그렇게 보기만큼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모든 것이 처음 의도대로 된 건 아니었다. 식재료 구입에서부터 종업원 교육까지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프레드릭이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나 많은 과업들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석 달 만에 돈을 다 날려 버리고 빈털터리가 된 그에게 벅 박사는 다시 한번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샌드위치는 웬만큼 팔리는 것 같은데 돈이 영 모아지질 않았다.

 두 번째 식당까지 망하자 드루카 회장은 가게의 이름과 디자인부터 재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손님들이 보기에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문이다. 결국 세 번째 시도에서 그는 상호를 ‘피트의 수퍼 잠수함 샌드위치’에서 단순하게 ‘서브웨이(Subway)’로 바꾸었는데, 이게 주효했다.  잠수함(Submarine)이라고 하기에는 좀 거칠다 싶어 앞의 ‘Sub~’만 살렸는데도 손님들이 훨씬 잘 기억했던 것이다. 상호변경 후 간판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초록색에서 강렬한 노랑색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샌드위치의 내용물과 주문 형태를 좀 변경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당시만 해도 ‘패스트푸드’라고 하면 햄버거나 피자 정도를 떠올리는 시절이었는데, 벅 박사와 프레드릭은 야채를 가미해, 요즘 개념으로 보면 ‘웰빙 건강식’ 부류의 패스트푸드를 창출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가 고안한 새로운 형태의 패스트푸드는 앞서 살펴본 대로, 잠수함 모양의 빵에다 햄이나 칠면조 같은 고기 외에 각종 야채와 양념 등을 고루 넣은 것이다. 이것이 오 늘날 인기 만점 프랜차이즈 ‘서브웨이 레스토랑’의 소박한 시작이었다.

 세 번째 사업체 ‘서브웨이’는 그 해에 이 두 사람 손에 7000달러라는 거액을 쥐어 주었다. 창업한 지 8년이 되던 해 서브웨이 점포 수는 16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드루카 회장은 그 정도로 만족하진 않았다. 샌드위치 가게 운영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그는 더 큰 꿈을 꾸게 된다. 단순히 치즈나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 몇 개 파는 것이 아니라 온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샌드위치를 맛보이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드루카 회장은 이미 서브웨이 첫 점포를 열면서 나름대로 목표를 설정해 두었다. 향후 10년간 30개 이상의 체인점을 여는 걸 일차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10년이 다 되도록 절반 수준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물론 모두 직영 체인점이었다. 이즈음 밤이 새도록 점포 확장 방안을 고민하던 그에게 ‘프랜차이즈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프랜차이즈’란 개념이 흔하고 일반인들도 잘 이해하는 형태이지만, 70년대 당시만 해도 선뜻 일반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제 점포 수가 20개도 되지 않은 서브웨이가 프랜차이즈를 시작한다는 것은 뜬구름 잡는 얘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드루카 회장은 맥도널드가 1950년대 도입·발전시킨 이 프랜차이즈 개념을 이용해 사업을 확장한 것을 비롯해 나중에는 맥도널드보다 더 많은 점포를 미국 내에 열게 된다.

 당시만 해도 흔한 샌드위치 가게 중 하나였던 서브웨이가 프랜차이즈로 업태를 바꾼다는 게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재미있는 사건 하나가 그에게 돌파구를 마련해 준다. 프랜차이즈로 서브웨이를 키우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직영점 관리에 힘겨워하던 드루카 회장은 절친한 친구 딕슨(Brian Dixon)에게 1호 프랜차이즈를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이 친구는 에어컨과 닥트 관련기기를 설치·관리하는 회사에 다니는 데다가 샌드위치 가게에는 별 관심이 없던 터라 떠맡듯이 서브웨이 1호 프랜차이즈점을 시작해 관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1호점이 잘 돼야 다음 프랜차이즈점도 잘 개설이 될 터인데, 친구 딕슨은 드루카 회장의 노심초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만 보낸 것이다. 이럭저럭 몇 달이 지난 뒤 딕슨의 회사가 갑자기 파산을 맞게 됐다.

 마치 ‘드루카 회장을 도우라’는 하늘의 계시인 것처럼,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자 딕슨은 서브웨이에 전력투구하게 되고, 드루카 회장은 본격적으로 코넥티컷 주에 프랜차이즈 광고를 시작했다. 초기 투자비용은 단 1000달러로 정했다. 이는 ‘서브웨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와 훈련비용만 포함한 것. 나머지 재료비나 간판 등 내·외부 장식비용 등은 점주가 부담하고 매출의 8%를 로열티로 본사에 지급하는 조건으로 시작했다. 1년 동안 코넥티컷 주에 단 16개의 프랜차이즈를 여는 데 그쳤지만, 드루카 회장은 별로 낙망하지는 않았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덕인지 이듬해부터는 입소문이 나면서 고향인 코넥티컷 주를 벗어나 뉴욕 주, 메인 주 등에서도 프랜차이즈 개설 신청이 쇄도했다. 2년 뒤에는 100번째 체인점을, 그로부터 5년 뒤인 1982년에는 200호 점포를 개설했다.

 이렇게 시작된 서브웨이 프랜차이즈는 30년이 지난 2005년 9월 말 현재, 전 세계 81개국에 2만5000여개의 점포를 보유한 세계적 체인으로 변모했다. 드루카 회장은 후에 “프랜차이즈를 운영한다는 것은 대의(代議)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협조를 이끌어 내고 여러 가지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초기에는 프랜차이즈 참가비용으로 1000달러만 받았지만, 이 비용은 계속 인상돼 200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부터는 8만5000달러를 초기 설립 비용으로 받기 시작했다. 그만큼 창업에 대한 수요도 늘었고, 서브웨이의 명성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도널드 점포 하나를 여는 데 100만달러 전후의 비용이 든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브웨이 프랜차이즈가 얼마나 저렴한지 짐작할 수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기존에 서브웨이를 운영하던 점주들이 2호, 3호점을 잇따라 내는 경우도 늘어났다. 현재 기존 점주가 재분양을 받는 비율은 65%, 즉 새로운 프랜차이즈 열 곳 중 여섯 곳 이상의 점포주가 이미 서브웨이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2004년에는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가 잘 진출하지 않는 이른바 ‘비전통적 지역’에 175개의 점포를 추가했다. 이를테면 공항, 편의점 내, 심지어는 학교, 병원, 군부대까지 진출한 것이다.

드루카 회장은 이렇게 외형을 확장해 나가는 한편 내실을 다져 갔다.

 종업원들과 프랜차이즈 점주를 대상으로 하는 사전 교육과정에서 인원을 최소화하는 대신 능률을 최대한 낼 수 있는 방안을 담은 매뉴얼을 전달했다. 서브웨이의 빵과 속 재료는 투명한 진열장 안에 놓여져 손님들이 신선도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샌드위치 주문은 아무리 바쁜 시간에라도 종업원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는 것처럼 고기 속을 넣은 빵이 옆 단계로 착착 넘어가게 만든 것이다. 한 사람이 빵과 그 속에 들어갈 육류 주문을 받아 집어넣어 옆 사람에게 넘기면 이를 받아 양상추, 피망 등 야채 주문을 받아 완성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그래서 지금도 서브웨이 점포에 가면 가장 바쁜 점심시간이라 하더라도 주문받는 직원 두 사람과 계산대 한 사람 등 종업원 세 사람으로 가게가 돌아가는 걸 볼 수 있다. 저렴한 초기비용에다 인건비 부담도 적어 프랜차이즈 점주들이 좋아할 만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셈이다.

 드루카 회장은 1983년부터는 각 매장에서 직접 빵을 구워 내 손님에게 서비스하도록 만들었다. 초기에는 프랜차이즈 지점들이 본부에서 가까운 곳에 개설돼 직접 빵을 배달할 수 있었지만, 점점 지역이 확산되면서 이 작업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드루카 회장은 ‘서브웨이에 가면 언제나 갓 구운 빵으로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다’는 인식을 고객들에게 심어 주길 원했다.

 종업원 교육을 시킬 때에도 이 점을 중시했다. 빵은 언제나 따끈따끈하게 오븐에서 구워 내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서브웨이가 다른 프랜차이즈와 다르게 특화된 부분이 빵과 야채였기 때문에, 이 사항은 지금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프랜차이즈 후발업체인 퀴즈노(Quizno)도 이를 벤치마킹해 야채를 넣은 따뜻한 빵을 팔고는 있지만, 서브웨이만큼 풍성하지는 않다.

 1987년 서브웨이의 점포 수는 1000개를 넘어섰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93년 한 해에만 서브웨이는 1100개 점포를 새로 개설했다. 같은 해 맥도널드는 800개를 여는 데 그쳤다. 1998년 드디어 미국에 1만번째 점포가 들어섰고, 2001년에는 미국 내 맥도널드 점포 수를 능가하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렇게 서브웨이가 외형을 키워 나가자 증권회사들이 “기업공개를 하라”고 러브콜을 보내왔지만, 심사숙고한 끝에 증시에 상장한다는 계획을 접어 버렸다. <비즈니스위크>지와의 인터뷰에서 드루카 회장은 “서브웨이가 어떤 전략을 세우고 발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 외부 사람들(주주)이 얼마나 협조할 것 같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업공개는 득보다 실이 많겠더라고요”라며, 앞으로도 비상장기업으로 서브웨이를 운영할 방침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드루카 회장이 늘 칭찬만 듣고 승승장구했던 건 아니다. 1998년 경제주간지 <포츈>지는 ‘왜 서브웨이가 프랜차이즈 업계의 골칫덩이가 됐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서브웨이가 점주들의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매출하락을 경험한 일부 서브웨이 프랜차이즈 점주들이 “왜 기존 점포와 가까운 거리에 새 점포를 내줬느냐”며 소송을 냈던 것이다. 하지만 미연방거래위원회(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와 유사한 조직)는 서브웨이의 손을 들어 주었다. 소송전이 일단락된 뒤 드루카 회장은 어느 잡지와 어느 인터뷰에서 “프랜차이즈 점주들의 기대치가 높았던 것 같다. 단기간에 승부를 보려던 일부 점주들이 참지 못하고 소송을 냈다”고 회상했다. 서브웨이를 상대로 제기된 소송에 단 한 건도 패소하지 않은 데서도 드러나듯이, 서브웨이의 전략과 훈련 매뉴얼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현재도 매년 약 13만건의 프랜차이즈 의뢰가 들어오고, 이 가운데 25% 정도는 실제 점포 개설로 이어지고 있다.

 드루카 회장이 이런 어려움과 난관을 묵묵히 견뎌내고 창업 30년이 지났을 때,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미국 매스컴에서 유명해진 ‘자레드 스토리’가 그것이다.

 인디애나주립대학 3학년생 자레드 포글(Jared Fogle)씨는 몸무게가 200㎏을 웃돌아 늘 다이어트 때문에 고민하던 사람이다. 1998년 어느 날 동네 서브웨이 가게에서 ‘영양분석서’를 만나기 전까지 다이어트란 다이어트는 안 해본 게 없을 정도였다.

 포글씨가 만났던 ‘영양분석서’란 1996년 플로리다 주의 한 서브웨이 지점에서 만든 지역광고에서 비롯한다. 서브웨이 샌드위치 7종류에는 단 6그램의 지방만 들어 있다는 이른바 ‘7 Subs-Under 6’라는 제목의 전단지를 돌려 호평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드루카 회장이 전 체인 차원으로 이 마케팅을 확대했다. 이로부터 1년여 만에 포글씨의 수중에까지 그 내용이 들어온 것이다.

 매일 학교를 오가면서 서브웨이 레스토랑을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심각하게 메뉴판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포글씨는, 어느 날 방문한 서브웨이에서 무심코 ‘7 Subs-Under 6’라는 광고를 보고 새로운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된다. 이후 1년간 그는 15cm 길이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30cm짜리 샌드위치는 저녁식사로 때우며 버텼고, 놀랍게도 1년이 지난 1999년 3월 그는 건강을 유지한 채 몸무게를 91㎏까지 감량하는 데 성공한다. 1년 가까이 다른 음식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직 서브웨이의 샌드위치로만 연명하며 규칙적으로 운동을 지속한 끝에 무려 100㎏ 이상을 줄였던 것이다.

 포글씨는 이후 ‘서브웨이 전도사’로 불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서브웨이의 TV광고에 3년 연속 출연한 데 이어 미국 전역을 돌며 3만여명의 학생들에게 ‘영양다이어트’ 방법을 전파했다. 미국의 유명 토크쇼인 <오프라윈프리쇼>와 <래리킹라이브>에도 출연, 돈 안 들이고 서브웨이를 광고해 줬다.  유명인사가 아닌 일반인 자레드 포글씨가 토크쇼에 출연해 “서브웨이는 내 생명을 구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엇으로도 이 은혜를 갚을 수 없다”라고 발언하자 매출은 급속도로 증가했다.

 포글씨 효과로 인해 서브웨이의 2000년 매출은 전년도에 비해 19%나 급증하는 신기록을 세운다. 패스트푸드 업계의 연평균 성장률이 4%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드루카 회장이 엄청난 행운을 만난 셈이다.

 여기에다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 몰아닥친 ‘애킨스다이어트(일명 황제다이어트)’바람도 서브웨이의 확대·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애초부터 ‘저칼로리-저지방-저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을 짰던 서브웨이는 탄수화물 함량이 적은 랩 요리를 몇 가지 추가하는 선에서 ‘애킨스다이어트’의 커다란 물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앞서 얘기한 ‘7 Sub-Under 6’이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까지 버거킹, 맥도널드 등 경쟁 패스트푸드 업체들이 ‘저탄수화물(Low-Carb)’ 마케팅 전략을 눈물겹게 펼쳐야 했던 데 반해 서브웨이는 그냥 하던 일만 계속해도 저절로 손님들이 몰렸던 것이다.  심지어 버거킹은 대표 햄버거 메뉴에서 고기를 덮는 빵을 없애는 일까지 해야 했다.

 드루카 회장은 2001년 초 <선데이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10여년 동안 성인들뿐 아니라 어린이 비만에 관한 우려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서브웨이 샌드위치는 설립 초기부터 훌륭한 다이어트 식품으로 자리잡았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드루카 회장은 소송에 시달리면서 상향식 커뮤니케이션 방식보다는 각 프랜차이즈 점주로부터 활발한 의견개진을 받는 정책을 강화했다. 이는 프랜차이즈를 시작할 때부터 지킨 원칙이지만 소송전을 마무리한 이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보통 일반적인 경우 프랜차이즈 본부에서 일방적으로 지시사항을 내려 보내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진보적이다. 그는 최소한 4개월에 한 번씩은 점주 대표들이 포함된 어드바이저 그룹 회의를 가진다. 어드바이저 그룹에는 대표들 외에도 구매담당 임원, 해외 프랜차이즈 본부장 등이 참석해 2만여 점포주들의 의견을 청취한다.

 18세에 창업해 대성공을 이뤘지만, 여전히 드루카 회장은 현업을 사랑하는 창업자 겸 CEO다. 지금도 수시로 전국의 서브웨이 매장을 불쑥 방문하곤 한다. 종업원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문하는 대로 샌드위치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름대로 점포의 운영 상황을 가늠하기도 한다. 한번은 플로리다 주 로더데일 시를 지나다 차에서 갑자기 내려 ‘세놓음’이라는 간판을 뽑아 버린 일화도 전해진다. 그곳이 서브웨이 점포가 들어서기 적합한 곳이란 판단이 서자마자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까 봐 그랬던 것이다. 드루카 회장이 직접 고른 이 로더데일 시의 점포는 미국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성장한 점포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프랜차이즈 점주들이 서브웨이 성공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앙트레프레너>지와 인터뷰에서 그는 서브웨이의 성공요인에 대해 “프랜차이즈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맹점주들이 모회사를 성장시키는 엔진임을 절실하게 깨달아야 한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서브웨이의 발전에 헌신적으로 뛰어들어 전체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어 줬다”고 감사를 표했다.

 드루카 회장은 경영상 중요한 목표를 구체적인 숫자로 표현해 구성원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하는 경영자다. 예를 들어 “2005년까지 모든 미국 국민이 최소 주당 50센트를 서브웨이 매장에서 쓰게 하자(2000년 첫 임원회의)”라든지, “앞으로 12년 안에 25배의 점포를 내야 한다(1982년 말 임원회의)”라는 식이다.

 그래서 그의 다음 목표 역시 구체적인 숫자로 표현된다. ‘오는 2050년까지 전 세계에 10만개의 점포를 개설한다’는 것이 드루카 회장의 꿈이다. 드루카 회장은 <아메리칸웨이>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40여년간 이 업종에 종사하고 있지만 여전히 배울 게 많다”고 말했다. 히딩크 감독 버전으로 바꾸면 드루카 회장은 “여전히 나는 배고프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