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이 처음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추진한 때는 YS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환위기를 코앞에 둔 1997년 첫 FTA체결 대상국으로 칠레가 부각됐다. 한국 입장에서 지구 반대쪽에 위치해 있고, 국제통상 무대에서 경쟁상품이 많지 않은 칠레와 FTA를 체결하면 국내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칠레와의 협정은 일종의 맛보기, 시험용 FTA인 셈이다. 또 칠레는 남미 국가 중 FTA를 활발히 추진하고 있고, 비교적 열린 자세로 통상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한국 FTA 첫 관문, 한-칠레 FTA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으로 구성된 남미공동시장(MERCOSUR)을 공략하기 위한 교두보로서도 칠레의 가치는 상당했다. 1998년 한국정부는 대외경제조정위원회를 열어 첫 대상국으로 칠레를 공식 선정했다.

 1998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칠레 정상이 만나 FTA 추진에 합의함에 따라 양국간 FTA 협상은 본 궤도에 오른다.

 1999년 12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6차례 협상을 거치는 동안, 한국의 농민단체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최종 협정문은 성수기 포도를 자유화 대상에서 제외하고, 민감 품목을 5~10년 후에 개방하는 등 우리에게 상당히 유리한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농민단체 등 개방 반대론자의 반발은 거셌다. 칠레가 남미에서 새로 떠오르는 농업강국이라서 FTA가 발효되면 한국 농민에게 피해를 줄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2003년 2월 협정문에 정식 서명하긴 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국회의 비준동의가 바로 큰 산이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과연 FTA를 체결할 요건을 갖췄는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이 국가 전체를 위해 판단할 수 있는가, 피해농민 보상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가 등등….

 한국은 국회 비준동의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FTA를 비롯한 통상문제는 외국과의 협상이 아니라 국내 문제, 즉 국내 이해관계자로부터 합의를 이끌어 내는 능력의 문제라는 걸 절감했다. 2003년 7월 국회에 제출된 한-칠레 FTA 비준동의안 처리는 해를 넘겨 2004년 2월 초까지 세 차례나 무산됐다.

오랜 산고 끝에 2004년 2월16일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비준동의안이 제출되고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 걸린 7개월 동안에 많은 국내 갈등이 초래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한국이 적극적으로 국제통상무대에 나서기 위해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 기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가 83%에 이르고, 농민 피해를 보상해야 했지만, 자유무역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인식도 이때 확산됐다.

 2004년 4월 한-칠레 FTA가 발효된 후 1년의 성적표는 양호했다. 한국은 1년 사이 전자제품 등 공산품 위주로 대(對)칠레 수출을 37.7% 늘렸고, 칠레도 농산물과 원자재 중심으로 대(對)한국 수출을 77.9% 증가시켰다. 한-칠레 FTA가 갖는 성과는 무엇보다 첫 FTA를 체결함으로써, 한국이 국제통상무대에서 FTA 체결에 적극 나설 자신감과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동시다발 FTA 체결 추진

 2004년 1월 한-칠레 FTA 국회 비준동의안이 지연되고 있을 때,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칠레와 FTA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다른 어떤 나라와도 FTA를 체결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이는 한-칠레 FTA 체결이 동시다발적으로 FTA 체결을 추진하는 동력이라는 의미도 된다. 정부는 2004년 초 FTA 추진 로드맵(Road Map)에 따라 FTA 체결이 유망한 20개 국가와 동시다발적으로 FTA를 추진키로 했다.

 FTA 추진 대상국가는 싱가포르, 캐나다, 중국, 일본, 아세안(ASEAN), 메르코수르( MERCOSUR, 남미공동시장),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멕시코 등이다.

 그 첫 발은 한-싱가포르 FTA. 싱가포르와는 2003년 10월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 FTA 체결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하고, 2004년 초 협상을 시작해 그 해 11월 협상을 타결시켰다.

 한-싱가포르 FTA 체결에는 사실상 크게 걸림돌이 없었다. 싱가포르가 도시국가인 덕분에 한국이 가장 민감해 하는 농업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생산제품을 한국산이라고 표기할 수 있도록 원산지 규정에 대한 합의도 수월하게 이끌어 냈다. 한-싱가포르 FTA는 올 4월 확정한 협정 문안을 올해 안으로 발효할 전망이다.

 유럽자유무역연합(EFTA)과의 FTA도 걸림돌이 거의 없는 협상이다. EFTA는 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쉬타인 등 4개국으로 구성된 경제공동체로, 한국의 20위 교역 상대국이며, 우리나라와 연간 교역하는 규모(2004년 기준)는 27억달러 수준이다. 이들 국가와 한국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양측간 시장자유화가 국내시장에 미칠 영향이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과 EFTA 간 FTA 체결 협상은 올 1월 시작되어 9월에 협정문에 대한 가서명까지 마친 상태다. 한-EFTA FTA는 한국이 선진국 경제블록과 체결하는 첫 FTA라는 점 외에도 유럽국가와 처음 체결하는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의미도 눈길을 끈다.

 싱가포르 및 EFTA와 체결한 FTA가 비교적 손쉬웠던 것은, 그만큼 이들 국가가 한국의 교역 상대국으로서 중요도가 떨어진다는 뜻도 된다. 서로 민감한 품목이 적은 탓에 협상을 일사천리로 진행했고, 시장개방의 폭도 컸다. 공산품과 농산물을 가리지 않고 거의 100%에 육박하는 품목을 개방하기로 해, ‘폭넓은  자유화’라는 우리 정부의 FTA 체결 목표에도 부합했다.

 EFTA와 FTA 협상을 타결한 후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2007년까지 최대 50개 국가와 FTA를 체결하겠다는 야심 넘치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캐나다와의 FTA 체결 협상도 순항하고 있다. 양국은 올 7월 FTA 협상을 공식 개시하기로 합의하고, 상품과 서비스, 투자, 지적재산권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폭넓은 자유화를 이루는 목표도 공유했다.

 두 나라는 2006년 하반기에 FTA 협상을 타결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캐나다와의 FTA를 체결하면 현재 55억달러인 양국간 교역액이 장기적으로 100억달러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 자동차·조선·철강 등의 대캐나다 수출이 늘고, 캐나다로부터 쇠고기·제지원료·석탄 등의 수입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캐나다 FTA 협상에 포함된 상호 자격인정에 따라 한국의 의사, 건축사 등이 현지 자격시험을 거치지 않고 캐나다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아직은 먼 멕시코, 메르코수르, 아세안

 2007년까지 최대 50개국과 FTA를 체결하겠다는 정부의 야심은, 야심에만 그칠 가능성이 짙은 편이다. 우리가 현재 체결을 추진하려는 FTA 대상국은 EFTA, 싱가포르, 캐나다 등과는 협상 여건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등은 FTA를 체결해도 양국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지만, 멕시코, 아세안, 중국, 일본 등은 양국의 경제구조를 뒤바꿀 만큼 파괴력이 크다.

 멕시코와 FTA 체결 시도를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멕시코는 2000년  이전에 한국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국내 농업에 피해를 줄까 봐 멕시코가 내민 손을 외면했다. 그래서 농업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작아져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결국 멕시코는 아시아에서 첫 FTA 체결 대상으로 일본을 선정해 버렸다.

 올 들어 한-멕시코 경제관계 강화를 위한 전문가그룹 회의가 잇달아 열리고 있지만, 양국간 FTA가 조만간 체결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 때의 현지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당시 멕시코정부 당국자나 기업인들은 “한국과 FTA를 체결한다고 해서 한국의 대(對)멕시코 투자가 늘 것 같지도 않고, 한국 공산품이 밀려오면 멕시코 산업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 같은 인식이 최근까지 크게 바뀌지 않은 데다, 한국이 농업에 민감하다는 점도 양국간 FTA 체결에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멕시코가 한국에 수출할 만한 상품 중 상당수는 농산품인 까닭이다.

 아세안과의 FTA 체결 협상은 정부가 ‘오버(over)’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안으로 상품 분야 협정을 타결하고, 2006년 말까지 투자 및 서비스 협정을 체결한다는 우리 정부의 목표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얘기다.

FTA 체결 협상은 일반적으로 상품, 서비스, 투자, 분쟁해결 등 모든 분야를 일괄 타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한-아세안 FTA 협상은 기본협정, 상품 분야 협정, 서비스 및 투자협정 등 각각의 협정을 단계적으로 타결하고 발효시키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지난 9월 외교통상부는 한국와 아세안 간 FTA 체결 협상이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고 밝혔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달라진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부 당국자는 “협상 진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올해 말까지 상품 분야 협정을 타결한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할 것 같다.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어 분위기 반전을 위해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는 식으로 언론에 보도자료를 낸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 한국-아세안 FTA는 상품자유화의 시기와 품목 범위, 민감품목 보호방안 등에 대해 이견을 보이고 있다. 이는 FTA 체결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한국정부는 2004년 11월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이 모인 메르코수르와 무역협정(TA)에 관한 공동연구를 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메르코수르와 협상을 시작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한·일 FTA, 한·미 FTA를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한일 FTA 협상의 시작은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체결협상을 하기로 합의하면서부터다.

 양국 정상은 FTA 타결 시한을 2005년 말까지로 정했다. 그러나 한·일 FTA 협상은 장기 표류할 위기에 빠졌다.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농수산물시장 개방 폭에 대한 양국간 이견 때문이다. 한국은 시장을 많이 열자는 입장인 반면, 일본은 절반 정도만 개방하자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은 공산품에 대해 99% 개방을 한국에 요구하면서, 농수산물은 51%만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한국은 양국이 공산품 95%, 농수산물 90%를 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포괄적인 무역자유화 원칙에 비춰 볼 때 일본의 주장은 터무니없다는 게 우리 정부의 생각이다. 이 같은 견해 차이로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한국과 일본 당국자들의 감정까지 악화됐다. 올해 불거진 독도문제도 양국간 FTA 협상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일본과는 장기 교착, 중국·미국과는 걸음 수준

 한국 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일본의 통상정책은 경제대국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일본이 자국 내 이해집단에 얽매여 유치한 꼼수로 일관하고 있다”며, 일본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한국이 입장 변화를 보이지 않아 한·일 FTA가 표류하고 있다며 화살을 한국에 돌리고 있다. 올 6월 제주에서 열릴 것으로 기대했던 한·일 통상장관회의가 무산됐을 때도 일본 외무성과 한국 외교통상부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악화된 감정을 드러냈다. 한·일 FTA 체결은 당분간 물 건너갔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다.

 미국과의 FTA는 정식 협상은 고사하고, 협상 시작 전 단계인 민간연구를 시작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한·미 FTA 협상의 걸림돌은 한국의 스크린쿼터와 쇠고기 수입 문제가 첫 손에 꼽힌다.

 미국 정부와 재계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이 미국과 FTA 협상을 시작하려면 먼저 스크린쿼터부터 축소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해야 한다”고 밝혀 왔다.

 FTA는 무역자유화를 통해 두 나라를 동일 경제권으로 묶는 협정이다. FTA의 전 단계 또는 FTA를 구성하는 작은 분야 중 하나가 투자자유화다. 한국은 스크린쿼터 문제로 미국과 양자투자협정(BIT)조차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 당국자와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할 때, 그들은 “스크린쿼터에 묶여 BIT조차 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FTA 협상이냐”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외교통상부는 “올해 안에 한·미 FTA 협상 개시를 합의하지 못하면 현실적으로 한·미 FTA는 매우 어려워진다”고 밝혔다. 미국 행정부가 의회로부터 부여받은 ‘무역협정 신속협상권’이 2007년 만료되기 때문이다. FTA 협상이 적어도 1년 6개월 남짓 걸리므로, 올해 말까지 FTA협상 개시에 합의해야 2007년 6월 이전에 미국 행정부과 협상을 타결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는 11월 부산 APEC 정상회의 때 열릴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간 FTA 협상 개시에 합의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스크린쿼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한·미 FTA 협상 개시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중국과의 FTA 협상도 걸음마를 겨우 뗀 수준이다. 올 3월 양국이 FTA 체결 협상을 추진하기에 앞서 민간 차원의 공동연구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FTA 체결에 따라 값싼 중국산 농산물과 공산품이 한국에 밀려들 때 그 충격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중국과의 FTA는 급하게 서두를 사안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한·중·일 FTA까지 제안하고 있다. 우리가 일본 또는 중국과 FTA를 체결하든, 장기적으로 한·중·일 FTA를 체결하든 국내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FTA 체결에 따라 한국이 산업구조를 완전히 재편해야 할 정도다.

 자유무역협정의 확산과 경제블록화, 무역자유화는 세계통상 질서의 큰 흐름이다. 한·중·일 FTA가 체결되는 일본과 중국은 GDP가 0.03~1.05% 성장하지만, 한국은 1.29~4.73% 상승할 것이라는 한국조세연구원의 분석도 나와 있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이 FTA 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추진 중인 FTA는 하나같이 만만치 않고 걸림돌 투성이다. 한국이 칠레, 싱가포르, EFTA 등과 FTA를 체결한 것은 크게 자랑할 만한 성과가 아니다. 한국은 세계 FTA 체결 무대에 막 등장했으며, 그 동안의 성과보다는 눈앞에 놓인 과제가 몇십 배, 몇백 배 크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