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갑작스레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난 안철수(44) 안철수연구소 전 사장. 최근 장흥순 터보테크 전 사장을 비롯해 벤처 1세대들이 분식회계 혐의로 불명예 퇴임한 것을 지켜보면 안 전 사장의 ‘아름다운 퇴장’이 더욱 빛난다. 그는 요즘 미국에서 어떻게 지낼까. 이메일을 통해 그의 최근 근황을 들었다.
 사 출신의 컴퓨터프로그래머에서 CEO로 변신을 거듭하며 벤처업계 스타로 주목을 받았던 안철수 전 사장. 그는 창사 10주년인 지난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홀연히 미국 유학행을 택했다. 요즘 그는 떠나면서 말한 대로 공부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전했다.

 안 전 사장은 대표이사직을 사임한 3월 말에 가족이 있는 워싱턴 주 시애틀로 갔다가, 지난 8월 말에 캘리포니아 주 팔로알토로 이사를 했다. 팔로알토는 스탠포드대학 바로 옆에 있는 도시다(안씨 가족이 미국으로 간 것은 지난 2002년, 그도 3년간 기러기아빠였다).

 안씨가 여기로 이사한 주된 이유는 그의 아내인 김미경씨(43)가 워싱턴주립대학교 법대를 졸업하면서 스탠포드 법대의 생명과학 및 법 프로그램(Bioscience and Law program)의 연구원(fellow)으로 오게 됐기 때문이다.  김씨가 공부하는 생명과학 및 법 프로그램은 생명과학과 법학을 병행해서 의학과 법 양쪽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분야이며, 지금은 주로 생명과학기술(Biotechnology)의 지적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안씨는 그 전까지는 9월부터 워싱턴주립대학에서 방문학자(visiting scholar)를 시작하기로 돼 있었지만, 아내의 직장이 스탠포드대로 결정되면서 옮기게 됐다.

 그는 미국에서 가족들과 생활한 지 10개월이 돼 가지만, 아직 여행 한 번 못 갔다고 한다. 그의 아내도 계속 공부하고 있고, 딸도 11학년이어서 1년 반 후면 대학을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여행을 가 보거나 놀러간 적 없이 가족과 함께 대학도서관이나 시립도서관으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다니고 있습니다. 주말에도 평일과 마찬가지로 함께 도서관을 다닙니다.”

 그가 도서관에서 공부만 한다는 소문은 미국 교민사회에서도 화젯거리인 모양이다. 그는 미국에서도 관심 있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얼마 전 버클리대학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참석했던 한국인 교수가 워싱턴주립대에 방문학자로 있는 자기 동료가, 안씨가 아내와 함께 매일같이 법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이 한국인 학자들 사이에서 화제라면서 구경 오라고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이번이 두 번째인 미국유학길이 첫 유학 때보다는 여유 있다고 말했다. 첫 유학 때는 회사를 설립하고 6개월 만에 간 것이기도 했지만, 경영에 대해 백지상태에서 시작한 것이라 매우 힘들었다. 더욱이 회사 경영과 공부를 병행해야 했기에 낮에는 공부를, 밤에는 한국이 낮 시간이라 이메일 경영을 하느라 이틀에 하루밖에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고, 10년간의 경영경험을 쌓은 후라 조금은 성숙한 시각으로, 그리고 조금은 여유 있게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벤처캐피탈에서 일 배우는 중”

 안씨는 현재 대학에서 몇 과목을 수강하면서 동시에 벤처캐피탈 회사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미국 대학들 중 좋은 대학들은 9월부터 시작하는 학기는 보통 1, 2월 정도면 서류가 마감이 된다. 안씨는 지난 3월 말에 CEO를 그만뒀기 때문에 내년 9월부터 시작하는 과정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또 이와 동시에 스탠포드대학에서는 학위과정에 들어가기 전이라도 원하는 과목을 듣고 학점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기 때문에, 듣고 싶은 과목들을 신청해서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실무에 대한 감각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벤처캐피탈 회사에 EIR(Entrepreneur in residence)로 일을 배우고 있다. 벤처캐피탈에서는 들어오는 사업 계획서들을 통해서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하는 최신 동향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제대로 된 투자 프로세스를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그는 2년 정도 후에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다.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뭘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될 수도 있겠죠.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새로운 창업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또 만약에 회사가 필요로 한다면, 연구소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적성에 맞다면 벤처캐피탈리스트가 될 수도 있을 거고요.”

 이런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둔 것은 장기계획을 세우는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10년 전에 의사를 그만두고 안연구소를 창업하면서부터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나도 나이가 들면 아버지처럼 백발이 성성하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살다 보니 오히려 의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매순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산다면, 그 이후에 할 일이 정해진다는 신념으로 살게 됐다고 한다. 지금도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면 2년 정도 후에는 네 가지 길 중에서 어느 길이 최선의 길인지 마음이 정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국내 IT 산업과 벤처를 떠나면서 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도 커졌다. 물론 지난 10개월 만에 생긴 건 아니다. 아마 지난 10년간의 벤처경영에서 이미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한국에서 벤처기업이 성공하는 확률이 낮은 이유를 세 가지 정도 꼽았다. 첫째는 벤처기업가의 지식 또는 자질 부족, 둘째는 왜곡된 시장구조, 셋째는 벤처캐피탈의 역할 축소를 들었다.

 벤처기업가는 기본적인 경영 마인드나 경영을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한 경우에는 당연히 성장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중소벤처기업이 대기업의 사업 파트너가 아니라 하청업체로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는 중소벤처기업들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성장하기는 힘들다고 분석했다.

 그는 벤처캐피탈의 역할도 지금보다는 확대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벤처기업가의 아이디어나 기술이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으로 탄생하기 위해서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벤처 캐피탈이라는 것. 자금을 조달해 줄 뿐만 아니라, 벤처 캐피탈리스트가 기술에 대한 전문성이나 직접적인 경영의 경험을 가지고 적절한 관리와 조언을 해주면서 기업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바람직한 벤처캐피탈의 역할이라고 조언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인 중에서 (제가) 시장구조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벤처기업가들에 대한 교육과 벤처캐피탈의 새로운 역할 정립에는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가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벤처캐피탈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이유다.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하고, 10년을 몸 바쳐 일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움은 별로 없단다. 다만 이사회 의장으로서 선진적인 지배구조를 만들어 글로벌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더욱 굳건한 경영 체계를 다지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