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전’과 ‘대규모 기업 합병’을 성공적인 경영의 증거로 자주 내세우는 북미의 업계 분위기에서 ‘저속 성장’과 ‘성실성’을 무기로 성공한 사업가가 있어 화제다. 이 사업가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현업에서 60여년이나 뛰고 있다. 닭고기샌드위치 하나로 식당을 열어 지금까지 한눈 팔지 않고 끈기 있게 달려온 억만장자를 만나 보자.
 "요식업은 신성한 사업입니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브스지>와의 인터뷰에서 트루엣 캐티(84, S. Truett Cathy) 칙필-에이(Chick-fil-A)레스토랑  회장은 이같이 말했다. 자신이 요식업에 뛰어든 것이 ‘일종의 운명’이라며, “손님들을 섬기는 것이 내게는 종교적 사역(使役) 같았다”고 밝혔다.

 그는 조그만 식당을 20여년 경영한 뒤인 1967년 칙필-에이를 창업해 지금까지 대표이사 회장 겸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으며, 팔순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손님들과 대면하는 일을 즐기는 사업가다. 현업에서 뛰고 있는 미국의 경영자 가운데서는 드물게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인물이기도 하다.

 캐티 회장은 미국의 재계에서 집념과 인내심, 성실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창업 이후 지금까지 곁눈질하지 않고 ‘닭가슴살샌드위치’라는 한 가지 품목에만 매달린 것은 물론, ‘더디 가더라도 사람은 잃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또 ‘일요일 휴무’라는 전통을 첫 창업 이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칙필-에이는 창업 40여년 만에 점포 수 1,200개를 보유하고 매출액 연 15억달러(약 1조8000억원)를 넘어섰으며, 캐티 회장의 재산도 2005년 6월 말 현재 9억달러(약 1조원)를 기록, <포브스지>가 매년 선정하는 ‘미국 내 400대 부자’의 반열에 올해 처음 올랐다. 첫 사업을 시작한 지 60여년 만인 팔순의 나이에 이룩한 성과다.

 캐티 회장은 1921년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 근교 이튼튼(Eatonton)이란 도시에서 7남매의 여섯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농부였는데, 희한하게도 캐티 회장은 어릴 때부터 ‘장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캐티 회장은 동네 아이들이 막 알파벳 공부를 시작할 나이인 여덟살 때 이미 뭔가를 팔러 다녔다. 이는 그의 부모님이 그가 어릴 때부터 하숙을 쳤던 일과 무관하지 않다. 항상 집에는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이 득시글거렸으니, 집에서 조용히 글자 공부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꼬마 트루엣은 이때 코카콜라 6병들이 한 세트를 25센트에 사서는 가가호호 방문, 한 병당 5센트를 받고 팔았다. 한 세트를 다 팔아야 5센트를 버는 셈이니 이익은 많지 않았지만, 여기서 재미를 붙인 꼬마 트루엣은 이 사업을 확대했다. 집 앞마당에 아예 음료수 판매대를 내고 동네 사람들에게 콜라 등을 판 것이다. 또 없는 시간을 쪼개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잡지를 팔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그가 열 살도 되기 전에 경험해 본 ‘사업’이었다.

 12살이 되자 소년 트루엣은 친구와 함께 신문배달을 시작하는데,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을 얻게 된다. 후에 그는 자서전에서 “독자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일이 참 즐거웠다. 또 그로 인해 이익을 올리는 일도 어린 나에게는 값진 경험이었다”고 회고했다. 말하자면 캐티 회장은 신문배달을 향후 사업경영의 훈련장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또 “신문배달에서 성공함으로써 내 사업을 언젠가는 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제조업보다는 식당이나 슈퍼마켓 등 서비스업이 더 취향에 맞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인생에서 확신을 갖되, 천천히

 하지만 이 꿈이 곧바로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갑자기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도 못했고, 어릴 때 장사하며 발휘했던 사교성도 잃어 학급에서 눈에 잘 띄지 않고 조용하게 지내는 날들이 반복됐다. 이렇게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때우듯 지내던 그에게 인생의 전기가 찾아온 것은 2학년(10학년) 때였다. 국어 수업의 숙제로 나폴레온 힐이란 사람이 쓴 <사고(思考)하면서 부유해져라>라는 책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업에 대한 꿈은 있었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신감을 잃었던 소년 트루엣은 이 책에서 저자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뭐든지 실패할 일만 생기게 된다”라는 구절을 접한 순간 전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이때의 감흥과 뒷날 사업을 꾸렸을 때의 경험을 합해 캐티 회장은 1988년 <성공하는 것이 실패하는 것보다 쉽다>란 책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

 여하튼 그 책을 읽고 난 후 그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진짜로 믿게 되었다. 졸업 후 잠깐 직장생활을 하다 군에 징집된 캐티 회장은 행정병으로 근무하다 1944년 소속 부대가 남태평양 전선으로 이동 명령을 받게 되면서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를 잡았지만, 갑자기 피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실제 전투에는 투입되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고, 동생과 함께 창업을 계획하던 캐티 회장은 간단한 메뉴를 기본으로 하는 식당을 열게 되었다. 식당부지와 자재, 식재료 등을 동생과 직접 동분서주하면서 구한 끝에 1946년 5월 ‘드와프 그릴(Dwarf Grill)’이란 이름의 간이식당을 마침내 열었다. 식당건물을 지을 자재가 부족해 휘어진 못을 다시 펴서 쓸 정도로 힘든 창업과정이었지만, 이를 묵묵히 이겨냈다. 탁자 4개와 카운터 10개 좌석으로 시작한 드와프 그릴은 후일 칙필-에이 창업의 밑거름이 된다.

 이 식당은 다른 창업가들이 흔히 하는 식으로 2호점, 3호점, 프랜차이즈 등으로 확대된 게 아니라, 20여년이 다 지나도록 그냥 그대로 자리도 옮기지 않고 똑같은 규모로 영업을 계속한다. 메뉴도 처음 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햄버거, 베이컨샌드위치 등 너덧 가지에 불과했다. 적자를 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이익을 올리는 식당도 아니었다. 그저 일요일을 제외한 엿새 동안 24시간 문을 열어놓고 손님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의 인생관이 ‘느리게 살자’였기 때문이다. 캐티 회장은 2000년 한 잡지의 인터뷰에서 “젊었을 때 인생의 큰 그림을 몇 가지 그린 게 있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인생에서 어떤 확신을 가지되 천천히 움직이자’였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한 등반가가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포스터를 집에 갖고 온 일이 있었는데, 이때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창업 20년이 지난 1966년이 되어서야 캐티 회장은 뭔가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구상한 새 메뉴는 어릴 적 어머니가 가끔 해주시던 요리에서 찾아내었다. 닭가슴살코기 요리가 그것이다.

 하도 오래 된 일이라 어머니가 하던 조리법이 잘 기억나지 않아 이것저것 시도해 보던 그에게 우연찮게 싼 닭고기 재료가 굴러들어왔다. 조리법을 연구하던 차에 한 양계장의 주인이 접촉을 해온 것이다. 굿브라더스라는 이름의 이 양계장은 항공사 기내식을 납품하던 곳으로, 납품용 고기를 가공하다 보면 잘게 썰어진 닭고기가 항상 부산물로 나오는 바람에 이를 처리하기 위해서 가까운 식당을 찾아다니다가 캐티 회장에게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직영점과 가맹점 장점 살려 새 관리제도 고안

 닭고기샌드위치를 구상하고 있던 캐티 회장은 마침 싸고 좋은 재료까지 저절로 굴러들어오자 본격적으로 메뉴개발에 나섰다. 드와프 그릴의 손님들에게 이 새 메뉴를 선보이고 반응을 기다렸는데, 예상대로 호평을 받았다.  캐티 회장은 이 메뉴만으로 새로운 식당을 차릴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1967년 캐티 회장은 애틀랜타의 그린브라이어 쇼핑몰에 칙필-에이라는 이름의 닭고기샌드위치 가게를 내게 된다.

 ‘Chick-fil-A’ 라는 특이한 상호는 그가 직접 작명했다. 캐티 회장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닭가슴살샌드위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궁리하다 쇠고기의 가장 좋은 부위를 필레(fillet : 허리 부위의 연한 안심살)라고 부르는 점에서 착안했다. 그래서 ‘닭고기 중 최고 부위 가슴살’이란 뜻으로 ‘Chick-fil’이라고 명명한 뒤 마지막에 ‘A’를 추가했다. 뭔가 고급스럽고 산뜻한 이미지를 준다고 그는 믿었다. 결과는 캐티 회장의 예상대로 되어 갔다.

 닭가슴살코기의 맛이 소비자를 사로잡은 데다가 따로 식탁을 마련하지 않아도 무방한 쇼핑몰에 들어간 덕분에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장사가 좀 된다 싶으니 이곳저곳에서 ‘프랜차이즈를 만들어라’, ‘2호점, 3호점을 빨리 내라’는 조언(?)들이 들려왔다. 당시만 해도 맥도날드가 창업 10년을 지나면서 체인점을 확대하고 있던 때여서, 이런 식의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 대한 관심이 더 한층 고조된 터였다.

 하지만 캐티 회장은 사세 확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드와프 그릴을 벗어나 다른 이름의 가게를 연 것만으로도 만족해 했다. 그래서 그는 프랜차이즈 대신 닭가슴살코기 샌드위치의 조리법을 알기 원하는 식당 주인들에게 비법을 전수하는 데 전념했다. 닭가슴살 조리법의 특허를 내고, 원하는 식당 주인들에게 로열티를 받고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식당 수가 50여 군데를 넘어서자, 품질관리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한두 군데 식당에 조리법을 가르칠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가입 식당이 늘어나자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버거워졌다. 게다가 식당 주인들이 칙필-에이의 종업원이 아니었기에 강제성이 없어 정확한 조리법을 꾸준히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색다른 문제에 부딪치게 되자, 드디어 캐티 회장은 사세 확대에 대해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꼼꼼하고 치밀한 캐티 회장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프랜차이즈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직영(直營)의 끈을 놓치지 않는 새로운 관리제도를 창안해 냈다.

 캐티 회장이 이때 고안해 낸 관리제도는 오퍼레이터(Operator) 제도이다. 캐티 회장은 조리법 전수 작업을 중단하고, 이 제도를 창안해 내고 가다듬는 데 최선을 다했다. 기존의 가맹점 제도와 직영 제도를 분석했다. 대개 가맹점을 모집해 공동상표를 쓰게 하고, 조리법과 종업원 관리교육만 실시할 경우에는 본사가 원하는 수준의 요리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위험성이 늘 존재한다. 반면 직영점으로만 운영할 경우 정확한 품질관리는 가능하겠지만, 효율이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캐티 회장은 양자의 단점을 없애고, 장점을 살린 오퍼레이터 제도를 고안해 낸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보통 칙필-에이는 쇼핑몰의 한 코너를 임대하게 되는데, 이때 기존의 종업원 가운데 성실한 사람을 골라 오퍼레이터로 지정한다. 이 오퍼레이터들이 점포를 재임대하는 형식으로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계약해지시 돌려받을 수 있는 보증금으로 5000달러를 내고 칙필-에이의 한 점포를 책임진다. 오퍼레이터들에게는 본사에서는 1년에 2만달러를 기본급으로 지급한다. 그리고 매출액의 15%는 본사가 가져가고, 나머지 이익금은 오퍼레이터와 반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다.



 배우자 고르는 심정으로 선발한 오퍼레이터 이직률 5% 미만

 본사로서는 안정적인 수익과 품질을 확보하는 한편, 개별 오퍼레이터들은 소액(보증금 5000달러)을 투자하고 월세만 부담하면 자기 가게처럼 운영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제도였다. 말하자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오퍼레이터 제도가 정착되면서 칙필-에이는 더 많은 점포를 열 수 있었다.  특히 캐티 회장은 주로 쇼핑몰에 입점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는 앞에서도 봤듯이 그만큼 고객들과 만나기 쉬울 뿐더러 굳이 자체적으로 손님용 좌석을 만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캐티 회장은 이 오퍼레이터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오랜 기간 공을 들였다. 첫 걸음을 내딛은 이후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퍼레이터 선정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캐티 회장이 “배우자를 고르는 심정으로 오퍼레이터를 선발했다”고 표현할 정도이다. 일단 한번 선정되고 나면 웬만한 결격사유가 없이는 계약을 취소하지 않았다. ‘우리 사전에 이혼은 불가’란 이야기다. 지난 2001년 자발적인 퇴사가 아니라 처음으로 본사에서 해고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 오퍼레이터가 본사 방침에 끊임없이 반항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칙필-에이의 연간 오퍼레이터 이직률은 5%를 넘지 않는다.

 또 각 점포의 경영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 오퍼레이터 한 사람당 한 점포만 경영하게 했다. 일반적인 프랜차이즈의 경우 한 사람이 두세 개씩 소유하는 경우가 많지만, 칙필-에이는 이를 피했다. 그 결과 지난해 말 현재 칙필-에이 오퍼레이터의 절반인 600여명이 10만 달러가 넘는 연봉을 받았다. 이 중에는 30만 달러를 집에 가져간 오퍼레이터들도 30여명에 달했다. 칙필-에이의 독특한 오퍼레이터 제도가 알려지면서 지원자가 쇄도, 지금도 월 평균 1000장의 이력서가 본사에 접수되고 있다.

 캐티 회장은 오퍼레이터들에게 장사만 잘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손님들을 섬기는 것은 물론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마인드를 항상 가질 것을 주문한다. 그래서 칙필-에이의 오퍼레이터들은 시간제 종업원들에게 때때로 멘토(Mentor) 역할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캐티 회장 역시 이 부분을 중시한다. 대부분 10대 청소년인 이들 시간제 종업원들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어떤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 자신이 어릴 때 부모보다는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이나 사회의 선배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시했다. 캐티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릴 적 주일학교 선생님이셨던 테오 애비 선생님은 내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내 인생의 모델이 된 셈이다”라고 강조한다.



 나눔의 철학 종업원에서 지역사회로까지

 캐티 회장은 또 종업원들 가운데 공부를 하고 싶지만,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난 1973년부터 ‘지도자 장학금 프로그램’이란 이름으로 대학진학을 원하는 종업원들에게 1000달러씩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캐티 회장은 학비를 전액 회사 측에서 지원해 주면, 이들이 나태해질까 봐 지역 대학과 제휴해 학년별로 장학금 지급액을 서로 다르게 조정한 것은 물론, 대학이 장학금 일부를 부담하도록 제도화시켰다. 이 방식은 1983년 애틀랜타의 베리대학과 공동으로 구축한 윈쉐이프센터(WinShape Center)를 통해 더욱 구체화됐다. 윈쉐이프 센터는 ‘개인을 변화시켜 최후의 승리자로 만든다(Shaping individuals to be winners)’라는 취지로 붙여진 명칭이다. 이렇게 해서 4년 동안 꾸준히 공부하는 종업원들에게는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종업원들에게 지급한 장학금만 지난해 말 현재 2000만달러(약 220억원)를 넘어서는 것으로 집계됐다. 

 캐티 회장의 이 같은 나눔의 철학은 지역사회로까지 이어져 ‘양부모 결연’ 사업도 시작하게 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부모를 여의거나 이혼 등으로 갈 곳을 잃은 아이들을 양부모가 되기 원하는 사람들과 연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양부모 결연’ 사업은 캐티 회장의 외동딸이 결혼 후 브라질에 선교사로 파송되면서 브라질에까지 이어졌다.

 캐티 회장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꾸준히 여러 가지 사업과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청교도적 마인드로 기업을 경영했기 때문이다. 그가 밝히는 기업경영의 최고목표는 “내가 가진 자원과 물질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사업이 아니므로, 이익 추구는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린다는 얘기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가게를 절대 열지 않는 전통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일요휴무’와 관련, 쇼핑몰 점주들이 때로 항의나 회유를 하기도 했지만,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1982년 한 쇼핑몰 주인이 캐티 회장에게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특별헌금을 할 테니 제발 문을 열어 달라”고 읍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캐티 회장은 “나는 12살 때부터 교회에 출석했고, 1주일에 최소한 하루는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옳다고 배웠다”며 버텼다.

 ‘일요휴무’가 도움이 된 부분도 있다고 그는 소개한다. 영적 성장을 원하고 가족들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손님들에게는 칙필-에이가 긍정적인 역할모델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와 함께 1주일에 하루쯤은 가정을 돌봐야 하는 주부들이나 일요일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을 종업원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연중무휴로 여는 식당에는 취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일요휴무에도 불구하고 칙필-에이는 ‘37년 연속 매출성장’이라는 대기록을 낳았다. 다른 체인식당과 비교해도 매출액 규모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칙필-에이는 현재 KFC에 이어 미국 내 2위 닭고기 전문 레스토랑으로 자리잡았다.

 꾸준하고 성실한 성장을 거듭해 왔지만 칙필-에이도 위기를 맞은 때가 있다. 1982년 미국을 휩쓴 불경기는 캐티 회장을 비껴가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는 늘 기회를 동반한다 하지 않았던가. 캐티 회장은 매출이 급감하는 위기를 ‘할인쿠폰 발행’을 통해 극복했다. 장사가 안 될 때 오히려 박리다매(薄利多賣)로 더 공격적 마케팅을 펼쳤던 것이다.

 1982년 위기를 극복하는 한해 동안 캐티 회장은 월급을 한푼도 가져가지 않았다. 종업원들의 임금을 깎는 대신 캐티 회장은 자신의 몫을 포기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CEO들이 캐티 회장처럼 하지는 않았다. 그는 후에 빌리 그래함 목사와의 대담에서 “요즘 너무나 많은 CEO들이 배가 침몰하려 할 때, 제일 먼저 달아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맨 마지막에 떠나야 하는데도 말입니다”라고 지적한 일이 있다.

 또 한 번의 위기는 캐티 회장의 나이 38세에 대장에 종양이 발견됐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였다. 그는 이때 죽음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행히 악성은 아니어서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인생의 의미와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건지에 대해 고민했다고 캐티 회장은 고백했다. 결국 그는 종양제거 수술 이후에 더욱더 영원한 가치를 향해 달리게 된 것이다.

 캐티 회장이 원칙을 중시하고 청교도적 마인드로 기업을 경영한다고 해서 딱딱하거나 고리타분한 노인은 결코 아니다. 그가 시도한 각종 이벤트에는 재치가 번득이고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1995년부터 시작된 ‘닭고기 많이 드세요(Eat Mor Chikin : 시선을 끌기 위해 철자법도 일부러 틀리게 표기함)’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미식축구경기장이나 농구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젖소 복장을 한 도우미들을 동원했고, TV광고에는 닭이나 닭고기는 나오지 않고 젖소 여러 마리만 출연해 계속 “닭고기 많이 드세요”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 캠페인이 인기를 모으면서 그는 같은 제목의 책도 썼다.

 캐티 회장은 지금까지 자서전과 경영 지침서, 그리고 가족에 관한 수필 등 4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 중 하나인 <닭고기 많이 드세요>에는 그의 인생관이 담긴 언명(言明)이 나온다. “우리는 매일매일 일상생활 속에서 타인들에게 우리의 시간, 물질, 사랑 등을 나눠 줄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그저 나눠 주는 일이 얼마나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그의 헌신과 봉사활동은 시작한 지 20여년이 지나자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됐다. 1982년 이후 ‘호레이쇼 알게상’ 등 각종 단체가 주는 상을 거의 매년 수상한 것은 물론 여러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캐티 회장의 인생을 살펴보면, 중국의 한 노인이 혼자서 삽을 들고 산을 떠서 옮기려 했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고사성어가 생각난다. 주위 사람이 다 비웃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해냈다는 우공처럼,  조용히 평생을 닭고기샌드위치 사업에 헌신한 그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모든 걸 이루려는 현대인들이 한번쯤 돌아봐야 할 교훈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