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정부의 부동산정책은 투기억제와 규제완화가 주기적으로 반복돼 왔다. IMF와 같이 경제가 침체된 국면에서는 경기부양을 목적으로 부동산도 활성화 정책을 내놓았지만, 그 결과 부동산시장이 경기활성화를 넘어 과열현상을 보이면 어김없이 투기억제책 등 규제 강화책이 발표됐다. 또 반대로 과도한 투기억제에 의해 경기가 경색국면을 보이면 부동산 관련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경기활성화를 도모했다.
 부가 직접적으로 부동산시장에 개입한 역사는 40여년에 이른다. 최근 참여정부의 8·31부동산 종합대책까지 지금까지 정부가 발표한 부동산대책은 약 44건으로, 이 가운데 26건은 투기억제를, 18건은 건설 및 부동산경기 활성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매년 1건 이상의 투기억제 정책이 발표됐으며, 2년에 한 번 정도 활성화 대책을 내놓았던 것이다.



 1967년 처음 부동산 억제정책 발표

 정부에 최초의 부동산대책은 1967년 11월29일 발표된 ‘부동산 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특별조치법)이다.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을 조세로 흡수해 기업의 생산자금으로 전환한다는 게 그 목적이었다.

 이 특별조치법이 발표될 당시의 한국경제는 경제개발5개년계획 추진으로 도시인구 증가와 각종 개발사업 및 사회 간접자본 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공사로 주변지역의 토지이용도가 높아지고 고성장에 따른 개인소득이 증가하면서 여유자금이 개발 주변지역으로 몰렸다. 즉,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복부인’으로 불리는 일부 투기꾼들의 부동산투자로 인한 ‘대박’ 소문이 떠돌면서 분위기에 편승한 투기수요까지 늘어나 사행심리에 따른 부동산투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가 부동산시장에 개입해 내놓은 첫 번째 대책이 바로 특별조치법이었다. 그러나 특별조치법의 효력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개발연대로 대별되는 1970년대 말까지의 박정희정부 시절은 고성장 고(高)인플레이션 시대였다. 경제정책의 우선 목표가 양적 고도성장에 초점이 맞춰졌고, 이를 위해 생산요소의 동원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요소가격 상승도 불가피했다. 부동산시장 역시 이를 반영해 높은 가격상승률을 기록했으며, 도시화·산업화에 따른 신도시 개발 및 고속도로 건설로 지가가 급등하면서 부동산문제는 급기야 사회문제로 그 깊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박정희정부 시절 연평균 지가상승률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1975~1979년. 이 기간 동안 연평균 지가상승률은 30.1%로, 같은 기간 소비자 물가상승률(16.6%)은 물론 GDP 성장률 27.1%를 초과하는 과열양상을 보였다. 특히 1978년에는 경기호황에 힘입어 5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10대 국회의원 선거, 제3차 에너지파동, 중동건설 붐으로 외화가 대량 유입되고, 중화학공업 지원을 위한 통화 공급이 확대되면서 자금이 부동산시장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1978년 이른바 ‘8·8대책’으로 불리는 ‘부동산투기 억제 및 지가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은 이런 상황에서 발표된 부동산대책이었다.

 박재룡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에 따르면 박정희정부의 부동산정책은 가격안정 및 투기억제라는 방향에서 추진됐다고 한다. 초기에는 간접적 시장개입이라는 형태를 취했지만 후기에는 거래규제와 같은 직접 개입으로 전환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즉 1970년대 초까지는 정책의 초점이 경제 전반의 양적 성장에 맞춰져 있었기에, 부동산문제에 대한 정책은 전반적인 경제정책의 범주 안에서 도입해 운영했던 것이다. 반면 1970년대 중반 이후 부동산 가격급등에 따라 경제·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파생하면서 이에 초점을 맞춘 별도의 정책을 시행했다.

 구체적으로는 양도소득세율 인상 등 자본이득 회수를 위한 과세정책을 추진했으며, 토지거래신고 및 허가제 등 투기적 토지거래를 사전에 제한하려는 규제수단의 적극 도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투기적 거래로 규정한 일부 부동산에 대해서는 선별적으로 세제, 금융부담 등을 가중시키는 정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 토지개발공사 설립을 통해 공급확대 정책도 추진했다는 특징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정책은 발표와 함께 집행되지 못하고 사후에 다시 보완하는 등 혼선을 빚기도 했다. 1978년 8·8조치의 경우 시행하려던 중개업소의 허가제나 양도세율 인상 등은 당시 집행하지 못하고, 나중에 시차를 두고 시행했던 대표적 사례이다. 다만 부동산시장의 가격안정을 위한 강력한 정부의 개입으로 이후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즉 부동산시장은 투기로 인해 쉽게 시장왜곡이 발생하기 때문에 정부가 강력하게 개입해 인위적으로 가격을 조정해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킨 것이다. 또 정부의 행정력을 동원한 강제적 정책수단을 통해 시장통제가 가능하다는 신념 아래 많은 행정력이 동원된 정책도 양산시켰다.



 초반 완화에서 후반 규제로 전환

 박정희정부의 후기 규제정책은 전두환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 경기활성화 정책으로 전환한다. 1979년 하반기 이후 국내 경기의 전반적인 침체현상에 따라 정부는 부동산경기활성화를 시도했고, 양도소득세의 세율 인하, 탄력세율제 도입, 특별공제율의 한도 인상과 함께 특정지역을 해체하는 등의 ‘주택경기 활성화 조치’를 그 해 9월 발표했다. 이후에도 계속 자금출처 조사배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활성화 조치가 1982년까지 잇따랐다.

 전두환정부의 부동산정책은 경기조절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특징을 갖는다. 정책방향도 초기에는 부양으로, 중반 이후에는 투기억제로 분명하게 대별된다. 1980년대 초반 극도로 침체에 빠져 있던 경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각종 경기활성화 대책을 실시했고, 부동산 경기부양 정책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중반 이후 지가가 급등함에 따라 투기를 억제하려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특히 정부는 부동산 가격급등과 투기적 거래가 초과수요에 기인한다는 인식 아래 부동산 공급을 확대하는 정책을 강화했다. 택지개발촉진법을 제정함으로써 서울 목동단지 건설 등 공영개발 방식의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을 확대한 것이다. 또 저소득층 주거안정을 위해 국민주택 및 임대주택 건설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당시 경제는 초기 침체기에서 집권 중반 이후 10% 내외의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GDP성장률이 2차 오일쇼크와 정치 불안으로 1980년 0.2%(경상기준)를 기록했으나, 이후에는 10% 내외의 성장기조로 전환한 것이다. 또 물가도 집권 초반에는 높은 상승률을 보였지만, 정부의 강력한 억제책으로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한자리 수로 자리매김해 하향 안정세로 돌아섰다.

 부동산시장은 경기상황에 따라 등락폭에 차이는 있지만 지속적인 상승 기조를 이어갔다. 집권기간 중 연평균 지가상승률은 10.7%로, 같은 기간의 GDP성장률 10.2% 수준이었다. 그러나 물가상승률(8.5%)보다는 높아 인플레이션을 회피할 수 있는 자산으로서 부동산의 가치는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결국 경기상승기인 1983년 지가상승률이 약 19%에 이르게 되자, 전두환정부의 부동산 규제정책은 이때를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1970년대 말 부동산 가격급등을 경험한 정부도 부정적인 여론에 힘입어 신속한 대응책으로 부동산투기에 맞섰다.

 당시 국내 경기활성화를 위한 정부자금과 수출지원자금의 공급으로 팽창된 통화는 부동산시장으로 급격히 흘러들어 아파트 입주권, 주택청약예금통장 등에 거액의 프리미엄까지 붙어 전매되었다. 이에 정부는 특정지역을 재지정·고시하고 아파트 분양시 채권입찰제를 실시해 투기소득을 국가가 흡수하여 국민주택건설자금으로 활용하는 투기억제책을 시행했다. 대기업 비업무용 부동산 취득에도 제동을 걸었으며,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투지지역에서 행동단속과 함께 적발된 이들에게는 분양자격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도 내놓았다.

 1982년 12월22일 ‘주택 투기억제 대책’을 시작으로 ‘부동산 투기억제 대책’(1982년 2월16일), ‘투기 및 주택문제 종합대책’(4월18일) 등 불과 2~4개월 만에 집중적인 규제정책이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강력한 정부의 정책으로 부동산시장은 1985년 중반까지 경제전반의 안정화 추세에 편승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일시적인 진정효과를 보였을 뿐 지속적인 지가급등의 기조를 억제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단기적인 대책 위주의 조치들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결국 국제수지 흑자 지속, 선거로 인한 통화증가가 급격한 시중 유동자금 증가로 이어져 부동산가격은 걷잡을 수 없는 상승국면으로 돌아섰다. 1986년부터 비롯된 수출호조와 높은 경제성장은 통화량을 증가시켰고, 88올림픽 이후의 물가오름세 심리가 확산되면서 부동산가격 상승에 불을 지폈다. 특히 1987년 치른 두 차례의 선거는 지역개발사업 공약과 해당지역에 대한 투기 붐을 일으켜 전국적인 지가상승의 원인이 되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최윤기 연구원은 “이른바 3저 현상에 따른 국내경기의 호황과 소득증대가 만성적인 공급부족 현상을 나타내던 주택가격을 급등시켰다”며, “이는 다시 주택가격 상승의 기대심리와 상승작용을 함으로써 주택가격이 폭등세를 지속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노태우정부가 부동산정책에서 강력한 시장개입으로 방향을 설정하게 한 단초가 되었고, 한편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을 수립케 한 배경이 됐다.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에 따른 단기간 공급 확대

 노태우정부의 경제는 집권 중반기까지 두 자리 수의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했지만 말기에는 저성장으로 돌아섰다. 집권 초반 GDP성장률이 30%대까지 치솟았으나 92년 4.7%로 하락, 집권기간 전체적으로 연평균 17.7%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는 소비자 물가지수를 한 자리 수에서 관리해 인플레이션을 동반하지 않은 성장이었다.

 이 같은 경제성장에 힘입어 부동산시장도 초반부터 가격폭등세가 발생했고, 박정희·전두환정부 때와는 양상이 전혀 다른 가장 강력한 부동산정책을 도입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집권 말기 부동산가격은 하향세로 전환했고, 1988~1990년 사이 경제성장 속도를 훨씬 초과했던 지가상승률(20% 상회)은 집권기간 중 연평균 18.3%로 같은 기간 GDP성장률(17.7%)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였다.

 노태우정부가 출범할 당시의 부동산시장 특징은 1980년대 말 전국 확산일로로 치달았던 광란적인 투기열풍이 멈추질 않은 채 계층 간 분배구조를 둘러싼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데 있다. 이에 정부가 부동산투기를 방치할 경우 국가경제의 안정기조가 근본적으로 무너져 내린다는 위기의식에서 각종 정책을 수립해 발표했다.

 1988년 8월 부동산 종합대책을 필두로 1989년 2월 긴급 부동산 투기억제 대책, 1990년 4월 부동산 투기억제 대책, 5월 부동산 투기억제를 위한 특별보완 대책(5·8조치) 등은 대표적인 강경 정책이다. 이들 대책을 통해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1989년)과 토지공개념제도가 시행(1990년)되었다.

 정부의 이 같은 강한 의지에 따른 대책은 부동산시장이 비교적 오랜 기간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는 요인이 됐으나, 근본적인 부동산투기를 잡는 데엔 실패한 정책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김현아 연구원은 “그러나 이 시기의 안정세는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에 의한 단기간 내 양적 공급의 확대로 가능했으며, 부동산, 특히 주택가격 안정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며, 이는 “사실상 1989년 70.9%에 불과했던 주택보급률이 주택 200만호 건설 후인 1996년 89.2%로 18.3%포인트나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연간 60만호 정도의 주택을 신규로 공급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주택공급 역사상 매우 괄목할 만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노태우정부의 부동산정책은 투기적 거래방지와 지가상승을 막기 위한 직접적이고 강력한 시장개입으로 표현된다. 경제개발 이후 부동산가격 상승이 지속됨에 따라 부동산정책의 실패는 정권 차원의 실패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정부 차원의 고강도 개입이 이뤄진 것이다. 이 때문에 토지거래 및 소유에 대해 직접적으로 규제를 가하는 수단을 많이 활용했다.

 또 과거처럼 양도소득세 등 거래과세를 강화하는 정책 위주에서 보유과세 및 자본이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조세정책을 전환한 것도 특징이다. 특히 강력한 투기억제 대책과 함께 부동산 공급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 역시 적극적으로 시행했다는 점이 과거 정부와는 달랐다.

 이 시기 정부의 시장개입은 기존의 단기성 정책에서 벗어나 토지공개념 등 체계적인 토지정책을 마련함으로써 중·장기적인 부동산가격 안정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토지공개념제도의 집행에 따른 조세부과와 단기간 내 주택공급 확대로 인한 부작용도 나타났다. 토지초과이득세 등 미실현 이득에 대한 과세부과로 인해 조세저항, 위헌시비, 조세회피 목적의 건물 신축 증가 등의 현상이 발생했다. 또 단기간의 주택건설로 자재난, 노임상승, 부실공사 등도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김영삼정부 시절의 부동산시장은 IMF 이전까지 경제성장 기조에도 불구하고 지가상승률이 하락세를 보이는 등 초유의 하향 안정세를 유지했다. 이는 노태우정부의 강력한 부동산정책에 따른 결과였다. 여기에 일본의 부동산거품 붕괴 등 세계적인 자산디플레이션 여파도 작용했다.

 1993~1997년까지 연평균 지가상승률은 -1.2%로 동기간 GDP성장률 7.5%와 물가상승률 5.0%를 훨씬 밑돌았다. 이 같은 지가의 하향안정에 따라 부동산거품 비율도 집권 초기 약 40%대였으나, 집권 말기엔 IMF 충격으로 15%대 수준까지 급격히 하락했다.



 부동산에서 자유로웠던 문민정부

 이처럼 과거와 같은 부동산 가격폭등이 없었던 김영삼정부 시절에는 투기근절이라는 사후적 대책에서 벗어나 사전적 투기억제 정책으로 전환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별도의 부동산경기 부양정책도 실시하지 않았다. 지가하락 추세가 부동산에 포함된 거품이 붕괴하는 과정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1993년 금융실명제에 이은 부동산실명제(1995년)를 전격 실시함으로써 거래의 투명성 제고를 통한 투기적 거래의 사전 규제조치 도입 등 제도적 개선에 주력했으며, 부분적인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등 미약하나마 시장자율화 조치도 시행됐다.

 김영삼정부가 내놓은 부동산가격 안정화 정책은 ‘전세가격 상승에 대한 대책’(1994년)과 ‘부동산실명제’(1995년)뿐인데, 이 점에서 부동산 가격폭등이라는 여론의 비난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웠던 정부로 기록되고 있다.

 이 같은 평온함은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오히려 부동산시장 침체라는 골칫덩이로 돌변했다. 주택 및 토지가격 등 부동산부문에서 자산디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1998년 지가는 -13.6%, 주택가격은 -12.4%로 같은 해 경제성장률(-5.8%)보다 하락세가 더 컸다.

 부동산가격이 폭락하고 건설업체들이 대량 부도사태를 맞으면서 부동산시장은 심각한 수급불균형을 초래했다. 이에 외환위기와 함께 집권한 김대중정부가 경제 전 부분에서 경기부양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것은 당연했다. 부동산 역시 실물경기 침체를 돌파하기 위해 정책의 방향을 기존의 규제 위주에서 탈피해 경기부양 정책을 구사했다. 부동산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함으로써 건설경기 부양을 통해 고용은 물론 각종 산업유발 효과를 노린 정책을 시도한 것이다. 시장기능을 저해했던 기존의 규제 가운데 분양가, 소형의무비율, 청약제도의 자격기준 등은 대폭 완화하거나 폐지했다. 또 수요자·공급자 금융 확대, 전세금 지원 및 서민층 주택자금 지원 확대, 취득세·양도세 완화 및 대출이자·소득세 감면 등 주택건설 및 구입에 따른 금융과 세제의 지원 방안도 확대했다. 실물경기 회복을 위해 규제완화뿐 아니라 조세·금융적 인센티브 수단도 병행해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부동산정책을 경기조절 수단으로 활용했던 사례는 1980년대 초반 전두환정부 시절에도 있었으나, IMF 이후의 경기부양 정책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넓고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완화 정책에도 건설 및 주택경기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998년 발표된 건설경기 활성화 대책이 2001년 상반기까지 계속됐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기간 동안 정부가 공식발표한 건설경기 활성화 대책만도 10건에 달한다.

 부양책 일변도였던 정부의 부동산 관련정책이 규제로 급선회한 시기는 2002년, 집권 마지막 해였다. 이는 2001년 하반기부터 주택가격이 다시 급상승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소형 재건축대상 아파트로 한정됐던 상승세는 점차 확대된 양상을 보였다. 특히 이 시기의 가격상승은 사상초유의 저금리, 가계대출의 확대로 소비자들의 자금조달 능력이 크게 확대된 데 따른 것이다. 또 외환위기 이후 급감했던 주택건설 실적으로 인한 수급 불균형의 문제, 대규모 재건축사업의 추진 등이 겹치면서 상승을 더욱 부추겼다. 여기에 정권 초기 각종 규제 완화의 효과가 중첩되면서 가격상승의 폭발력을 한층 배가시켰다.

 이에 김대중정부는 2001년까지의 주택경기 활성화 대책에서 가격안정 대책으로 부동산정책의 초점을 바꾸면서 규제강화로 정책방향도 전환했다. 



 정책적 수단에만 의존한 오류 반복

 2002년부터 참여정부로 정권을 이양하기 전까지 약 1년여 기간 동안만 해도 모두 9건의 부동산시장 안정대책이 나온 걸 보면 당시 당황했던 정부의 모습을 대변한다. 10년 혹은 20년이던 임대 의무기간 30년 연장, 서울지역 투기과열지구 지정 및 특별관리, 장기임대주택 100만호 건설, 청약통장 불법거래시 3년 이하 징역 및 매수자 처벌, 2007년 입주 판교신도시 건설, 제2 강남 2~3개 신도시 추가개발, 주택담보대출 비율 60% 이내 하향 행정지도 등은 모두 이때 등장한 부동산 투기억제 정책이다.

 이처럼 역대정부 가운데 부동산 정책의 입안과 시행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김영삼정부를 제외하곤 모두 여론의 집중적인 포화를 받으면서 부동산, 특히 주택가격 폭등에 따른 각종 대책을 쏟아냈다. 시장의 과열을 막기 위한 투기억제 및 가격안정 대책과 침체된 시장을 회복시키기 위한 경기활성화 대책이 지난 40여년 동안 반복돼 왔다. 그러나 정부의 부동산대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각각 집권기간 동안 단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수년 뒤 혹은 차기정부가 동일한 고민을 하다 어김없이 되풀이성 정책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윤기 연구원은 “주택정책의 정책방향이 장기적으로 뚜렷하게 세워지지 않은 채 주택가격이 안정되지 않을 때마다 주택가격 안정을 위한 대중적인 요법이나 경기안정화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일관성 있는 주택정책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표적으로 주택정책의 일관성 결여 사례로, 소형주택 건축 의무비율의 경우 시장기구의 활성화라는 정책방향에 따라 지속적으로 완화돼 오다가 중소형 주택의 가격이 급등하자 다시 소형주택 건물 의무화를 재추진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주택분양제도에서도 규제의 완화와 강화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예이다.

 김현아 연구원은 “부동산가격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 의해 상승할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변동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면서,   “정부가 부동산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책적 수단에만 의존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투기불패’라는 거대슬로건을 내걸고 노무현 대통령까지 “이번 부동산정책은 핵심요소가 모두 포함된 정책으로 이대로만 시행되면 부동산시장 안정이라는 정책목표는 달성될 것”이라며 자신하는 8·31부동산 대책이 향후 입법화 과정을 거쳐 역대정부의 부동산정책과는 달리 어떤 효력을 발휘하게 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