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스(BRIC’s : 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국가 중 가장 큰 국토와 가장 많은 천연자원을 보유한 러시아가 최근 급격한 경제 변화를 맞고 있다. 세계 유가가 급상승하면서 오일달러가 넘쳐나고 내수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등 경제가 뜀박질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의 대(對)러시아 비즈니스도 가속화되고 있다. 기자는 지난 9월4일 직접 러시아 모스크바를 찾아 경제 변화 실상과 한국 기업들의 활약 및 가능성을 살펴봤다.
 난 9월4일 오후 4시10분. 러시아 모스크바 공항은 입국과 환승을 기다리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장 난 전화, 하수구가 막힌 화장실, 부족한 의자 등 공항의 노후한 시설과 열악한 환경은 지난 1998년 8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던 사회주의국가 러시아의 단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러시아는 최근 5년간 오일달러를 기반으로 연평균 7%에 이르는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지만, 그 영향이 아직 공공시설 등 사회 기반 인프라로 이어지지 못한 듯했다. 그나마 현지 진출 해외기업들의 투자로 곳곳에 설치된 LCD비전 등 각종 멀티미디어가 공항 첨단시설의 전부였다.     

 러시아의 출입국 심사는 까다롭기로 소문나 있다. 특히 입국심사는 체첸의 테러 등 정치적 이유로 인해 더욱 심해진 상태였다. 러시아를 처음 방문하는 기자 역시 예기치 못한 변수에 휘말렸다. 40여분을 기다린 끝에 심사대에 올라섰지만 아무런 이유나 설명 없이 30여분을 기다리는 낭패를 봤다.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나 ‘무엇이 문제인가’를 물었지만 기다리라는 손짓이 전부였다. 입국심사대를 지나 모스크바 땅을 밟는 데까지 1시간10분이나 걸렸다.

 단편적이지만 기자가 겪은 경험은 러시아 행정조직의 까다로운 관료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러시아는 푸틴정부 이래 거대한 행정조직 축소와 관료주의 타파를 위한 개혁을 단행했지만, 아직도 연방정부 내에는 수만명에 달하는 공무원이 존재하고, 관료주의가 만연해 있다고 한다. 심지어  “관료주의가 사람 잡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살기 힘든 천국, 모스크바”

 “자동차 규정위반 딱지를 떼면 벌금을 내기 위해 하루를 소비해야 하는 나라가 러시아입니다. 벌금을 내는 것도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일반 행정업무는 말할 것도 없죠. 법인 설립이나 사무소 인가를 위해서도 최소 4~6개월 이상이 걸리는 건 보통입니다. 심지어 사무소 연장 신청을 할래도 1~2개월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는 필요 이상의 행정조직과 수많은 형식적인 업무절차 때문이죠.”(안상훈 수출입은행 러시아사무소 차장)

 관료주의와 함께 러시아의 경제적 발전을 뒷걸음치게 만드는 요소로 행정조직의 부정부패를 빼놓을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길거리에 넘쳐나는 경찰이다. 모스크바 시내를 거닐면 경찰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통역과 가이드를 맡았던 모스크바 대학원생 김선향씨(24)는 “절대 경찰들과 눈을 마주치지 말라”고 기자에게 경고했다. 속된 말로 ‘삥뜯기’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세계에서 경찰을 가장 믿지 않고, 싫어하는 나라가 러시아예요. 내국인도 마찬가지지만 외국인에게는 더 많은 돈을 받아내죠. 요새는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경찰들이 길거리를 지나다니며 돈을 뜯어내요.”

 작심한 경찰에게 돈을 주지 않고 항의하는 사람은 러시아 관료주의의 쓴맛을 보게 된다고 한다.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2~3시간을 억류시켜 놓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돈(보통 100~500루불 : 4000원~1만1000원)을 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설명이다.

 이 같은 관료주의와 부정부패는 대러시아 비즈니스를 하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러시아는 여타 국가보다 외국인들의 비즈니스 비용(시간과 돈)이 더 많이 드는 나라입니다. 제 때 업무처리를 마치거나 시간을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않으려면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죠.”(강두식 현대자동차 러시아사무소 차장)

 대러시아 비즈니스를 하는 외국인들의 또 하나의 걱정은 치안이다. 실제로 극단적인 외국인혐오증을 가진 극우민족주의자들인 스킨헤드(Skin Head)족과 자본주의 체제 도입 이후 많아진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독립국가연합)의 밀입국자들로 인해 모스크바 시내 밤거리를 나 홀로 걷는 외국인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머서휴먼리소스컨설팅(MHRC)이 올해 초 전 세계 215개 도시를 대상으로 삶의 질과 안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바그다드가 가장 위험한 도시로 뽑혔으며, 모스크바(198위), 까잔(178위) 등 러시아의 주요 도시 역시 매우 위험한 도시로 나타났다.

 불안한 치안으로 인해 비즈니스를 위해 러시아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차를 몰고 다닌다고 한다. 더욱이 현지에서 외국인들이 면허증을 따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힘들어 러시아 현지인을 운전기사로 두고 있는 실정이다. “외국인이 러시아에서 면허증을 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죠. 면허증을 딴 외국인이라면 아마도 대부분 500달러 정도의 뇌물을 주고 취득한 경우일 겁니다.”(김창덕 수출입은행 러시아사무소 소장)

 러시아의 관료주의와 부정부패, 불안한 치안, 어려운 언어 등은 외국인들에게 높은 장벽으로 작용하지만, 반대로 적당한 뇌물과 인맥을 쌓으면 특혜가 가능하고, 불안한 치안으로부터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한다. 국제투명성기구(TI)와 러시아 정치경제연구소(INDEM)의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들이 러시아 내 비즈니스를 위해 관계공무원 등에게 제공하는 뇌물의 액수가 연간 220억달러(22조원)를 웃도는 것으로 조사돼 이를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 1년 예산의 30%를 차지하는 액수다.

 “뉴욕을 살기 좋은 지옥이라고 한다면 모스크바는 살기 힘든 천국으로 비유되죠. 비즈니스를 하는 데 관료주의 등 여러 가지 위험요소가 따르지만 반대로 이들 요소로 인해 쉽게 일이 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로 차를 몰고 다니고 저녁에는 바깥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치안을 걱정할 필요는 없죠. 비즈니스맨들보다는 관광객이나 돈 없는 유학생들이 치안을 걱정하는 편입니다.”(정동식 우리은행 러시아사무소 소장)  



 오일달러로 내수시장 폭발

 “러시아는 절대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강대권 재(在)러시아 한국중소기업협의회 회장은 러시아의 경제현황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운을 뗐다. “한국에서는 러시아하면 공산주의와 빵집 앞에서 배급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을 떠올리는데, 과거 빵집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은 빵이 없어서가 아니라 좀더 맛있는 빵을 얻으려고 줄을 선 것입니다. 러시아는 석유·가스 등 다양한 천연자원 매장량이 세계 1~2위이고, 국토 면적도 세계 1위입니다. 잠재력이 엄청난 나라죠. 유가상승과 함께 지금 그 잠재력이 폭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시장에 나가 보면 러시아가 어떤 나라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강 회장의 말처럼 러시아는 막대한 천연자원을 배경으로 서서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1998년 8월 금융위기로 GDP성장률이 -4.9%로 추락했던 러시아는 루불화의 평가절화에 따른 수출경쟁력 강화와 유가상승으로 이듬해인 1999년 6.4%, 2000년 10%, 2001년 5.1%, 2002년 4.7%, 2003년 7.3%, 2004년 7.1%의 놀라운 경제성장률을 이어왔다. 올해에도 6% 이상의 성장이 예상된다. 또 국민 1인당 GDP도 지난 2001년 2100달러에서 2004년에는 4010달러로 두 배 가량 높아졌다.

 이 같은 고속성장은 모스크바 등 주요 도시를 역동적으로 만들고 있다. 국민소득 증가로 내수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 모스크바 거리를 거닐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자동차와 옥외광고다. 특히 자동차의 경우 독일을 자동차의 나라라고 한다면 러시아는 자동차의 전시장으로 비유된다. 벤츠·아우디·마쓰다·현대 등 세계 각국의 자동차메이커가 도로를 달리고 있고,심지어 인도·중국의 자동차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2004년 러시아 내 승용차 등록대수는 1998년보다 50% 이상 증가한 2339만대를 기록하고 있다. 연간 시장규모도 1999년 110만대에서 2004년에는 176만대로 늘었으며, 자동차업계에서는 2010년에 200만대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말 그대로 세계 각국 자동차업체들의 격전지인 셈이다.

 러시아 자동차산업 전망과 관련, 손장원 현대자동차 러시아사무소 동유럽본부장은 “오일달러, 실업률 하락 등으로 국민소득이 증가하면서 러시아인들의 소비력이 커지고 있다”며, “자동차산업 역시 2010년에는 연간 200만대에 달하는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고 밝혔다.

 기자가 방문한 수입차 전문 딜러숍  롤프에는 평일인데도 자동차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쇼룸이 붐볐다. 딜러숍 타티아나 루코베츠카야 사장은 “러시아에서는 판매직원이 고객을 찾아가는 시스템이 아니라 고객이 직접 자동차를 보러 온다”고 하며, “평소 현대차 쇼룸에만 100여명의 고객들이 방문하고 주말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찾아와 발 디딜 틈이 없다”고 전했다. 이 대리점에서는 포드·현대· 마쓰다·미쯔비시 자동차 등 4종의  수입차를 팔고 있다.  

 러시아 국민의 구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대형할인점이다. 최근 모스크바 등 러시아 주요 도시를 비롯한 곳곳에는 이케아, 메트로, 람스토르 등 세계 유명 대형할인점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서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대형 할인점은 국토면적과도 비례하는 것 같았다. 가구점·식료품점 등 2~3개의 대형할인점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고, 그 규모는 한국의 대형할인점의 2~3배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모스크바 시 외곽에 위치한 이 같은 대형할인점들은 평일에도 생필품을 사기 위한 사람들로 넘쳐난다고 한다. 기자가 찾았던 대형할인점 ‘메카’ 역시 수요일인데도 60여개에 달하는 계산대가 고객들로 가득 차 북적거렸다.

 “가족이랑 주말에 장보러 나오면 그날 하루는 다 보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고 매장도 커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죠. 한국에서는 대형할인점 때문에 재래시장이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강두식 현대자동차 러시아사무소 차장)

 국민 실질소득 증가와 내수시장의 급성장은 러시아를 유럽에서 가장 큰 소비시장으로 부상시켰다. 그 중심에는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중산층이 있다고 한다. 러시아 소득별 계층분포를 보면 2003년 월평균 소득 2000루불(75달러) 이하 계층 비율이 전년의 65%에서 51%로 감소한 반면, 4000루불(148달러) 이상의 계층 비율은 전년 13%에서 22%로 상승하는 등 중산층이 확대되고 있다. 아직 상위 소득층 10%가 전체 소득의 30%를 차지하고, 하위 10%가 전체 소득의 2%에 그치는 등 빈부격차가 심하고 절대 빈곤층도 많다. 하지만 이 같은 중산층의 점진적인 증가는 향후 러시아 경제를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오영일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러시아 소비자들은 저축보다 소비성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며, “중산층의 저변 확대로 소비재산업 등 내수시장은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한국 브랜드 ‘굿’, 전망은 ‘글쎄요’

 모스크바 시내를 돌아다니면 수많은 옥외광고판을 통해 삼성·LG·팬택·현대자동차 등 친숙한 국내기업을 언제나 만나볼 수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시장에서 한국산 제품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이미 가전·핸드폰·자동차 등에서는 국내 제품이 호평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러시아 소비자들은 한국산 제품을 중국산 저가제품과는 달리 품질이나 브랜드 면에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삼성·LG전자는 러시아 국민 브랜드로 각광받고 있으며, 현대자동차의 경우 지난해 수입차 판매 1위를 기록하는 등 한국 제품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는 상태다. 

 이에 루츠베츠카야 사장은 “지난해 수입차 판매 1위를 기록한 현대자동차는 가격 대비 성능이 뛰어나고 브랜드도 잘 알려져 있다”고 하며, “현대차는 앞으로 자동차산업 성장과 함께 판매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현대자동차 액센트로 택시운전을 하는 드미트리씨 역시 “자동차의 성능이 뛰어나다. 매우 만족스럽다”며 연신 굿(good)을 외쳤다.

 개인승용차로 택시운전을 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크베츠바씨는 “삼성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면서 “오랫동안 쓰고 있지만 성능이 뛰어나 가족 애장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많은 이웃들이 한 가지씩 한국산 가전제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 ‘한국’ 브랜드가 러시아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실감나게 했다.  

 식음료부문에서 한국 기업들의 선전도 눈에 띄었다. ‘러시아 성공기’로 식·음료업계에서 잘 알려진 초코파이와 도시락라면은 대형할인점은 물론 거리 가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기상품이다. 특히 러시아 소비자들 사이에서 ‘간호원라면’, ‘아가씨라면’으로 통하는 도시락라면은 전체 용기면 시장의 80% 를 차지할 정도로 명실상부한 한국 대표식품으로 꼽힌다. 이 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도시락을 생산하는 한국야쿠르트는 지난해 8월 모스크바 인근 라멘스코예 지역에 3000만달러를 투자, 연간 1억7000만개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설립했으며, 향후 라인을 증설해 연간 3억5000만개의 생산능력을 확보할 계획이다.

 “가전이나 자동차, 일부 식료품에서 한국산 제품들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울 정도죠. 모라토리엄(1998년)을 전후로 국내 기업들의 러시아시장 진출과 성공으로 한국에 대한 러시아 소비자들의 인식도 중국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단순히 저가제품이라서 선택하기보다는 유럽에 비해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뛰어나다는 평가와 함께 선택하고 있죠. 이에 따라 국내 기업들도 마케팅전략을 고가의 우수한 품질로 바꿔나가고 있는 상태입니다.”(강두식 차장)

 러시아시장에서 국산 제품들이 선전하고 있지만 한국의 대러시아 비즈니스 여건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일부 대기업 및 중견기업 위주로 시장 진출이 이루어진 데다 이마저도 러시아 및 해외 기업들과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져 지위 확보가 쉽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 기업들과는 달리 국내 기업들은 현지 직접투자를 꺼리고 있어 러시아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물건 팔아 돈만 챙긴다”는 비난도 일고 있는 실정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동차다. 지난해 현대자동차는 수입차 부문 매출 1위를 기록했고, 올해도 매출이 100% 성장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도요타·포드·르노·폭스바겐·닛산 등 세계적인 자동차메이커와 중국·인도 등 저가 자동차메이커들이 현지화 전략을 공격적으로 펼치고 있어 앞으로의 전망은 불투명한 상태다. 해외 자동차업체들이 직접투자를 통해 현지 양산체제를 가져갈 경우 가격경쟁은 물론 소비자 인식에서도 뒤쳐질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이에 손장원 본부장은 “러시아 자동차시장의 성장과 함께 세계 각국의 자동차업체들이 대거 현지화 전략을 구사하며 공격적인 영업을 준비하고 있어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며, “현대자동차도 현지 법인화 및 생산체재 확대 등을 검토하며 대응전략을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우려는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 국민 브랜드로 인정받는 삼성·LG 등 국산 휴대폰의 매출 둔화가 바로 그것. 무역협회에 따르면 휴대폰 수출금액은 지난 2004년 5월 이후 1000만달러 이하로 추락했다. 전년 동기대비 수출은 2004년 5월 18% 감소한 데 이어 6월 19.5%, 7월 35.2%, 8월 58.7%가 줄어 4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한편 러시아의 외국인 직접투자는 해마다 늘어나 지난 2004년에는 117억달러를 기록했지만 우리나라의 대러시아 직접투자는 2005년 5월 말 기준으로 2억4500만달러(투자누적액)에 불과한 상태다. 이는 국내 해외 직접투자 총액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이 단순히 수출만으로 러시아 비즈니스에 승부하거나 체제전환 및 인프라 개선을 기다리고 직접투자를 미룰 경우 승산이 없다는 데 목소리를 같이 하고 있다. 러시아 내수시장을 겨냥해 해외 유수기업들이 에너지·유통·자동차·IT·식료품 등 각 산업분야별로 직접투자를 늘리고 있고, 현지 생산체제를 구축하면서 공격적인 영업을 펼쳐 가고 있기 때문이다. 



 “프론티어만이 살아남는다”

 오영일 연구원도 “가격 대비 품질 만족 전략으로 러시아를 공략해 왔던 한국 제품들은 유럽의 고가제품과 중국 등 신흥시장의 저가제품으로 인해 Nut-cracker(호두까기)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며, “수출 중심의 대러시아 비즈니스를 현지 생산체제로 바꿔나가는 것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국내 기업들의 수출 중심의 비즈니스는 또 다른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러시아의 무역환경 변화다. 러시아는 2007년 WTO 가입을 목표로 미국 등 회원국과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태이며, 그 일환으로 불법무역 거래를 막기 위한 통관절차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당국은 최근 유통업체인 유로네트워크의 불법 핸드폰 거래를 적발, 1000만달러 어치의 제품을 압류한 바 있다. 이 같은 러시아의 무역환경 변화는 국내 기업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국내 기업들은 러시아의 까다로운 통관절차와 관세를 피하기 위해 핀란드를 경유하는 역외무역을 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삼성전자와 LG전자 양사의 러시아 매출 규모만 40억달러가 넘지만, 한국무역협회에 집계된 작년 한국의 대러시아 가전제품 수출액은 3억3000만달러도 채 안 되는 수준일 정도로 국내 기업들의 대러시아 역외무역 비중이 높다.

 “WTO 가입을 앞두고 유로네트워크 사례는 러시아 정부당국이 그동안 암묵적으로 인정하던 역외무역 및 불법통관 등을 정리하겠다는 의지표명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무역 중심의 한국 기업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죠. 이에 대한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현지 진출 기업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할 것으로 여겨집니다.”(김창덕 소장)

 현재 대기업이나 일부 중견기업 위주로 진행되는 대러시아 비즈니스를 중소기업으로 확대해 나갈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는 내수시장뿐만 아니라 새로운 개척지인 동유럽시장으로 나가는 교두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중소기업들은 150여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마저도 섬유·IT 업체에 치중되어 있고, 대부분 영세한 보따리상에 머무는 수준이다.

 이에 강대권 회장은 “러시아에 대한 한국 비즈니스맨들의 잘못된 인식과 부족한 정보가 한상(韓商)을 형성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며, “러시아는 자체 내수시장뿐만 아니라 CIS 및 동유럽 국가로 진출하는 발판”이라고 말했다.



 전문가 기고 러시아 무역 환경 변화와 대응책

 투자 망설이다간 러시아 시장은 남의 것

 오영일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ohyi@lgeri.com



 공산당·보드카 등으로 대표되던, 왠지 우리에겐 차갑고 멀게만 느껴지던 러시아와 국교를 맺고 교류를 시작한 지 벌써 15년이 넘었다. 1990년대 초반 구소련이 붕괴한 뒤 시장이 개방되고 혼란의 도가니가 계속되면서 우리에게 러시아는 도저히 헤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나라로 인식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랬던 러시아가 이제는 브릭스(BRIC’s) 국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고, 세계경제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급성장하는 경제대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 집권 이후 국내 정치안정과 국제 고유가 상황을 통한 오일달러 유입으로 러시아는 1990년대 혼란스러웠던 모습에서 완전히 탈피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 가고 있다. 석유·가스 산업에 의존하는 산업구조에 대한 우려도 있긴 하지만, 이젠 풍부해진 유동성을 바탕으로 일반 제조업 분야의 설비투자가 늘어나는 경기 선순환 구조가 이뤄지고 있다.

 국교수립 이후부터 한국의 대러시아 진출도 꾸준히 늘어 이제는 어지간한 러시아 도시에 한국인이 없는 곳이 없고, 시골 구석구석까지 한국 제품이 파고들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특히 한국 전자제품은 러시아시장을 확실하게 장악해 대부분의 러시아인 가정에 TV든 청소기든 한국산 전자제품이 적어도 한두 개 씩은 기본적으로 있을 정도다.

 한국의 대러시아 수출을 살펴보면 수교 직후 1억달러 내외 수준에서 작년 에는 약 23억달러 이상의 수준으로 성장했고, 올해는 7월까지의 수출실적이 이미 22억달러를 넘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75% 이상의 수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이 수치들은 공식통계에 따른 것일 뿐 실제 수출액은 이를 훨씬 상회한다. 한국의 대표적 가전 수출업체인 LG전자와 삼성전자 양사의 작년 러시아 매출 규모만 합쳐도 40억달러가 넘지만, 한국무역협회에 집계된 작년 한국의 대러시아 가전제품 수출액은 3억3000달러도 채 안 되는 수준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정확한 통계 자료를 내기는 어렵지만 한국의 대러시아 수출은 적어도 60억달러 이상은 될 것이다. 

 이렇게 수치상의 큰 차이가 나는 데는 가전제품의 독특한 대러시아 수출구조가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러시아로 수출되는 한국 가전제품들은 러시아 현지로 직수출되었다. 하지만 1996년 이후 대러시아 수출물량이 러시아가 아닌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핀란드로 선적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러시아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통관 제도를 피하기 위한 편법이다.

 한국 업체들은 러시아 구매업체와의 합의에 따라 대러시아 수출 물량을 핀란드 보세창고로 선적을 시키고, 러시아 구매업체는 그 곳에서 물건을 인수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러시아로 물건을 이동하는 것도 러시아 구매자가 담당한다. 물론 핀란드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국경세관에서의 통관도 러시아 구매자가 직접 처리한다. 이때 러시아 구매자들은 자신들의 연줄을 동원해 세관원들에게 적당한 뇌물을 주는 대신 물품통관시 법적으로 고시된 관세와 세금의 절반도 채 지불하지 않는다(수입 가전제품에 대한 러시아의 평균 수입관세율은 15% 정도다. 그리고 모든 제품에 18%의 부가가치세가 부가된다. 물론 고급 디지털제품들은 관세율이 더 높다). 뿐만 아니다. 음성적 연결고리를 통해 정상적으로 통관할 때보다 단시간 내에 통관수속을 마친다.

 수입업자로서는 세금을 덜 내니 가격도 저렴하게 들여올 수 있고, 통관수속도 신속하게 처리하니 자금회전도 빨라져서 좋다. 한국 수출업자는 복잡한 러시아 통관 절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음성적 거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더 편하다. 한 마디로 수입업자와 수출업자가 윈-윈(Win-Win) 하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정부가 이제는 이를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WTO 가입을 국가적 과제로 삼고 있는 러시아정부로서는 WTO 가입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한 조치로 세관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4년 1월부터 러시아 세관에서 도입한 최저 가격신고제라 할 수 있는 새로운 통관규정(No.430)이 그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관세를 줄이기 위해 매출전표(Invoice)상의 단가를 낮춰 기입하는 편법을 썼는데, 이를 막기 위해 수출업자들에게 각 제품별 최저가격을 사전에 러시아세관에 신고토록 하여 매출전표 단가가 세관 측 기준자료보다 낮을 경우 세관 측 기준가격에 따라 관세를 부과하는 일종의 강제조항이다.

 물론 그렇다고 음성적 거래가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 특히 최근에는 노골적으로 음성통관을 하려던 일부 업체들에게 러시아세관이 본보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지난 8월, 음성적 회색통관을 하려고 대기 중이던 휴대폰을 압류한 것이다. 금액 기준으로 2억5000달러 이상이 되는 적지 않은 물량인데, 점차 투명통관으로 나가겠다는 의지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러시아정부로부터 부는 내부적 움직임과 함께 러시아에 생산공장을 설립한 외국 진출업체로부터 오는 압력도 거세다. 2000년 이후 러시아에 현지 생산공장을 운영 중인 이탈리아의 인데시트(Indesit)사나 스웨덴의 일레트로룩스(Electrolux)사 등은 현지 생산을 통해 러시아의 높은 관세를 피하면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시장 점유율을 높인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그런데 현재와 같이 음성적 회색통관을 통해 관세와 세금을 모두 내지 않고 제품이 유입되는 경우가 계속된다면, 결국에 자신들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현상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들은 러시아정부에 이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고, 심지어 잘 지켜지지 않을 경우 공장을 철수하겠다며 극단적인 으름장까지 놓고 있다.

 현재 러시아시장의 가장 큰 흐름은 시장이 확대되면서 외국 업체들 간에 경쟁이 치열해지고, WTO 가입을 전후한 러시아정부의 통관 투명화 정책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한국 업체들의 대러시아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 분위기가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음성적 회색 통관에 간접적 공조를 해온 한국 기업들도 이제는 양지에서 진검승부를 펼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러시아도 법과 원칙에 따라 시장이 돌아가고, 또 브랜드 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선진형 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과거의 분위기에 안주한다면 급속히 성장하는 거대한 러시아시장은 남의 떡이 될 것이다. 다행히 최근 몇몇 한국 대기업을 필두로 해 과거와 다른 적극적 자세로 대러시아 접근 전략을 펴는 모습들이 점차 눈에 띈다. 과거에는 투자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이젠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되겠다는 표정이다. 물론 러시아가 아직은 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많은 리스크를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에 섣부른 진출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변화하는 러시아 경제상황에 발맞춰 우리도 러시아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꿔야 한다는 점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