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장사꾼’, ‘스타 CEO’, ‘시장주의자’ 등 숱한 닉네임을 달고 다녔던 김정태(59) 전 국민은행장. 2004년 10월 금융계에서 발을 떼고 강단에 선 그가 최근 포럼 대표, 금융지주회사 사외이사 등 잇따라 새로운 직함을 달고 나타나면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경영 컴백, 정치 입문설 등 갖가지 소문도 나돌고 있다. 과연 그는 돌아올 것인가. 어떤 구상을 하고 있을까.

정태 전 국민은행장의 공식 직함은 서강대 초빙교수다. 행장직을 떠난 후 줄곧 강단에서 금융시장론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면서 그야말로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여타 고위급 인사들이 퇴임 후 자주 갖는 세미나 참석 등 대외활동도 거의 없었다.

심지어 주변 지인이나 선후배를 만나는 일도 자제했다. 관심의 대상에서 완전히 멀어진 듯 했다. 주택은행 임원을 지낸 한 인사는 “퇴임 후 얼마동안 만나 뵙기가 쉽지 않았다”며 “직접 연락하고 찾아뵙지 않으면 먼저 연락하는 일도 없었다”고 귀띔했다.

이런 그가 지난 1월 서남해안포럼의 상임대표로 시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15개월만의 외출이었다. 서남해안포럼은 행담도 개발 의혹 사건으로 제동이 걸린 전남 목포·무안·영암지역 국제기업도시 개발사업의 실현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 민간단체로,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이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 전 행장이 고문이나 명예직도 아닌 상임대표를 맡으면서 정치 입문설이 시장에 빠르게 퍼졌다. 전남 광주 출생인 그가 전남 지역의 주요 개발 사업을 지원하는 단체의 대표가 된 것이 소문의 배경이었다. 더욱이 당시는 오는 5월 총선거를 위한 정치권의 후보자 물색이 한창이던 시점이었다.

서남해안포럼의 상임대표가 되기 이전인 지난해 5월에는 금융지주회사인 한국투자금융지주(구 동원증권)의 사외이사로 선임돼 ‘친정’ 복귀 가능성도 불거졌었다. 김 전 행장은 1982년부터 1998년까지 17년간 동원증권에 몸담고 대표이사까지 지낸 바 있다.

흥행배우마냥 그가 출현할 때마다 세간의 이슈가 되는 것은 비정치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불구 그의 인지도와 영향력이 시장에 미친 파장이 컸고, 아직도 파급효과가 남아있다는 반증이다.

“먹는 재미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라고”

지난 3월30일 오후 3시, 서울 조선호텔 카페, 컴파스 로즈에서 만난 김 전 행장은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행장시절 마른 체형이었던 몸은 두 배 이상 불어나 보였고, 마치 병자처럼 하얗던 얼굴도 오랜 시간 땡볕에 그을린 것 마냥 보였다. 안경도 끼지 않았다. 몸에 살이 붙어서 그런지 키는 훨씬 커보였다. 장사꾼 이미지는 간데없고 건장한 농사꾼 이미지가 먼저 와 닿았다.

-특별히 운동이나 건강관리를 하시나요.

특별히 건강관리하는 건 없어요. 의사가 하지 말라는 술 담배를 좀 줄였을 뿐. 아예 끊은 건 아니고 조금씩은 합니다. 내 몸 생각해서 하지 말라는데 굳이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젊은 애들이랑(서강대 대학생) 놀고 같이 밥 먹고 하니까 몸이 많이 불었어요. 식사량도 늘었고, 다이어트를 해야겠는데 먹는 재미가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웃음)

-농장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피부가 많이 탄 것 같습니다.

퇴직 후 (농장에) 자주 가다가 최근에는 주말에, 또는 시간 비는 주중에 화성 농장에 일하러 갑니다. 얼마 전에도 추운 계절 지났으니 새로 오픈할 겸 갔다 왔죠. 밭은 700평정도 되되는데 혼자서도 가꾸고 친구나 지인들이 놀러와 같이 해주기도 합니다.

김 전 행장은 지난해 여름, 서울 동부이촌동에서 일산으로 이사를 했다. 그 후 그는 일산 호수공원의 예찬론자가 됐다. 매일 새벽 호수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나면 아침 식사량이 많아져 점심 먹기가 힘들 정도라고 한다. “일산이 가장 살기 좋은 곳 같아요. 32만 평에 달하는 호수공원을 바라보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 큰 행운인 셈이죠. 호수공원 만든 공무원들 찾아서 밥 사주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으니까요.”

-새 학기가 시작됐는데 강의는 계속하시는 건가요.

수강생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했는데 학교에서 놔주질 않아요. 그래서 이번 학기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 대학원에서 강의합니다. 대학원생들이라서 그런지 조금 낫더군요.

-금융시장론 등 주로 금융 쪽을 가르치신다고 들었는데요. 학생들이 잘 따라오나요.

요즘은 취업 때문에 그런지 금융에 대해서 옛날보다 많이 알고 있어요. 그래서 강의 시간에 전공보다는 ‘그렇게 빡빡하게만 살지 마라’, ‘세상 사는 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등 인생 상담하는 시간이 많아요. 영 엉터리 같은 선생이죠(웃음).

사회생활하다 보면 사람들이 착각에 빠지는 게 있죠. 옆에 있는 사람을 경쟁자로만 보는데 그 사람들을 경쟁자로만 보면 인생에서 별로 성공하지 못해요. 그 사람들을 쳐다보지 말고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그것을 보라고 충고하죠. 여러 가지로 미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그래서 미래학자들이 쓴 책을 많이 권유합니다.

김 전 행장의 강의는 그야말로 초절정 인기를 구사하고 있다. 그의 성공기를 익히 들은 학생들은 물론이고 취업준비생, 휴학생마저 강의를 ‘도둑질’하러 간다고 한다. 때문에 강의실은 언제나 만원이다. 강의뿐만 아니라 교수로서 인기도 최고다. 교수로서 권위보다는 사회 선배나 아버지 같은 이미지가 학생들에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권위보다는 학생들과 어울려 먹고 노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다른 교수들이 형님 때문에 죽겠다고 하더라고요. 애들 밥 잘 사주고 학점 잘 준다고 말입니다.(웃음)”

화제를 세간의 관심이 되고 있는 경영 복귀와 정치 입문설로 돌렸다. 경영 복귀나 정치 입문설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는 손 사레부터 쳤다. “잘 놀고 잘 쉬면서 해피한 사람을 왜 자꾸 들먹이는지 몰라요. 37년간 그만큼 일했으면 됐지 무슨 욕심이 있다고 다시 일하겠습니까. 난 지금 하고 싶은 일을(교수) 하고 있어서 욕심 없어요.”

-그럼 한국투자금융지주 등 금융권이나 경영 일선에 컴백할 계획은 없는 건가요.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외이사 자리도 탐탁지 않았어요. 하도 자리를 맡아달라고 하니까… 동원에서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도움이 된다면 해줄 수밖에 없잖아요. 그걸 가지고 경영 일선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있는가 본데 사외이사로서 3개월에 한 번 나갑니다. 물론 경영에 관련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줄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런 일은 밖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거 아닌가요.

-서남해안포럼 대표를 맡으면서 광주 시장 출마 등 정치 입문설도 나돌았는데요.

서남해안포럼도 제가 비정치적이니까 자리를 맡아달라고 한 겁니다. 대표 자리라곤 하지만 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실무자들이 다 알아서하죠.

-앞으로 교수직만 하실 계획입니까?

실력이 안돼서 내쫓을 때까지 애들 가르치는 일을 할 겁니다. 옛날부터 동경하던 일이고 젊어서부터 하고 싶던 일이 가르치는 것이었죠. 알고 있겠지만 제가 돈도 많이 벌었잖아요. 월급쟁이 중에 저처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근데 무슨 또 일을 해요.

김 전 행장은 인터뷰 내내 스스로 자신은 ‘부자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 그는 부자다. 행장시절 받았던 스톡옵션만(국민은행 주식 50만 주) 해도 수백억 원대. 퇴임이후 지금까지 스톡옵션을 가지고 있다면 4월7일(국민은행 주가 8만 6200원) 현재 431억원에 달한다. 그는 2002년 11월 옛 주택은행장 시절 받았던 20만 주의 스톡옵션도 행사해 차익 67억원을 수재의연금 등으로 사회 환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금융권 일각에서는 김 전 행장을 관치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쫓겨난 불운한 CEO로 보는 시선도 있다. 그는 2004년 9월 국민은행과 국민카드 합병 시 분식회계 혐의로 증권선물위원회(증선위)와 금융감독원(금감원)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아 연임하지 못하고 퇴임했다. 당시 감독당국의 중징계 결정에 대해 찬반 논란이 거셌지만 관치금융이라는 지적이 더욱 컸다.

실제로 2004년 10월 금감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김정태 행장의 징계 문제를 다룬 ‘감리위원회 의사록’이 공개됐다. 이 의사록에 따르면 당시 감리위원으로 참석했던 대다수 의원들이 회계처리 위반정도가 미미하다는 이유로 김 전 행장의 징계에 반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감리위원회의 반대에도 불구 증선위와 금감원이 중징계 결정을 내린 것은 명백한 관치금융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감독당국은 감리위원회의 의결 사항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이라는 해명 아닌 해명을 하는 데만 급급했다.

금융계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해서도 김 전 행장은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지금 내가 행복하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일축했다.

다시 화제를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칼아이칸 사태, 국민은행의 외환은행 인수, 금융 산업 변화 등으로 돌렸다. 특히 칼아이칸 등 외국자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국내 상황에 대해 그는 “외국자본을 비난하기 전에 왜 당해야 하는지 고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며 시장주의자다운 날카로운 분석을 내놨다.

-소버린, 칼아이칸 등 외국자본에 대한 비난 여론을 어떻게 보십니까?

경영을 잘 하면 누가 나무라고 덤벼듭니까. 보세요. 정유회사인 SK는 SK텔레콤을 자회사로 두고 있고, 담배회사인 KT&G는 많은 부동산과 인삼회사를 가지고 있죠. 우리들은 당연하다고만 여깁니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왜, 정유회사가 통신회사를 가지고 있고 담배회사가 창고업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많은 부동산과 인삼회사를 보유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다고 기업가치가(주가) 높은 것도 아니면서 말이죠. 이런 시각의 차이가 분쟁의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외국인들의 주장이 무조건 틀린 건가요? SK의 주가나 KT&G의 주가가 적정하게 평가받고 있는 건가요? 외국인이 그런 문제를 가지고 덤벼들도록 기업 구조를 만든 것이 잘못 아닌가요?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기업에 잘못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국민은행의 외환은행 인수가 유력한데요.

잘하고 있다고 봐요.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생각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는 거죠. 독과점 등은 전문가들이 판단할 문제지 은행이 신경 쓸 일이 아니죠. 중요한 것은 변하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비싼 가격의 외환은행 인수가 도움이 될까요?

세계가 규모의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국민은행에 있을 때도 세계 30위권 은행을 만들자는 슬로건을 내놨죠. 한국은 경제는 10~11위권인데 은행 산업은 아직도 미미합니다. 합병으로(국민+외환은행) 우리나라도 초대형 은행이 하나 생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합병을 해도 세계 60위권 정도니 아직 규모면에서 갈 길이 먼 거죠.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및 재매각과 관련해 많은 의혹들이 불거지고 있는데요.

신문이나 TV를 봐도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분명 그 당시에는(외한은행 매각) 정부나 금융권이나 심지어 언론에서도 외환은행에 공적자금이 필요하고, 매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뭐가 문제인지…. 두고 봐야겠죠.

-강의에서 국내 은행 산업이 3개 은행 정도로 압축 될 거라 전망하셨던데요.

기자들이 전문가 코멘트를 빼놓고 꼭 제가 이야기 한 것처럼 전했더군요. 하지만 일본 등 선진시장을 봐도 인수합병으로 시장이 축소 재편되는 추세입니다. 단순 비교하면 안 되겠지만 우리나라도 스위스의 UBS나 네덜란드 ABN암로와 같은 세계적인 은행이 필요합니다. 지금과 같이 몇 개 은행이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가면 절대 그런 은행이 나오기 힘들어요.

-현재 은행 산업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세계적 은행이 되기 위해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겁니다. 강정원 행장이 외환은행 인수와 함께 글로벌 시장 공략을 선언한 것은 시의적절한 판단이죠. 동아시아 시장에서는 국내 은행의 경쟁력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국민은행이 2003년 12월 인수한 인도네시아의 BII은행이 이를 입증했죠. 이런 점에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을 높이 평가합니다. 박 회장은 누구 보다 먼저 싱가포르, 홍콩 등 해외를 돌며 시장 선점에 나서서 성공했으니까요.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방향으로 계속 밀어줘야 해요.

“주식시장 불확실한 국면 접어들어”

김 전 행장은 강정원 행장에 대해서는 부담스러운 듯 말을 아꼈지만 후배이자 부하 직원이었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박현주처럼 치고 나오는 사람이 더욱 많이 생겨서 초대형 금융기관을 만들어야지 금융 산업도 커나간다”고 확신했다. 박 회장의 이야기를 빌미로 주식 시장 전망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은행보다 증권 경력이 더 많은 만큼 시장을 보는 눈도 남다르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서남해안포럼 발족식에서 ‘주식 시장이 미쳤다’며 과열을 경고하자 보란 듯이 증시가 바닥을 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식 시장이 미쳤다’며 과열을 경고하셨는데. 앞으로 전망은 어떤가요.

최근 주식 시장은 불확실한 국면에 접어든 것 같아요. ELS(주식연계상품)을 보면 알 수 있죠. ELS는 변동성이 커질수록 수익이 늘어나는 상품입니다. 과거 10% 정도였던 수익률이 최근에는 20%로 늘어났죠. 같은 상품인데 수익률이 높아졌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의견이 불확실하다는 거죠. 대부분의 사람이 그동안 증시를 좋게 봤는데 이제는 우려의 시각도 나오고 있는 겁니다. 이런 변화에 주목해야죠.

-전망에 밝으시니까 재테크도 잘하실 것 같은데요.

재테크는 무슨. 주식은 물어만 보지, 하지는 않습니다. 볼일도 없고요. 오히려 있는 거(돈) 쓰는 것에 더 신경씁니다.(웃음)

인터뷰 말미, 경영 컴백에 대한 기자의 끈질긴 질문에 김 전 행장은 “진짜 생각 없다. 나중에 나처럼 노는 사람들 모아서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봉사나 할지 모르지”라며 확실히 잘라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가 찻값을 계산하려하자 그는 “내가 소문난 부자잖아”라며 끝내 본인이 찻값을 치렀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교수가 됐고, 농사꾼이 됐지만 김 전 행장은 그의 말처럼 지금이 더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