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처음으로 FTA를 체결한 칠레. 하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거리에 있는 나라다. 지리적으로 한국과 거의 정반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FTA가 양국간 거리를 좁혀 놓았다. 칠레가정에 한국산 상품들이 우리나라 가정처럼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기자는 칠레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지고 살펴보기 위해 9월25일부터 10월6일까지 10박12일의 여정으로 다녀왔다. <이코노미플러스>는 앞으로도 현지 취재를 통해 FTA를 추진 중인 아세안 본부가 있는 인도네시아와 이미 협상을 타결한 EFTA 4국 중 한 나라인 노르웨이의 경제를 상세히 보도할 계획이다.
 9월25일 "여기는 산티아고”



 한국시간 밤 9시10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칠레 산티아고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현지 9월26일 낮 12시50분. 뉴질랜드 오클랜드까지 12시간, 환승 대기시간 6시간, 다시 산티아고까지 12시간 등 총 29시간을 건너온 여정이었다.

 자다 깨면 기내식이 나왔고, 총 네 끼를 비행기에서 먹어야 할 만큼 칠레는 먼 나라였다. 10분 후 산티아고공항에 도착한다는 기장의 기내방송에 눈을 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산티아고 산등성이는 온통 눈판이다. 계절이 정반대라 겨울을 막 끝낸 지구 남반구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입국심사장을 빠져나와 수하물을 찾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낯익은 광고판이 들어온다. ‘Kia’(기아) 광고다. 고개를 들어보니 도착과 출발을 알리는 42인치 PDP TV에는 ‘Samsung’(삼성) 글자가 선명하다. 현지 TV프로그램이 나오는 브라운관TV에는 LG브랜드가 박혀 있다. 칠레 접경국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공항만 해도 독일산 TV ‘콘락’(Conrac)이 입점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만큼 칠레는 한국과 가까워져 있었다.



 9월26일 칠레 탐색 시작



 산티아고공항에서 시내로 통하는 새 도로 이름은 ‘꼬스트라델’이다. 우리말로는 강변도로쯤 된다. 지난해 11월 산티아고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에 맞춰 개통한 공항고속도로다. 꼬스트라델을 시속 80~100Km 속도로 30분가량 달려 도착한 시내 셉템브레가. 한-칠레 FTA 발효 약 1년 6개월이 지난 9월26일 오후 산티아고에는 한국 브랜드가 널려 있었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자동차를 언뜻 봐도 한국산이 10대 중 2대꼴이 넘는 것 같다. 코앞에 있는 코트라(KOTRA) 산티아고무역관에 들러 자료를 챙기기도 전에 벌써 FTA 효과가 피부로 느껴졌다.

 오후 2시20분. 공항에 마중을 나와 준 주칠레 한국대사관 김병섭 참사관 말이 떠올랐다. 그는 한-칠레 FTA 협상 때 FTA 과장으로 재직하다 발효된 지난해 4월1일자로 주칠레  한국대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했다.

 “여기는 점심시간이 오후 1시부터 3시까지입니다. 그땐 모든 관공서 문이 닫히죠.”

 그 시간대를 피해 주위를 둘러보는데 낯선 사내가 어깨를 툭 친다. 이 나라 66%를 차지한다는 메스티조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라틴어다. 못 알아듣자 자신이 메고 있는 아이스박스를 가리킨다. 막대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 장사꾼이다. 그 순간 1인당 GDP 5900달러(2004년 기준)로 남미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맞나 하는 의구심이 머리를 스쳤다.

 오후 2시40분이 넘었는데도 근처 로스코랄레스란 간판이 붙은 현지 식당엔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의 직장인들이 식사 중이다. 표정에선 여유가 묻어난다. 거리엔 배꼽티부터 목도리까지 계절이 불분명한 패션들이 넘쳐났다. 이곳 날씨는 낮엔 섭씨 20도까지 올라가지만, 밤엔 5~6도까지 떨어져 일교차가 크기 때문이다. 오후 3시 정각이 되어 만난 구자경 코트라 산티아고 무역관장은 “현지 한국기업들은 대부분 오후 2시30분부터 업무를 시작한다”고 들려준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우일렉 등 현지 한국기업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FTA의 첫 번째 효과는 ‘장사가 잘 된다’는 점이다.

실제 FTA 발효 후 대 칠레 수출액은 매년 사상 최고를 경신하는 중이다. 올해 8월 말 현재 한국의 대(對)칠레 수출액은 총 6억8800만달러. FTA 발효 직전인 2003년도 연간 수출액(5억1700만달러)을 8개월 만에 30% 이상 앞질렀다. 올해 8개월 수출성적표는 FTA 원년인 지난해 수출액 7억800만달러의 약 97%에 이른다. 현재 추세라면 올해 대칠레 수출 첫 10억달러 돌파도 무난해 보인다. 수출성장률은 더 가파르다. 지난해 전년 대비 37% 증가율이 올해 8월 말까진 62.2%로 껑충 뛰었다.

 구자경 관장은 “한국의 중남미 12개국 수출 평균증가율 35.1%에 비해 대칠레 수출증가율이 훨씬 높은 편”이라고 FTA 효과를 강조한다. 수출 면에선 갈수록 FTA 약발이 먹히고 있는 셈이다. 그 얘기는 곧 칠레 내수시장에서 한국산 제품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진다는 것. 반면 대칠레 수입은 올 8월까지 총 13억9900만달러로 증가율이 지난해 연간 82.8%에서 7.0%로 뚝 떨어졌다. 이쯤에서 일단 자료는 덮었다. 현장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싶어서였다.

 칠레서 처음 만난 사람은 2003년 3월 이곳에 유학온 나혜진(26)씨다. 국립 칠레대학에서 중남미지역학과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이랬다.

 “칠레 가정집에 가 보면 TV는 삼성, 세탁기는 LG를 씁니다. 거의 대부분 그럴 걸요.”

 나씨는 “FTA 발효 후 2~3개 사립대학에 한국어강좌가 개설됐다”라고 말했다. 자신도 칠레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유학생은 거의 없다. 칠레대학만 봐도 나씨 말고 문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정승희씨 두 명밖에 없다.

 칠레 학생들에게 한국이란 나라, 한국의 제품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궁금해 나씨에게 물으니, “품질 면에선 일본과 동급으로 취급받고, 가격 면에선 중국은 저가인 반면 한국은 중·고가 대접을 받는다”라고 한다. 특히 칠레인들에게 한국은 IT 강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게 나씨의 전언.

 실업률은 8.8% 수준인 반면 청년실업률은 10%가 훨씬 넘는다. 도서관엔 학생들로 꽉 차고 학교 앞에 술집이 없다는 점이 한국과는 다르다. 교정에 둘러앉아 칠레산 와인을 먹는 게 칠레 학생들의 술문화다. 대학원 학비도 인문계 기준 한 학기 250만원 수준으로 싼 편은 아니다.

 나씨는 “칠레에서 취업하면 첫 월급이 100만원 안팎이라 한국에서 취업해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 생활비는 원룸아파트 월세 40만원, 인터넷과 케이블TV 사용료 월 8만원을 포함, 한 달 평균 100만원이 훌쩍 넘는다. 지하철과 시내버스비는 350페소로 우리 돈으론 700원쯤 된다. 물가가 생각보다 싸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민들의 생활수준은 어떨까. 교민 약 370세대 1800여명의 80% 이상이 몰려 있다는 일명 ‘파트리나토’ 상가. 다운타운인 셉템브레가에서 택시를 탔다. 기본요금은 300페소(약 600원). 20여분을 달려 택시에서 내리자, 기사가 뽑아 준 ‘볼레타’(영수증)에 3000페소(6000원 상당)가 찍혔다.



 1800여명 교민 80%가 의류업 종사

 파트리나토에 내리자 2~3층짜리 건물에 10~20평 남짓한 옷가게들이 즐비하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 동대문의 평화시장 격이다. 한국 간판만 없을 뿐이지, 도심 길거리에서 한 명도 보지 못한 한국인을 이곳에서는 어렵잖게 마주쳤다. 전체 1200여개 상점 중 220여개의 주인이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재칠레 한인회 사무실에서 오후 6시 이순덕(63) 재칠레 한인회장을 만났다. 총무이사인 김용진씨와 교민신문 신면우 편집장도 함께 했다. 그들은 하루 전 산타이고에서 끝난 제 5회 세계여자주니어 월드컵하키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독일을 1대 0으로 이기고 우승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큰 경기라도 열리면 현지교민은 물론 한국에서 파견을 나온 주재원들까지 관심이 높죠.”

 1976년 파라과이를 거쳐 1979년 이곳에 들어온 이 회장은 칠레 이민 1세대다. 이들이 한인회를 조직한 것도 1978년 11월께다. 이곳 교민들은 대부분 파트로나토에서 의류, 직물, 액세서리, 잡화류, 도·소매업과 봉제공장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도 ‘폴리’라는 상점의 사장으로 현지에서 스웨터, 니트 공장을 운영하는 중이다.

 FTA 효과를 묻자 그의 대답은 신통찮다. “글쎄요.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데요. 왜냐면 교민들은 대기업이 아니거든요.”

 FTA 효과 본 건 자동차와 휴대전화, 전자제품 등 관세 6%가 면제된 대기업 제품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1년에 4~5차례 중국 광저우나 이우시에서 의류와 잡화를 들여와 파는 수입상들이다. 한 번 나갈 때마다 미화 4만~5만달러(약 4000만~5000만원)씩 들여온다. 따라서 이곳 한국인들은 연간 수입액만 3000만달러씩 들여오는 파트로나토의 ‘큰손’인 셈이다. 이 회장은  “10년 전만 해도 한국 동대문 일대에서 물건을 가져왔는데, 이젠 가격을 맞추지 못해 중국산 제품이 80~90%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이 중국산 제품을 팔고 있는 셈이다.

 요즘 경기를 묻자, 김용진 이사는 “한물갔어요. 상당수가 도심 곳곳에 들어선 ‘쇼핑몰’로 자릴 옮기고 있거든요”라고 거든다. 이순덕 회장은 “95년께만 해도 3만달러씩 물건을 들여오면 한 달 만에 다 팔리곤 했다”면서 옛날의 ‘무용담’을 들려줬다.

 이곳 쇼핑몰이란 3개 백화점과 대형슈퍼마켓, 홈센터, 약국, 멀티영화관 등으로 구성된 칠레유통의 중심지. 1981년 도입해 산티아고 시에만 7개의 대형쇼핑몰이 있다. 한국에서도 재래시장이 대형할인점 등쌀에 밀려 경기가 바닥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한국 교민들의 생활수준은 상급에 속한다. 대부분 산티아고 부촌으로 통하는 ‘강동’에 산다. 지역 이름으로는 라스꼰데스에 주로 많이 산다. 40~50평형 아파트에 살며, 자녀들은 한 달 교육비가 50만~100만원씩 하는 사립학교를 보내고 있다. 이 때문에 칠레에서 한국인들은 ‘잘 사는 사람들’로 비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칠레도 한국의 강남, 강북처럼 부촌과 서민촌이 명확히 갈라져 있다는 사실이다. 해발 400미터 고지에 있는 산티아고를 가로지르는 마뽀초 강이 기준이다. 해발 600미터 정도로 높아 별칭이 ‘높은 동네’인 강동은 부촌, 강서는 주로 서민들이 밀집해 산다. 

 칠레경기는 파트로나토상가의 경기와 별개로 상당히 좋다. 구리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칠레는 세계 1위의 구리 수출대국. “동(銅)가격이 파운드당 1달러만 해도 전 국민이 먹고 산다”란 말이 통하는 게 칠레다. 2003년 파운드당 80센트였던 게 2005년 9월 말 현재 1달러80센트까지 올랐다. 이는 15년 내 최고치로 구리 수출국 칠레의 호경기를 이끈 원동력이다. 이 때문에 칠레는 2002년 1.9% 수준이던 경제성장률이 2년 만인 2004년 5.9%로 뛰었고, 올해도 6%대 성장률을 기록할 전망이다. 올해 1인당 GDP도 6500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게 현지 관측이다.

 파트로나토상가에서 숙소인 메리어트호텔로 돌아오니 밤 8시이다. 김병섭 참사관, 김충일 삼성물산 산티아고 사무소장과 함께 ‘초심’이란 한국식당에 갔다. 2인분에 9000페소(약 1만8000원) 하는 삼겹살에 현지 술인 ‘삐스코’를 곁들였다. 삐스코는 알콜도수 35도짜리 포도주로 레몬즙을 뿌려 먹는 술. 한국 ‘소주’처럼 대중적인 술로, 인접국인 페루와 함께 칠레가 서로 원조를 주장하는 전통술이다. 이틀간 제대로 발 뻗고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삐스코 몇 잔이 들어가자 온 몸에 힘이 풀렸다. 칠레의 첫날밤은 삐스코와 함께 조용히 잠이 들었다.



 9월27일 칠레인들의 반응



 눈을 뜨자 아침 9시. 서둘러 짐을 챙겼다. 이날은 칠레의 한-칠레 FTA 평가를 짚어 보기로 한 날이다.

 먼저 칠레와 태평양 지역 국가간 무역연구를 하는 칠레태평양재단(Fundacion Chilena Del Pacifico)으로 갔다.

 2년 전 파라과이에서 칠레로 이민을 온 현지 통역인 김근호(30)씨가 운전하는 르노삼성자동차의 SM5를 타고 산티아고에서 보낸 첫날 느낌을 정리해 봤다. ‘남미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물가가 생각보다 싸지 않은 나라. 교민들 생활수준이 높은 편. 가정집마다 한국산 가전제품이 있는 나라….’

 오전 10시에 칠레태평양재단에서 만난 맨프레드 빌켈미 이사. 지난 9월 초 한국에서 열린 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PECC) 서울회의 때 참석한 지한파(知韓派) 인사다. 그는 한국과의 FTA 체결을 어떻게 볼까. 첫 질문은 ‘한국과 FTA 체결 후 달라진 게 뭔가’였다.



 “집집마다 한국산”… 칠레도 농산물서 덕봐

 “20년 전엔 한국제품뿐 아니라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인지도조차 없었죠. 10년 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메이드인 코리아’ 하면 가격 대비 고품질 제품으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양국간 무역량이 70% 늘었다는 얘기는 곧 한국제품의 경쟁력 확보란 말과 같습니다.”

 그 자신도 한국산 제품 애용자다. 냉장고는 LG 제품을 쓰고, 차는 현대자동차 엘란트라를 몬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 삼성의 휴대전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과의 FTA 체결 후 칠레 현지의 평가를 묻자, 그는 “기대 이상”이라고 짧게 말한 뒤, “일본이 긴장하고 있다”는 말로 대신했다.

 “지난해 4월 FTA 발효 후 한국제품이 일제보다 인기가 높을 만큼 인지도가 치솟고 있습니다. 이에 일본이 긴장, 한동안 교착 상태에 있던 일본-칠레 간 FTA협상이 탄력을 받고 있다고 전해 듣고 있죠.”

 중국은 가전업체 하이얼이 들어와 있지만, 아직 시장진입 초기단계이고, 중저가에 저품질이라는 인식이 강해 한국과 일본의 경쟁상대로선 아직 멀었다는 게 빌켈미 이사의 진단이다. 반면 그는 “양국간 교역량이 급증한 것과 한국산 인지도가 상승한 것은 긍정적인 반면, 한국의 대칠레 투자는 부진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FTA 다체결국가인 칠레에 한국기업이 한-칠레 조인트벤처를 세우면 세계 40여개국에 무관세 수출 기회가 있는데, 이를 외면하는 한국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목청을 한껏 높였다. 빌켈미 이사는 “칠레는 구리 등 광산개발의 여지가 많고 수산업이 발달한 나라”라며, “이쪽 분야에 한국의 투자가 기대한다”고 개인적인 의견을 밝혔다.



 ‘한-칠레 성공하자 일본이 긴장’

 자리를 옮겨 파트로나토에 있는 한국식당 ‘아리랑’으로 향했다. 칠레 중앙은행 초청으로 산티아고를 방문한 박승 한국은행 총재와 함께하는 오찬자리였다. 삼성전자, LG전자를 비롯해 칠레에 진출한 한국업체 법인장, 지사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칠레에 처음 왔다는 박승 총재가 “칠레는 경제여건이 어떤가?”라고 묻자, 모두들 돌아가며 대답을 쏟아냈다.

 “FTA 발효 후 한국산 제품에 대한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이곳 세탁기 점유율은 한국산이 50%가 넘습니다.”(LG전자)

 “6% 무관세 효과는 사실 크지 않습니다. 교역량이 급증한 것도 사실 FTA 덕택이기보다는 칠레 경제가 좋아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정확합니다.”(맹관호 현대상사 과장)

 “대졸 초임은 한국의 절반 수준입니다. 그러나 매니저급은 미국 수준입니다. 인건비만 본다면 칠레는 만만치 않은 나라죠.”(홍성직 삼성전자 법인장)

 “한국보다 ‘학벌지상주의’가 더 심하죠. 신분사회는 아니지만 학벌, 집안 배경에 따라 차별이 심합니다.”(강준규 대우일렉 과장)

 “부근 국가에 비하면 ‘남미기질’이 그다지 없습니다. 질서가 잡혀 있는 나라죠. 그런데 유독 자동차 운전대만 잡으면 성미가 급해집니다. 조금만 늦게 출발해도 여지없이 ‘빵빵’하고 경음기를를 울려댑니다.”(김병섭 참사관)

박승 총재는 “한국에서 주로 칠레 와인을 마셨는데, 칠레에서도 한국제품의 인지도가 높아졌다니 다행”이라고 짧게 말했다. 그는 “칠레 중앙은행은 독립성이 강해 금융통화위원 5명의 임기가 10년(한국 4년)으로 길다”면서, “그 결과 칠레 물가는 2~3% 이하로 안정돼 있다”고 밝혔다.(실제 칠레는 다른 중남미 국가와 달리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낮다. 칠레중앙은행 자료에 따르면, 칠레 소비자물가 추이는 2001년 1.4% → 2002년 2.2% → 2003년 0.7% → 2004년 2.1% 수준이다.)

 기자는 이날 오전 빌켈미 칠레태평양재단 이사가 던진 ‘왜 한국기업들이 칠레에 공장 투자를 하지 않느냐’는 문제를 꺼냈다. 그러자 현지 진출업체들의 반론이 쏟아졌다.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칠레는 전체 GDP 중 제조업 비중이 17%도 안 된다. 공장 투자가 쉽지 않다. 가령 현대자동차 공장을 세운다 치자. 그렇다면 수많은 자동차부품 공장이 동반 진출해야 한다. 현지 여건은 그만한 부품을 생산할 인프라가 없다. 결국 부근 나라에서 수입해야 한다. 그만큼 물류비용 등 제반 비용이 만만찮을 것이다. 칠레가 대부분 공산품을 수입해 쓰는 상황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칠레에서 만든다고 해서 모든 제품이 ‘메이드인 칠레’가 되어 칠레가 체결한 40여개의 FTA 국가에 수출할 때 무관세 혜택을 받는 건 아니다. 부품 등 많은 부분이 까다로운 원산지 규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인구 1600만명의 내수시장은 그 자체로는 큰 시장이 못 된다. 특히 칠레는 ‘섬’과 같다. 북쪽은 아타카마 사막, 동쪽은 안데스 산맥, 서쪽은 태평양, 남쪽은 남극으로 떨어져 있는 나라다. 종합적으로 판단한다고 해도 제조업 투자는 아직 여건이 맞지 않다.”

 오찬이 끝난 후 칠레 외교부로 향했다. 칠레정부의 공식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칠레 중심가인 ‘알라메다’ 거리에 있는 대통령궁 근처 외교부 빌딩에서 만난 이는 카를로스 푸르체 칠레 외교부 국제경제차관보다. 그는 한국으로 치면 통상교섭본부장이다.

 “FTA 발효 1년 만에 교역량이 60% 이상(2004년) 증가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가 던진 첫마디다. 그는 “칠레가 체결한 FTA 국가는 총 41개국인데, 경제효과 면에서 한국은 최상위급 파트너”라고 평가한다. 그는 “한국은 칠레의 아시아권 첫 FTA 체결국이고, 칠레는 한국의 FTA 체결 1호국”이라며, “칠레에겐 한국의 공산품이, 한국에겐 칠레의 농산물 교역이 늘어나 서로 윈(win)-윈(win) 효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산 제품은 FTA 발효 뒤 칠레에서 잘 나가고 있다. 잠시 자료를 찾아보자. 칠레 관세청에 따르면, 수입품 천국이라는 칠레시장에서 한국산은 올해 8월 말 누계 3.45%의 점유율로 랭킹 7위에 올라 있다고 한다. FTA 원년인 지난해와 순위는 같다. 그러나 점유율은 3.12%에서 0.33% 포인트 상승했다.

 특히 한국과 가장 많이 부딪히는 일본과의 대결에서 판정승을 거두었다. 일본은 지난해 3.57%의 점유율로 6위를 차지해 한국을 앞서 있다. 그러나 올 들어선 3.43%로 0.14% 포인트 미끄러졌다. 순위도 한국에 이어 8위로 떨어진 것이다.

 구자경 코트라 무역관장은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은 건 2001년 이후 4년 만의 일”이라며, “한국의 점유율 상승이 곧바로 일본의 점유율을 끌어내린 셈”이라고 분석한다. 반면 중국은 7.99%의 점유율로 미국,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이어 굳건히 4위를 지키고 있다. 칠레시장에서 한·중·일 3파전 중 하이라이트는 곧 한-일 대결로 압축되는 셈이다.

 일본 추월 일등공신은 올해 8월까지 대칠레 수출액(6억8800만달러) 중 2억3595만달러로 34.3%를 차지한 자동차의 선전이다. 금액으로 따지면 8개월 만에 지난해 연간 자동차 수출액 2억5000만달러와 맞먹는 수치다.

 100% 수입인 칠레 자동차 1위 수출국은 일본이다. 그러나 지난해 3위(금액기준)였던 한국이 올해 2위로 따라붙었다. 그것도 일본과 1% 이내 각축전 양상을 벌이는 중이다. 칠레 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8월 한국산 점유율은 23.22%. 1위 일본(24.01%)과 불과 0.79% 차이다. 한국과 일본은 3위 브라질산(생산지 기준으로 대부분 미국 차) 17.98%, 4위 아르헨티나산 14.02%를 멀찌감치 따돌린 상태다. 5위 멕시코산(4.99%)부터는 상대가 아니다. 현지에선 “올해 연말로 가면 한국산이 일본산을 누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한·일 대결이 하이라이트

 실제 칠레대학에서 만난 대학생 안드레 만수르(20)는 “내가 쓰고 있는 세탁기와 냉장고, 오븐, TV가 모두 LG제품”이라고 말했다. 칠레대학 공대 4년생인 조르게 로저스(22)는 “차는 현대, TV는 삼성, 냉장고는 대우”라고 말했다.

 한국산 전자제품들도 FTA 효과를 누리긴 마찬가지다. 저녁 8시 한국식당 ‘평양면옥’에서 만난 대우일렉 칠레법인 강준규(38), 이명근(39) 과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대우일렉은 대우그룹 소속이던 1993년 8월 진출 때부터 법인 형태로 진출한 유일한 한국 업체다. FTA에 때를 맞춰 삼성전자가 2003년 1월, LG전자가 2004년 1월 법인화한 것과 대조적이다. 사무실도 셋방살이가 아닌 직접 투자한 유일한 한국 회사다. 특히 LG가 브라질, 삼성이 멕시코 공장에서 들여오는 제품들이 상당수인 반면, 대우는 대부분 물량을 한국에서 공수해 온다. 그만큼 FTA 효과(6% 무관세 혜택)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대우일렉 칠레법인은 지난해 4300만달러(약 430억원)의 매출액을 올렸다. 이는 전년 대비 약 30% 성장한 실적. 올해는 5100만달러를 예상하고 있다. 대우일렉은 미국 마이애미에 있던 중남미본부를 올해 1월부터 칠레로 옮길 만큼 칠레에 공을 쏟고 있다. 강준규 과장은 “중국과 멕시코에서 들여와 팔던 TV를 모두 한국산으로 바꿨다”면서, “메이드인 멕시코보다는 ‘메이드인 코리아’가 칠레 소비자들에게 잘 먹히기 때문”이라고 들려준다.   FTA 효과가 사실상 한국의 제조업 공동화를 막아 주는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우일렉 칠레법인에서 인터뷰를 마칠 때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이렇게 저녁 식사를 늦게 하냐는 점이다. 돌아온 대답은 싱거웠다. “칠레 저녁시간은 보통 밤 9~10시이기 때문입니다.”



 9월28일 메이드인 꼬레아 붐



 칠레 국민 소비지출의 21%가 대형 쇼핑몰에서 이뤄진다. 향후 5년 내엔 27~28%로 확대될 것이다.”

 9월28일자 칠레 <엘 메르꾸리오> 신문에 나온 기사다. 칠레 유통혁명의 진원지가 바로 대형 쇼핑몰이다. 이곳은 칠레 백화점 매출액의 90%를 장악했다는 팔라벨라, 알마세네스 파리, 리플레이 등 3대 백화점을 필두로 레데르, 에코노 등 대형 슈퍼마켓, 홈센터(건축자재 등 집 단장용품점), 약국, 영화관으로 구성된 복합쇼핑몰.

 오전 11시15분 산티아고 라스꼰데스에 있는 대형 쇼핑몰로 향했다. 자료로 본 한국산 제품의 선전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라코스테와 보스, 크리스찬 디올 매장을 거쳐 팔라벨라백화점 1층 가전매장. 샤프(Sharp)와 NEC(니혼전기주식회사) 노트북컴퓨터로 시작한 가전매장 중 최대 격전지는 TV 분야다. 42인치 PDP TV 매장 최전방에 배치된 삼성과 소니 제품이 나란히 손님을 맞는다. 가격표를 보니 양사 제품 모두 189만페소. 한국돈으로 약 380만원이다.

 가전판매 담당인 안토니오 세고비아(31)씨는 “한-칠레 FTA 발효 후 한국산 제품이 많이 팔리고 있다”고 귀띔한다. 그에게 브랜드 순위를 매겨 줄 수 있냐고 묻자, 그는 대뜸 “1위는 소니, 2위는 삼성, 3위는 파나소닉”이라고 확언한다. 인지도 면에선 여전히 소니가 1위란 얘기다. 삼성전자가 건네준 칠레시장 내 브랜드 지위 자료를 보면, 소니가 64.2%로 가장 높다. 삼성이 근소한 차이인 62.0%로 2위다. 3위권은 필립스(38.2%)와 LG(33.4%)가 경쟁을 다툰다. 그 다음이 노키아(29.2%), 대우(28.6%), 파나소닉(27.6%) 순이다.

 그러나 매출액 순위는 또 다르다. 삼성전자 내부자료에 따르면, 2004년 말 CIF(운임 및 보험료 포함 인도) 기준 매출액은 삼성전자가 1억3100만달러로 소니의 6300만달러를 두 배 차이로 앞서고 있다. 실제 칠레 TV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은 삼성이다. 올해 6월 말 현재 삼성은 PDP TV 점유율 34%로, 24%인 소니를 크게 앞서고 있다. 삼성은 칠레에서 TV 외에도 DVD(42%), 디지털캠코더(46%), 양문형 냉장고(38%), 모니터(27%) 등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경쟁사 중 매출 면에서 삼성을 앞지른 회사는 휴대전화 1위 노키아(1억3900만달러)가 유일하다. 홍성직 삼성전자 칠레 법인장은 “올해엔 총 1억8400만달러 매출액(FOB 기준)을 올려 지난해 대비 30%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올해엔 내심 노키아 역전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게 삼성의 속내다. 삼성전자 칠레성적표는 FTA를 전후해 현격한 상승곡선을 그리는 중이다. 지난 2003년 매출액(FOB)은 8900만달러로 전년 8400만달러 대비 성장률은 7%에 불과했다. 그러나 FTA 발효 원년인 지난해 1억4200만달러에 달했다. 1년 새 59% 껑충 뛴 셈이다. 올해 8월 말 현재 누계 매출액은 1억2100만달러로, 빠르면 9월 내 2004년 매출액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순익은 지난해 180만달러에서 올해 8월까지 690만달러로 급격히 상승했다.

 LG전자도 순항 중이다. 지난해 1억100만달러 매출액(이끼께지점 실적 포함)에서 올해 당초 목표치인 1억3500만달러를 훨씬 능가한 1억6000만달러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실제 LG전자는 9월29일자로 연간 1억달러 매출을 돌파했다. 전 세계 LG전자 현지법인 중 법인 설립 2년차에 1억달러를 돌파한 것은 칠레가 최초다.

 윤종현 LG전자 과장은 “대형쇼핑몰 매출 비중에 지난해 60%에서 올해엔 65%까지 늘어날 전망”이라며, “판매 강화를 위해 1년 전 35명 수준이던 칠레인 직원 숫자도 현재 88명까지 늘렸다”고 말한다. 한국 주재원 숫자도 5명에서 7명으로 늘어 칠레 현지 진출업체 중 가장 많다. 특히 LG전자사무실에 붙어 있는 ‘글로벌 3’란 표어처럼 최단시간 내 삼성, 소니와 동급으로 브랜드파워를 올려놓겠다는 게 당면목표다.

 돈으로 따지기 힘든 효과 중 하나가 단축된 칠레와의 심리적 거리라는 평이다. 대표적 사례로 한국 관광객 증가를 들 수 있다. 칠레를 포함한 남미 12일짜리 여행 패키지상품의 가격은 약 400만~500만원선. 고가임에도 지난해부터 관광객이 전년 대비 2배가량 늘고 있다.

 산티아고 내 한국 현지 여행사는 두 곳. 대한항공 총판여행사 KTC와 아시아나총판인 지구촌이다. 이강민 KTC 팀장은 “한달 패키지 여행객 200여명과 시장개척단, 배낭족까지 포함하면 한 달 평균 한국인 관광객은 400여명 수준”이라며, “이는 2001년 9·11테러 뒤 대폭 줄었던 관광객이 FTA 발효를 기점으로 대폭 늘어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국 중소기업 사절단 현지 언론 관심

 오후 12시 매리어트호텔 지하 1층 연회장. 이곳에선 ‘2005 한국 무역투자 사절단 상담회’가 열리고 있다. 경기지방중소기업청 주관으로 한국에서 온 13개 업체 19명이 칠레 100여 바이어들과 릴레이상담을 진행 중이다.

칠레 주요 신문인 <엘 메르꾸리오>와 <에스뜨라떼히아>, <라 테르세라> 등에서 취재를 나올 만큼 현지 관심도 높다. ‘비즈니스뉴스’의 마케팅매니저인 세비스찬 보르바씨는 “삼성, LG는 칠레에서 인기 브랜드로 통한다”며, “FTA 체결 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친밀도가 훨씬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이일규 경기지방중소기업청장은 “통상 유럽과 동남아에 많이 다녔던 과거와 달리 FTA 체결 후 남미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 이곳을 찾았다”면서,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향후 3년간 매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절단으로 칠레를 찾은 송영철 대양테크 사장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칠레를 비롯한 남미 지역에 대한 수출 계획을 타진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오후 4시 기아자동차 칠레 디스트리뷰터인 부드니크(51) 디아사 사장을 만났다. 디아사는 기아자동차와 최근 도요타가 GM으로부터 인수할 것으로 알려진 스바루를 판매하는 칠레의 자동차 수입업체. 연간 1만대 총 판매량 중 7대 3 정도로 기아차 비중이 높다. 칠레에서 기아차가 판매를 개시한 1989년부터 16년째 기아 판매를 맡고 있는 부드니크 사장은 “옛날엔 초밥만 먹었는데 요즘엔 김치도 먹는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는 “올해 8월 누계치로는 23.22%까지 올라서 일본(24.01%)를 턱밑까지 추격하는 중”이라며, “FTA 체결이 없었더라면 정반대 결과가 났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실제 기아자동차는 6% 무관세 혜택을 고스란히 가격인하로 소비자들에게 돌려줬다. 칠레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기아차인 뉴리오의 경우, 1300만원인 가격 중 약 700달러(70만원)를 깎아서 팔고 있다. 현재 6.28% 점유율로 7위인 기아차를 향후 3년 내 10%대까지 끌어올린다는 게 부드니크 사장의 목표다. 칠레자동차협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3년 내 한국산 자동차 점유율은 약 30%로 늘어나 1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아직까진 ‘대기업 잔치’

 반면 현대차 디스트리뷰터인 리카르도 레스만(53) 길데마이스터 사장의 예상은 더 긍정적이다. 현재 칠레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3년 내 1위가 아니라 빠르면 올해 늦어도 내년엔 일본을 누를 것”으로 본다. 그는 이어 “현대자동차의 최대 경쟁사는 일본 도요타”라고 지목한다. 사실 도요타는 2002년까지만 해도 점유율에서 현대자동차에게 뒤졌다. 그러나 2003년 10.2%로, 9.0%에 그친 현대자동차를 따돌린 뒤 지난해 11.5%로 현대자동차(8.1%)와 간격을 벌린 강자. 미국 GM의 시보레(지난해 판매량 2만7000대 중 GM대우차가 5500여대로 약 21%를 차지)에 이어 도요타는 부동의 2위를 굳히는 듯 했다. 그러다 지난 8월 실적만 본다면, 다시 현대차가 11.57%로 11.55%에 그친 도요타를 재역전하는 데 성공했다. 8월 1798대를 판 현대가 1795대를 판 도요타에 단 3대 차이로 앞선 것. 레스만 사장은 “올해 8월 누계로 보면 현대가 9.99%로 도요타 11.70%에 뒤져 있지만, 현 추세가 이어져 내년엔 확실한 도요타를 추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장 큰 이유는 현대차의 가격경쟁력 확보다. FTA 발효 후 3% 가격을 내렸다. 그 결과 도요타 재역전 기회가 다가온 셈. 그러자 최근 도요타도 현대자동차 수준으로 가격을 인하, 지금부터가 ‘진검승부’라는 게 현지의 관측이다. 만약 FTA가 없었더라면, 최근 몇 년간 점유율 하락을 해온 현대자동차의 추락이 더 길어졌을 것이라는 게 레스만 사장의 지적이다.

 저녁 8시 홍성직 삼성전자 칠레법인장과 함께 한 저녁식사 장소는 일식집 ‘쇼군’. 식사를 마치고 삼성전자 사무실에서 자료 정리를 마치자, 자정을 훌쩍 넘겼다. 그때까지 홍성직 법인장과 장현석 차장 등은 퇴근을 하지 않았다.

 110여명에 달하는 12개 한국 현지 업체 주재원들은 보통 귀가 시간이 늦다. 보통 밤 9시(한국시간 오전 8시)에나 한국 본사에 ‘일일 보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쁜 업무가 끝난 주말엔 골프로 피로를 푼다. 현지 골프장은 하루 3만~5만원 정도면 이용 가능하다.

 주재원들은 과거 대부분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 출신들이다. 이 때문에 한국외국어대 출신을 ‘본대’, 스페인어과 출신을 ‘본과’라 부른다. 만일 타 대학 출신이면 ‘잡대’, 타학과 출신이면 ‘잡과’로 불린다. 요즘엔 잡대 본과 혹은 잡대 잡과 출신들도 많이 늘고 있다고 한다. 



  9월29일 향후 노릴 분야



 산티아고 취재 사흘이 지나자 서서히 FTA 평가가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대기업 잔치’로 끝난 상황이다. 실제 중소기업들은 ‘구경꾼’ 신세다. 산티아고에 진출한 한국 업체 명단만 봐도 그렇다.

 삼성전자, 삼성물산, LG전자, LG상사, 대우일렉, 기아자동차, 현대상사 등이 대표적이다. FTA 발효 후 칠레에 진출한 업체는 단 한 곳뿐이다. 운수창고업체인 위덱스가 올해 4월 셉템브레가에 현지법인을 세웠지만, 이제 초기 단계다. 12개 현지 업체 중 이건산업, 풍전 등이 대표적 중소(중견)기업이지만, 칠레 남쪽에서 목재업종에 종사하고 있어 FTA와 큰 상관이 없다.

 최근 한국국제협력단(KOICA) 7대 총재로 뽑힌 신장범 전 칠레 대사는  “FTA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는 대기업만 뛰어선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시장 다변화를 위해선 중소기업 수출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한국 의료기기업체 ‘세라젬’은 중소기업의 한 성공모델로 확인됐다. 오전 9시30분 라스 꼰데스 지역을 돌아보는데 세라젬 간판이 눈에 띄었다. 칠레 진출 한국 업체 명단에 빠져 있어 차를 세워 들어가 봤다. 세라젬 안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45개 무료 의료체험기엔 칠레인들로 꽉 찼고,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어림잡아도 100여명은 넘는 것 같다. 다른 한편에선 대기시간을 활용, 의료상식에 대한 강의를 듣는 사람도 50여명에 달했다.

 올해 3월 현지 법인형태로 칠레에 진출한 세라젬은 매체광고에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사업 6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무료체험에 이은 구전의 힘으로 산티아고에 벌써 4개 지점을 세웠다. 오문진 세라젬 대리는 “문을 여는 아침 9시 전에 이미 줄이 몇십미터는 서 있을 만큼 인기가 높다”며, “칠레는 남미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현재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베네주엘라 등에도 곧 진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실 교역량 증가로 대표되는 FTA 효과는 사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지 않다. 지난해 칠레 수출액 7억달러는 우리나라 2004년 수출액 2538억달러의 0.28%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칠레 수출액은 한국의 최대 수출국인 중국(2004년 약 500억달러)의 1.4%에 불과, 중국 수출액 1% 늘리는 게 칠레 수출액 70% 확대보다 파급력이 높은 셈이다. 양국 시장에서 한국은 공산품, 칠레는 농산물 분야의 시장 진입 가속화로 ‘서로 남는 장사를 했다’를 했다고 한다. 이런 평가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실제 칠레가 더 이득을 봤다. 지난해 대칠레 수출증가율은 37%에 그쳤지만, 수입액은 82%가 늘어난 것만 봐도 그렇다. 그 결과 대칠레 무역적자 폭은 2003년 5억4100만달러에서 지난해엔 12억2500만달러로 늘어나기도 했다. 지난해 1만2644곳의 한국 복숭아, 포도, 키위 재배농가가 폐업 신청한 것도 FTA에 부정적 여론을 키우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IT 분야가 첫 손 꼽혀

 그러나 교역량 평가는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력도 크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첫 FTA 파트너로 칠레를 택한 이유인 중남미시장 진출 교두보로서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분석.  구자경 코트라 산티아고 무역관장은 “아직까진 한-칠레 FTA 발효가 브라질, 아르헨티나 시장에 실제적 모멘텀(momentum, 물체가 한 방향으로 지속해서 변동하려는 경향)을 제공한 흔적은 없다”고 말한다. 특히 한국은 칠레의 강점인 막대한 자원의 효율적 활용에 눈을 떠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홍성직 삼성전자 법인장은 “한-칠레 FTA 효과는 사실 교역량 증가보다는 칠레가 보유한 자원 확보 차원에서 접근해야 바람직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한국이 FTA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칠레시장에서 뚫어야 할 유망 분야는 어떤 게 있을까.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게 IT 분야다.

 칠레는 중남미권에서 IT 인프라가 가장 잘 갖춰진 나라다. 휴대전화 보급률(2004년 말)은 956만대로 63.7%에 달한다. 한국의 SK텔레콤, KTF, LG텔레콤처럼 모비스타, 엔텔, 스마트콤 등 3사가 시장 90%를 장악한 상태다. 인터넷 사용자 수도 560만명으로 중남미권에선 유일하게 전체인구 대비 35%를 상회한다. 특히 칠레의 인터넷 접속비율은 일주일 14시간으로 독일과 스페인, 미국을 앞지른다는 통계다. 여기에 칠레 정부가 ‘칠레를 중남미 IT 허브로 구축한다’는 기치 아래 외국기업 투자유치에 적극적이다. 칠레 제2의 도시로 꼽히는 발빠라이소에 첨단기술 유치단지도 올해 완공할 예정이다.

 FTA 발효와 동시에 칠레공대에 설립된 한-칠레 IT협력센터(www.itcc.cl)로 달려갔다. 한-칠레 IT협력센터는 양국 정부가 100만달러씩 투자해 설립한 센터로, 한국전산원 교수인 윤병남 박사가 한국 센터장로 현지에 진출해 있다.

 윤 박사는 “칠레정부가 올해 1월 의회를 통과시킨 법 가운데 광산개발 수익의 일정금액을 첨단산업 육성비로 지원키로 했다”며, “올해 4000만달러에서 내년 7000만달러로 지원금을 늘려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구체적 투자유망 분야로 그는 “온라인게임과 전자태그(RFID), 무선인터넷, 인터넷전화(VoIP) 사업을 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센터는 올해 1월부터 칠레 버스정보화사업 기술자문 및 한국 측 파트너사를 발굴하고 있고, 칠레 전자정부 교육혁신사업으로 보급형 PDA 100만대 보급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윤 박사는 “한국의 강점인 IT 기술력을 칠레에서 꽃피울 수 있다”며, “특히 칠레정부가 일정 자격조건을 인정하면 현지 투자설비와 운영경비를 50% 대주는 제도도 갖춰져 있어 유망하다”고 강조한다.



 연 7조원대 정부조달시장 두드려 볼만

 칠레는 현재 E-정부 추진에 가속을 내고 있다. 올해까지 공공부문 초고속 통신망을 70% 구축할 예정이고, 모든 공공기관에 통합전자서비스 플랫폼을 구축할 목표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외국인 투자에 대해 칠레의 코트라 격인 ‘코르포’(CORFO=생산진흥청)가 다양한 인센티브를 내걸고 있다. 가령 100만달러 이상 투자시 기술교육비를 직원당 연간 3500달러씩 제공하고, 고정자산 구입비도 최대 50만달러 융자를 알선해 주고 있다.

 실제 한국 IT 업체의 성공 사례도 없진 않다. DVR, 원격 영상감시 솔루션업체인 W사는 2002년 11월 칠레 IBBS사와 ‘비전너리아’를 설립, 지분 30%를 보유한 회사다. 이 회사는 제품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2003년 60만달러였던 매출액이 지난해 130만달러로 두 배 이상 늘어났고, 올해엔 총 300만달러 매출을 기록할 전망이라는 게 코트라의 분석이다. 현지 진출 때 참고할 만한 현지 단체들은 칠레정보통신산업협회(ACTI), 칠레인터넷공급업자협회(API), 칠레소프트산업협회(GECHS), 칠레상공회의소(CNC), 칠레산업협회연합(SOFOFA) 등이 있다.

 구자경 산티아고 무역관장은 “칠레 정부조달시장이 입맛 당기는 분야”라고 말한다. 연간 70억달러(7조원)가 넘는 규모다. 일단 칠레는 행정절차의 투명성이 매우 강한 나라다. 100페소짜리 이쑤시개를 사도 영수증을 끊어 줄 만큼 탈세가 원천봉쇄된 곳이다. 한 현지업체 주재원은 “이곳에서 법인을 설립하면 한 달 내 세무서에서 조사를 나오는데, 담당공무원은 필요한 서류만 점검하고 10분 만에 자리를 뜬다”고 들려준다. 그만큼 예상치 못한 비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다.

  특히 올해 우리나라가 미주개발은행(IDB)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한 것도 호재다. IDB는 1959년 12월 라틴아메리카 국가를 중심으로 한 19개국이 미주기구를 기초로 설립한 미주개발은행.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제·사회 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자금 지원이 목적이다. 자본금은 8억5000만달러이고, 자본금·특별운용기금·사회개발신탁기금이 주된 자금원이다. 회원국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멕시코, 베네수엘라, 미국이 있고, 현재 사무국은 미국 워싱턴에 있다. 이를 통해 칠레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의 정부 발주 인프라 구축사업에 참여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기현서 주칠레 한국대사가 제안한 사업 분야는 크게 두 가지. 우선 농축산 및 수산 가공업 분야다. 기 대사는 “지금까진 한국이 칠레로부터 단순수입에 의지해 왔는데, 이를 개발수입으로 바꿔 보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기 대사는 온라인유통업을 유망 분야로 꼽았다. 칠레는 현재 대형 쇼핑몰 중심으로 유통혁명이 급격히 진행 중이다. 이는 1996년 유통시장 개방 후 할인점을 중심으로 유통 구조가 바뀐 한국과 비슷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칠레는 인터넷 보급률이 남미 최상위권인데다, 한국은 온라인유통 판매 경험이 축적돼 궁합이 잘 맞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칠레 1600만명 인구 중 600만명 이상이 산티아고에 몰려 사는 것도 온라인유통이 급속히 발전할 수 있는 토대라는 게 기 대사의 판단이다. 그러나 프랑스계 다국적 할인점인 까르푸가 최근 칠레시장에서 철수한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맥을 못 추기는 월마트도 마찬가지다. 인접국인 아르헨티나가 까르푸 천국인 것과 대조적이란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광산 분야도 우리가 눈여겨볼 시장이다. 한때 광업진흥공사가 칠레 국영광산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아직 전무하다. 반면 중국과 일본은 광산 쪽에 군침을 삼키고 있다. 특히 중국은 최근 코델코사에 700만달러의 지분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칠레 코델코사는 세계 최대 구리광산회사로 지난해에만 구리를 팔아 80억달러의 흑자를 낸 알짜기업. 한국도 한때 칠레 광산에 투자한 적이 있었다. 1991년 LG상사가 칠레 펠란브레 광산에 3000만달러를 투자했다가 IMF 직후인 1998년 철수한 전례가 있다. 만약 쥐고 있었다면, 최근의 구리 원자재값 상승에 따라 ‘대박’을 터뜨렸을 것이라는 게 현지의 분석이다.



 9월30일 칠레 유감(遺憾)



  칠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고, 오전 일정이 없어 늦잠을 잤다. 일어나 보니 오전 10시20분. 메리어트호텔 택시를 타고 코트라 무역관으로 향했다.  까를로스(36)라고 자신을 밝힌 기사는 “호텔전용 택시 35개가 SM5, 소나타 등 모두 한국산”이라고 말했다. 실제 FTA 발효 후 칠레인 치고 한국산 제품 하나 없는 집은 없을 정도로 칠레인 생활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코트라사무실에서 인터넷 속도를 점검해 봤다. 가장 빠른 전용선을 깔았다는 정덕래 과장 설명에도 속도가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현지에서 찍은 사진 30여장을 메일로 보내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시간에 육박했다.

 칠레는 3W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좋은 날씨(Weather), 좋은 와인(Wine), 예쁜 여자(Women)’가 3W다. 그러나 날씨와 와인은 수긍이 가는데 ‘아름다운 여자’는 와 닿지 않았다. 5박6일간의 짧은 일정 중 거리에서 만난 여인들은 모두 평범했기 때문이다. 구자경 코트라 관장은 “3W에 최근 2H가 추가됐다”고 들려준다. ‘친절한(Hospitable) 국민과 열심히(Hard) 일하는 근로자’라는 뜻이다. 실제 칠레는 남미권에서 치안이 가장 잘 돼 있다. 노동의 질도 나쁘지 않다. 기현서 대사는 “다른 라틴권 근로자에 비해 칠레인들은 정말 일 열심히 하는 국민”이라며, “남미권 소득 1위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칠레, 올해도 6% 고성장 예고

 칠레는 남북 길이가 약 4270㎞로 세계에서 가장 길쭉한 나라다. 비행기를 타고 칠레 끝에서 끝으로 가는 데 4~5시간은 족히 걸린다. 이 때문에 현지 주재원들 사이에선 서울에서 싱가포르 거리라는 말을 하곤 한다. 종교는 카톨릭이 85%로 가장 많다. 화폐단위는 페소로 100페소는 200원 정도 한다.  최근 페소화 가치는 급격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2003년만 해도 1달러당 750페소 하던 게 올해 3월 570페소로 달러 약세를 보인 후 9월 말 현재 540페소까지 떨어졌다. 연말께엔 500페소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 페소화를 사 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서울과 시차는 13시간 느리고 계절은 정반대다. 6월부터 9월까지가 겨울이고, 12월부터 3월까지가 여름이다. 한국과 다른 점은 여름에 비가 없고 겨울에만 비가 온다는 사실. 전국이 안데스 산맥으로 뒤덮인 칠레는 산티아고 산엔 나무가 없다. 이 때문에 등산이 취미인 사람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요즘 칠레경제는 정말 전도양양이다. 페소화 강세도 이 때문이다. 올해엔 1인당 GDP가 6500달러로, 지난해 5900달러에 비해 10% 높아질 전망이다. 경제성장률도 지난해 5.9%에 이어 올해 6%대 성장이 예고된 상태다. 이 때문에 1980년대 초 50%를 웃돌던 빈곤층은 2000년부터 20%(절대빈곤층 5.7%) 수준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그러나 상위 20%가 총 수입의 57.3%를 차지하고, 하위 20%가 총 수입의 3.7%를 차지하는 극단적인 빈부격차는 여전하다.



 중-칠레 FTA 코앞, 한국 긴장

 시장 특징은 제조업 비중이 GDP 17%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입품 천국인 대표적인 자유무역국가로 꼽힌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41개국과 FTA를 체결한 배경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칠레 FTA 1년 6개월이 지난 현재 칠레엔 한국산 전자제품과 자동차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들 또한 한국과의 FTA 체결을 쌍수 들어 환영하는 눈치다. 자국 포도주와 삼겹살 등 농산물과 구리 등 광산물이 한국으로 대거 수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밤 10시쯤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올 때보다 더 걸린다는 장거리 비행길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구자경 코트라 산티아고 무역관장은 “보통 서울에서 산티아고로 올 때 이틀, 서울로 돌아갈 때 사흘 걸린다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말한다. 



  10월1일 굿바이 칠레



 FTA 발효 1년 6개월이 되던 날, 칠레 산티아고에는 한국산 제품들이 활개를 펴고 있었다. 길거리 자동차가 그렇고, 휴대전화, TV가 그렇다. 그러나 칠레에 진출한 현지 한국 업체들은 긴장한 낯빛이 엿보인다. 곧 중국이 칠레와 FTA 협상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기 때문이다. 의류와 잡화 등 생활용품시장을 석권한 중국이 이젠 전자제품은 물론 자동차(중국 ‘질리’사)에 이르기까지 칠레시장 잠식 가속화는 예고된 상태다.

 현지에선 빠르면 내년 초 늦어도 1년 내 중-칠레 FTA가 발효될 것으로 관측한다. 올해 11월 칠레의 북쪽 관문이자 페루와 볼리비아로 통하는 칠레 최북단 도시 ‘이끼께’에서 ‘중국상품박람회’가 열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칠레정부가 중국과 FTA 체결한 뒤 1만여명의 중국 이민을 받을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여기에 일본은 남미 진출 교두보로서 칠레와의 FTA에 바짝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전언이다. 칠레는 한·중·일 3국의 남미 FTA 전쟁의 최대 격전지로,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이 점이 칠레 현지에서 5박6일간 취재를 마치며 느낀 최후의 결론이다.

 10월1일과 2일은 주말을 활용, 페루 마추피추와 함께 남미 최대 관광지로 꼽히는 이과수 폭포를 다녀왔다. 10월3일 현지시각 밤 11시, 산티아고발 오클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클랜드에서 다시 인천행 대한항공으로 갈아탄 뒤 인천에 도착하니, 한국시간 10월6일 아침 6시45분을 가리켰다.



 인터뷰 ① 카를로스 푸르체 칠레 외교부 국제경제차관보

 “서로 남는 장사하고 있다”




 레 대표적인 도로인 알라메다 거리엔 대통령궁이 있다. 관광명소로 개방된 대통령궁을 지나면 개·보수 공사가 한창인 외교부 건물이 나온다. 9월27일 오후 4시(현지시간) 이곳 2층 집무실에서 카를로스 푸르체 칠레 외교부 국제경제차관보를 만났다. 그는 한국으로 치면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같은 업무를 보는 사람이다. 미리 보내준 질의서에 A4 3장짜리 분량으로 빼곡하게 쓰여 있는 답신서를 갖고 나왔다. 비서가 남자인지 차를 가져다주는 게 이색적이다.



 - 한-칠레 FTA 발효 1년 6개월이 지났다.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면?

 매우 긍정적이다. 일단 교역량이 큰 폭으로 늘어난 게 무엇보다 고무적이다. 발효 첫해인 지난해엔 총 60%가 증가했다. 올해 상반기만 본다면 칠레의 대한국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6.9% 증가했고, 한국의 대칠레 수출은 69%나 늘어났다. 한국의 칠레 투자도 괄목할 만하다. 지난 1974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 투자는 4000만달러였는데, 지난해에만 1000만달러가 일어났다. 특히 한국은 칠레가 FTA 첫 상대국이고, 칠레에게 아시아 국가 첫 파트너로서 한국은 의미가 깊다고 본다. 단순히 교역량 증가보다는 양국간 친교강화의 무대가 됐다는 점이 더 큰 의미이다.

 - 칠레는 FTA 체결 면에서 세계 선두권이다. 몇 개 나라와 맺었는가?

 나라 숫자는 따져봐야겠다.(그는 펜으로 써 가면서 대답했다.) 일단 EU 25개국, EFTA 4개국(노르웨이, 스위스,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미국, 캐나다, 멕시코, 한국, 중남미 5개국, 태평양 3개국(싱가포르, 뉴질랜드, 브루나이) 등 41개국이다.

 - 한국과의 FTA 체결이 만족스럽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세계 41개국 중 칠레 만족도를 순위를 매긴다면 어떻게 되나?

 (한참 생각한 후 웃으면서) 순위를 매기긴 어렵다. 그러나 최상의 파트너 중 하나라고 하면 대답이 되겠는가. 발효 첫 해 교역량이 60% 증가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칠레 입장에서 무엇보다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평가다. 실제 한국과 FTA 체결한 후 칠레는 중국, 일본과의 FTA 체결에 탄력을 받고 있다.

 - FTA 발효 후 한국제품에 대한 현지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나.

 사실 한국산은 FTA 체결 이전부터 칠레 소비자들이 잘 쓰고 있었다. FTA 발효 후엔 가격경쟁력이 더 증가했다고 본다. 따라서 한국제품이 더 많이 팔린 것이다. 길거리만 돌아다녀 봐도 한국산 제품이 넘쳐난다.

 - 개인적으로 한국제품도 쓰고 있나.

 TV와 DVD 제품이 한국산이다. 삼성과 LG 제품인데, 어떤 게 삼성이고 어떤 게 LG인지는 집에 가 봐야 알 것 같다.

 - 한-칠레 간 중소기업 교류는 부족한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대기업만큼은 아니지만 중소기업 교류도 활발하다. 한국 코트라와 함께 프로칠레(한국의 코트라 기능)는 상호 기업 교류가 많다. 곧 결실을 맺을 것으로 본다.

 - 칠레 통상교섭본부장으로서 칠레의 매력 포인트를 설명한다면.

 일단 41개국과 FTA를 맺고 있어 전 세계 통상의 중심 국가로 떠올랐다고 본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투자할 가치가 있다. 특히 세계 최대 생산량인 구리를 비롯해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수산업과 포도를 포함한 농업에 강점이 있다.

 - 칠레는 현재 중국과 일본 등과도 FTA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어디까지 왔는가.

 중국과는 올해 10월 베이징에서 열리는 5차 중-칠레 회담 때 FTA 협상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APEC정상회의에서 라고스 칠레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FTA 최종협상 완료를 선언할 것으로 기대된다.(여기서 중-칠레 FTA 발효 시점을 묻자, 그는 대답할 수 없다며 즉답은 피했다.) 일본과는 현재 시장조사 단계다.

 - 칠레는 동 세계 최대 수출국이다. 벌써 중국은 칠레 최대 광산업체인 코텔코사에 25% 지분투자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는가.

 투자에 문제는 전혀 없다. 다만 한국기업들이 세계 다른 나라에 이 분야에 진출한 건 흔치 않은 일로 안다.

 - 한국은 칠레에 공장이 없다. 인구가 작고 엄청나게 먼 나라다. 이 때문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많다.

 칠레 인구는 1600만명 수준으로 한국에 비하면 작다. 그러나 공장투자시 칠레 회사나 한국 회사나 제한을 두지 않는다. 차별도, 투자제한 폭도 전혀 없다. 다른 중남미권에 비하면 비즈니스하기에 좋다는 얘기다. 특히 FTA 체결국이 많아 이를 인구로 따져 보면 10억 인구가 넘는다. 세계 진출 교두보로 활용하길 바란다.



 인터뷰 ② 기현서 주칠레 한국대사

 IT, 식품가공, 광산개발 노려볼 만



 현서 주칠레 한국대사는 코트라 입사 후 첫 출장지가 칠레였다. 그때가 1980년 11월이다. 그 후로 총 7번을 다녀갔다. 그는 2002년~2003년 멕시코시티에 있던 코트라 초대 중남미지역본부장을 지낸 중남미통이다. 9월28일 오전 10시 그를 만났다.



 - 코트라 출신 첫 대사다. 중남미 전문가로 알려져 현지선 기대가 많다.

 해외 주재 14년 6개월 중 스페인 생활 1년 8개월을 뺀 12년 가까이 중남미에 보냈다. 9월13일 부임했으니 아직 대사 신임장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셈이다. 최선을 다하겠다.

 - 가장 역점을 두는 분야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특명전권대사다. 정무, 경제통상, 문화홍보, 재외국민 업무 등 많다. 이는 모두 한 몸뚱이 업무다. 정무관계가 좋아야 양국간 통상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 중남미시장에서 칠레시장의 특징은?

 중남미시장은 한국에게 신개척시장으로서 의미가 크다. 실제 지난해 중남미 수출로는 처음으로 100억달러를 돌파했다. 중남미는 크게 멕시코를 중심으로 한 중미권과 칠레를 관문으로 한 남미권 등 투톱(TWO-TOP)체제다.

 칠레도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가 상존한다. 우리 기업의 해외진출시 최우선 고려대상은 인건비와 자체 시장규모다. 이런 측면에선 기업투자가 어렵다. IMF가 전망한 칠레의 1인당 국민소득은 6561달러 수준이다. 이를 구매력패리티(PPP)로 조정한 금액은 1만2254달러이고, 인건비 측면에선 장점이 없고 인구 1600만명은 내수시장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반면 칠레가 갖고 있는 유리한 측면을 고려하면 이런 부정적 요소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첫째, 칠레 기업환경은 예측 가능하다.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유럽처럼 안정된 나라다. 변수가 없어 불필요한 비용 부담이 없다. 둘째, 외환의 안정성이다. 바스켓시스템을 통해 환율은 변동되고 있지만, 안정성이 높아 환위험노출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셋째, 부패가 없다. 국제투명성기구에 따르면, 칠레는 2004년 투명도가 세계 20위권으로 한국 47위보다 훨씬 높다. 이 같은 인프라는 칠레가 남미에서 브라질에 이어 최대 투자국이 된 배경이다. 

 - FTA 1년 6개월이 지났다. 현지에 와서 본 느낌은 어떤가?

 오자마자 코트라를 비롯, 산티아고에 진출한 현지 한국 업체 법인장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내가 던졌다. 돌아온 답은 ‘상당히 효과가 있다’는 똑같은 대답이었다. 내가 여기 와서 본 것도 마찬가지다. 길거리에 자동차나 휴대전화, 백화점의 가전매장을 가 보면 한국의 높아진 위상을 실감할 것이다.

 - 중소기업이 진출 가능한 분야를 어떻게 보나.

 사실 의류나 신발, 가정용품은 어렵다. 이쪽도 중국산이 범람하고 있어 승산이 없다. 내가 볼 땐 정보통신 분야와 식품가공 분야를 꼽고 싶다. 정보통신 쪽에선 통신보다는 정보 분야가 유망하다. 칠레는 IT 분야에서 남미의 교두보 역할이 가능하다. 칠레기업과 제휴를 통한 방식이 유리하다. 우리와 칠레정부가 IT협력센터를 함께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IT를 기반으로 하면서 통신 쪽으로 융합시키는 사업 분야가 꼽힌다. 정부의 전자정부 구현 참여, 민간부문의 정보화 수요창출 및 사업 참여, 포털사업, 전자상거래사업, 컨텐츠사업 등이다. 식품 쪽에선 요즘 칠레산 삼겹살 수입이 늘고 있다. 지금까지의 단순수입을 ‘개발수입’으로 바꿔 보자는 게 내 아이디어다. 한국 업체가 이곳에 농장을 사육해 수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다시 말해 우리 기업이 칠레에서 양돈을 하고 가공까지 현지에서 한 뒤 우리나라에 수출하거나 제3국에 수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업을 하다 보면 연관해서 사료 제조사업으로 다변화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칠레 사람들은 한국이 직접 제조업 공장을 투자하면 칠레가 맺고 있는 41개국에 달하는  FTA 체결국에 무관세로 수출할 수 있어 유리하다면서 투자를 권한다. 반면 국내업체들은 시장이 작아 공장투자는 효과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나?

 공장투자는 효과적이지 않다고 본다. 1500만명의 내수로는 한계가 있다. 또 이곳 인건비 수준이 한국의 70~80% 수준이라 생산비용도 동남아시장에 비해선 매력적이지 않다. 따라서 상대적 고인건비를 상쇄할 수 있는 분야를 찾는 게 중요하다. 칠레의 매력포인트 중 하나는 저렴한 원자재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광산개발에 직접 참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광산개발은 원론적으로 개발 수입하면 안정적인 자원의 확보가 가능해 유리한 측면이 많다. 그러나 이는 투자회수까지 기간이 오래 걸리고, 투자 덩치가 커서 쉽지 않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향후 관련 기관과 적극 파악해 볼 만한 분야라고 본다.  협찬 | 삼성그룹·(주)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