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그룹회장은 주변에 있는 소수 인사들의 의견을 들어 경영에 반영하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아야 서너 번이다. 특정 개인이 정 회장의 의사결정에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정몽구 회장은 어찌 보면 고독하게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고집스럽고 단호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 제도도 그렇게 시작됐다.
 대자동차는 요즘 미국시장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다. 그렇다고 시장 1~2위를 다투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와 같은 천덕꾸러기 대접은 받지 않게 됐다. 어느 정도 스타일리쉬하고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나름대로 강점을 지닌 세단과 SUV로 선진 업체를 바짝 추격하는 업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대차가 미국시장에서 이렇게 선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 제도를 빼놓을 수 없다.

 2000년1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북미(北美) 국제 모터쇼’의 현대자동차 전시관에는 많은 관람객들이 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싸구려 차로 알려져 있었던 현대차 전시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단순히 차 자체뿐 아니라, 전시관 상단에 큼지막하게 내건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라는 현수막 때문이었다. 관람객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 놓았다.

 “정말로 10년, 10만마일 운행기간 동안 무료로 수리를 해준다는 말인가?”, “현대자동차가 10년을 타도 버틸 정도로 성능이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돈이 많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정책이 결국 소비자를 상대로 한 사기(詐欺)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등의 의심어린 질문들을 쏟아냈고, 전시장에 나온 현대자동차 미국 판매법인(HMA) 직원들은 대답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당시 현장에서 함께 전시관을 오픈했던 미국과 일본, 유럽지역 자동차 업체 직원들은 “저런 식으로 오랫동안 무상 보증수리를 해주다간 회사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문 닫고 말 것”이라며 걱정을 했다. 일부에서는 “현대차가 소비자들을 상대로 마케팅 실험을 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현대차는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 마케팅 전략을 통해 미국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현대차가 미국시장에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 제도를 도입한 것은 지난 98년 하반기 무렵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만만찮은 내부 반대가 있었다. 물론 현대자동차의 전통적인 의사결정 방식 과정을 보면 그 어느 누구도 정몽구(鄭夢九) 회장의 의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제안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안팎으로 반발이 심했다. 이전까지 현대차는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3년 & 6만마일 무상보증’ 정책을 펴왔다. 현대차 내부에서는 솔직히 자기 회사 차에 대한 품질에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여서, 3년 보증 자체도 불안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언제 고장 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차는 잘 팔리지 않고, 미국 현지의 딜러들은 앞길이 막막한 상태였다.

 이때 일부 딜러들 사이에서 털어내기 차원에서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라는 ‘과격한’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막바지 승부수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대리점 주인이 개인 부담을 질 수 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들어맞았다. 일부 대리점에서 소리 소문 없이 시작한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 방침이 조금씩 효과를 보고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현대자동차 미국 판매법인을 이끌던 현지인 사장의 귀에 들어갔고, 즉각 서울 본사에 보고됐다. 하지만 미국법인은 물론, 현대차 본사에서도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더욱 많았다. 3년 & 6만마일 무상보증도 위험한 판국에, 무슨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이란 무리수를 두느냐는 지적이었다.

 이 같은 정황을 모두 보고받은 정몽구 회장은 잠시 고민을 했다. 정 회장 입장에서는 다른 업체들과 똑같이 했다가는 미국 시장에서 영원한 삼류차로 남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했다. 결단을 내려야했다.

 원래 정몽구 회장은 주변에 있는 소수 인사들의 의견을 들어 경영에 반영하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아야 서너 번이다. 특정 개인이 정 회장의 의사결정에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정몽구 회장은 어찌 보면 고독하게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고집스럽고 단호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주변의 그 누구도 선뜻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 회장은 그렇게 발표하라고 지시를 했다. ‘미친 짓’이라는 소리가 국내 언론에서도 나왔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은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밀어붙여”라는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사실 1998년에 현대차 회장으로 취임한 정몽구 회장으로서는 그렇게 승부를 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정 회장이 회장에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경제는 IMF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으며 종업원의 25%를 감원할 정도로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현대는 1998년에 라이벌이었던 기아자동차를 합병하게 된다. 이렇게 어수선한 속에서도 과감한 마케팅 전략을 선택한 것은 오너 경영체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회장,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 올려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를 세계 5위의 자동차 회사로 변모시키겠다고 공언했을 때나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 방침을 밝혔을 때 외부의 반응은 모두 냉담했다. 정 회장이 그런 대담한 선언을 하기 이전에 현대차 간부들은 독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였고, 타 부서와 협력할 줄 몰랐다. “문제가 발생하면 각각의 부서는 서로를 비난하기에 바빴다”라고 당시 고위 임원은 밝혔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은 변화를 주도해 나갔다. 몇 년간의 현대자동차서비스 경영을 통해 그는 품질 문제가 회사의 가장 큰 문제라고 결론 내렸고, 대대적인 품질혁신을 기하면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도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현대차는 처음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 제도를 도입하면서 1999년 한 해 동안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자 2000년부터는 대대적인 광고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7월부터는 계열사인 기아자동차도 미국 수출차량에 대해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를 도입했다. 지난 8년간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 전략은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타임(TIME)>은 지난해 4월25일자에서 현대차의 미국 시장 호조를 극찬했다. 현대차는 2004년 미국 시장에서 41만 9000대를 판매하였으며, 이는 1998년 대비 360% 증가한 기록이다. 미국 시장에서 현대차 판매대수는 1998년만 해도 9만 1217대에 불과했으나 1999년 16만 4190대, 2000년 24만 4391대 등 이후 급상승세를 기록했다. 여기에는 GM을 비롯한 미국 자동차 업체들이 상대적으로 죽을 쑤면서 반사적 이익을 얻었다는 측면도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 전략을 통한 과감한 승부수가 큰 힘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최근 <뉴욕타임즈>와 <월스트리트 저널> 등 미국의 유명 언론들은 잇따라 자동차 특집면 등을 통해 현대차의 성공을 대서특필해왔고, 자동차 전문 평가기관인 JD파워와 소비자 조사기관인 컨슈머리포트 등은 현대차의 성능과 소비자 만족도가 높아졌다는 보고서를 잇달아 발표했다. 미국시장의 판매증가 덕분에 정몽구 회장의 명성도 높아졌다. 정 회장은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르는가 하면, 미국 경제전문 주간지인 <비즈니스위크 아시아판>의 표지인물로 등장하기도 했다.



 ‘무상보증수리’ 전략, 절반의 성공

 현대차는 일단 미국 시장에서 자신감을 가지면서 현지 생산도 가속화하고 있다. 이미 현대차가 미국 앨라배마주에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고, 기아차는 미국 조지아주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현대차가 미국에 현지공장 설립을 추진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서울 양재동에 있는 현대자동차 본사 사옥에는 미국 주시자들이 잇따라 찾아오기도 했다. 앨라배마주와 오하이오주 주지사는 물론이고, 켄터키주·미시시피주·미주리주 주지사들도 다녀갔다. 물론 자기 지역에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현대차가 처음 미국에 진출할 때 미국 정부의 자동차 형식승인을 얻기 위해 기술진들이 밤을 지새웠던 시절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다. 이러한 발전의 기초에는 모두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라는 마케팅 전략이 자리 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현대차의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수리 전략을 두고 경쟁관계에 있는 일본 업체나 국내의 GM대우차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미국시장에서 판매되는 자동차 브랜드 가운데 밑바닥에 있던 ‘현대’를 몇 단계나 끌어올리는데 일단 성공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은 것이 사실이다.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무엇보다 급하게 시행하다보니 철저한 사전조사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무상보증 수리 기간을 결정하는 문제는 보험회사가 보험료를 결정하는 것처럼 복잡한 문제다. 2만개에 달하는 자동차 부품의 수명이 제각각 차이가 나는 점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물론, 사전에 시험가동을 통해 치밀한 데이터를 확보한 뒤 무상보증 수리 기간을 늘릴 경우의 이익과 손실을 계산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현대차가 이런 분석 작업을 거쳤는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현대차 내부에서조차 5년 후 또는 10년까지 들어가는 무상보증 수리비용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비용이 증가하고 수익성은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 제도는 일종의 할인판매와 같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무상보증 수리 기간을 1만마일 늘리면 자동차 1대당 연간 5만∼6만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매 측면에서 보면 자동차 가격을 그만큼 싸게 해 주는 셈이다.

 이제 10년 & 10만마일 보증수리 제도를 도입한지 8년 정도 지났고, 수리비용이 점차로 늘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이 보증수리 제도를 유인(誘引)으로 하여 판매한 차량대수와 비교하면 이제 부담을 느낄만한 시점도 됐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차도 미래의 무상보증 수리 비용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 충당금을 쌓고 있긴 하다. 하지만 수리비용이 충당금을 초과할 경우 수익성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문제는 자신 있게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를 내세울 만큼 품질이 뒷받침해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현대차를 포함한 국산 자동차의 품질 수준은 상당히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자신할 수준은 아니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리콜(Recall·제작결함에 따른 무상교환 수리) 뉴스는 간헐적으로 계속 나오고 있다. 리콜은 자동차 업체가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실시하는 것이긴 하지만 리콜 횟수가 많을 경우 자동차 업체의 품질관리가 그만큼 허술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현대차는 “최초 신차 구입자에게만 무상보증 혜택이 있고, 중고차 구입자에게는 혜택이 없다”면서 “미국 소비자들의 자동차 교체주기가 평균 5년 안팎이기 때문에 우려하는 것보다 무상보증 수리비용이 적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루에도 수백 마일씩 차를 몰아야 하는 미국 영업사원의 입장에서 보면 현대차가 내건 10년 & 10만마일 무상 보증수리 조건은 ‘공짜 판매’에 가까운 파격적인 조건이다. 또 직장을 은퇴하고 앞으로 더 이상 차를 바꿀 생각이 없는 노인들도 10년간 추가적인 수리비용이 필요 없는 현대차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현대차를 집중적으로 구입할 경우 무상보증 수리비용은 현대차의 예상보다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차의 10년 & 10만마일 무상보증 수리 전략은 현대차의 미국시장 진입을 한층 용이하게 만들고 현지시장 진출을 가속화시켜주었다는 공로를 남겼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변의 우려를 물리치고 승부수를 띄운 정몽구 회장의 결단은 돋보인다고 평가해도 괜찮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