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쥐잡기의 날’(4월11일)을 창안했던 전순표(70) 세스코 회장. 그는 요즘 말로 ‘블루오션 개척자’다. 29년 전 창업 당시 ‘100원짜리 쥐약이 전부’였던 쥐잡기를 현재 해충방제 산업이란 비즈니스 반열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사업을 위해서라면 박사 체면도 버렸던 그다. 동네 슈퍼를 돌며 ‘쥐잡기’ 영업을 했던 그의 겉모습은 영락없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다. 어느새 칠십 대에 들어섰지만 그의 열정은 식을줄 모른다. 최근엔 ‘개미 박멸’을 외치고 있다. 1970년대 쥐에서 출발, 80~90년대 바퀴벌레에 이은 세 번째 도전에 나선 그를 만났다.

 “70대처럼 보입니까.” 서울 둔촌동 세스코빌딩에서 만난 전순표 회장의 첫마디였다. 실제 그는 희끗희끗한 머리만 염색해도 50대 후반쯤으로 보일 것 같았다.

 비결을 묻자 “국선도 덕분”이라고 대답했다. 벌써 20년째란다. 단전호흡을 위해 서울 역삼동 자택 2층을 아예 ‘국선도 홀’로 바꿨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꼬박 2시간 국선도로 단련한다. 외국에 출장 가서도 매트리스 깔아놓고 할 정도로 국선도에 푹 빠져 있다.

 전 회장은 “유연성은 20대 뺨치는 수준일 것”이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칠십 나이에 경영 일선을 지키는 힘도 이런 건강에서 나온 듯싶다.

 전순표 회장에게는 별명이 몇 개 뒤따른다. 강원도 정선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지름종아리’로 불렸다. 1000여종이 넘는다는 정선 민물고기 중 하나로 미꾸라지 비슷한 종류다.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 물고기니 머리가 좋고 영리하다는 뜻이다.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별명은 ‘짠돌이’다. 직원들 회식 때 ‘자장면 회식’을 하고 5명 가족 외식 때면 4인분만 시킨 뒤 공기밥을 하나 추가하는 식이다.

 하지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그의 별명은 ‘쥐박사’다. 해충방제업을 오래 해왔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만은 아니다. 실제 그는 1973년 동국대 대학원에서 국내 1호로 쥐박사 학위를 땄다. 논문명이 ‘한국산 집쥐의 생태 및 방제에 대한 연구’다.

 전 회장의 별명 세 가지는 모두 세스코를 키운 비결로 꼽힌다. 지름종아리는 탁월한 ‘위기관리능력’으로, 짠돌이는 ‘군살 없는 경영’에 따른 수익성 극대화로, 쥐박사는 국내 1위 해충방제업체를 키워낸 전문성으로 세 별명 모두 세스코의 성장 엔진 역할을 한 셈이다.



 당시 차균희 농림부 장관에 ‘혼쭐’나기도  

 그의 창업 스토리는 드라마 같다. 그는 “세스코 출발점은 밥상머리에 떨어진 한 톨의 밥알이었다”며 옛 생각에 빠진다. 고지식한 시골 면장 출신인 그의 부친은 낭비를 못 참는 성격이었다.

 “해방 원년인 1945년, 내가 10살 때였죠. 밥 먹다 밥알을 흘리자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5남1녀, 6남매를 제대로 먹이기엔 공무원의 박봉으로는 힘에 부치셨겠지요.”

 선친 말씀은 그로부터 16년 뒤, 동국대 대학원 졸업 직후 1961년 농림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전 회장 가슴속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의 보직은 당시 농산국 재해대책계. 주된 업무가 ‘쥐잡기’였다.



 #성공 키워드 1 열정

 “한번은 지방 양곡창고를 둘러보다 까무라칠 뻔했습니다. 창고 문을 열자 쥐들이 쏟아지는 겁니다. 쌀을 갉아먹고 있던 쥐떼를 본 순간 오래 전 부친 말씀이 떠올랐어요.”

 그를 더 놀라게 한 건 창고 담당자의 말이었다. “1년 농사 중 10%는 저 녀석들이 다 먹을 겁니다.”

 당시 전국 양곡창고에서 쥐가 먹어치우는 쌀은 하루 1200톤. 연간으로 치면 300만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기가 막혔다. 보릿고개를 잡으려면 ‘(쌀) 증산이 아니라 쥐잡기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말단 공무원의 주장에 관심을 가지는 고위직은 없었다.

 하늘의 계시였던가. 1962년 영국 정부가 양곡저장 피해방지를 연구하는 장학생을 보내라는 전갈이 왔다. 그에게는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장학생 시험에 합격한 그는 2년간 영국 런던대학서 쥐 연구에 골몰했다. 내친김에 귀국 후 박사학위까지 딸 정도로 쥐잡기에 매달렸다. 65년 ‘쥐잡기의 날’을 창안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옛날 일을 생각해보면 우스운 기억도 많죠. 한번은 예산국에 쫓아가 끝까지 우겨 예산을 타내 전국 농가에 쥐약을 줬습니다. 한 집당 최소 1kg은 돌려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 100g밖에 못 줬죠. 문제는 영국서 수입한 쥐약이 맹독성이 아니라 지효성 약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엔 쥐들이 오히려 쥐약을 먹고 토실토실 살만 쪘지요. 이 때문에 당시 차균희 농림부 장관이 국회에 불려가 의원들에게 ‘살찌는 쥐약’을 줬다며 ‘봉변’을 당했습니다. 물론 저도 무척 혼났구요.”

 그는 승진할 때마다 엉뚱한 부서로 옮겨다녔다. 박사까지 공부한 인물을 쥐 잡는데 쓸 수 없다는 판단이었던 듯싶다. 그는 “농업개발과장, 생물검사과장을 지냈지만 내 머릿속엔 ‘쥐’생각밖에 없었지”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고민이 깊어졌다. ‘학교로 갈까, 그냥 나랏돈 받으며 살까, 이참에 쥐 잡는 회사를 차릴까’ 대략 세 가지 갈래서 왔다갔다했다.



 #성공 키워드 2 결단

 그는 장고 끝에 마음을 정했다. 국가가 안 하면 자신이 하겠다고 결심한 것. 그때가 1976년이었다. 한창 춥던 그해 12월1일 개업한 서울 신사동 7평 사무실은 썰렁했다.  300만원 자본금에 직원이라곤 달랑 아내 김귀자씨와 고졸 직원 1명뿐이었다. 당시 회사 간판은 ‘전우방제.’

 낮엔 공무원, 밤엔 영업을 뛰며 설립 후 2개월간 수많은 식품공장과 슈퍼마켓을 돌아다녔지만 말짱 헛일이었다.  “정신 나갔소? 100원짜리 약 쓰면 될 걸 왜 돈을 써가며 남에게 맡겨요?”가 그가 수천 번이나 들어야 했던 고정 멘트였다.

 “한 곳 뚫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답답한 마음에 서울 여의도 H쇼핑을 찾아갔더니 사기꾼 취급을 하더군요. 통사정 끝에 불평등 계약이긴 했지만 대형 오더를 따냈죠. 조건은 ‘3개월 안에 쥐를 다 잡지 못하면 돈 한 푼도 안 받겠다’는 거였어요.”

 둘째 달까지 실패를 거듭해 쫓겨나기 직전에 터진 ‘작전 성공’은 기업 고객 유치의 서막이었다. 입소문이 퍼져 사업 1년 만에 대형 제과업체 3곳과 계약을 맺게 돼 ‘회사냐, 공직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기로에 놓이게 됐다. 그는 “당시 중앙 공무원 과장이면 ‘끗발’좀 있었는데…”라며 지금도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1979년 10월이었는데, 사표를 내고 나니까 어찌나 섭섭했던지 집사람 몰래 펑펑 울었습니다. 일주일 지나고 나니 박정희 대통령 서거 소식이 터져나왔죠. 그때부터 죽자 사자 뛰었습니다. 한 6개월 밤낮으로 필드(현장)를 돌았더니 그제서야 먹고 살 만해지더군요. 그때쯤 되니까 왜 미리 안 나왔을까 후회가 들기도 했고…, 하하.”

 손에 쥔 100원짜리 동전을 버려야 1000원짜리 지폐를 쥘 수 있다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 기술이 쌓이고 평판이 나면서 1970년대 말에는 청와대까지 고객이 됐을 정도로 회사가 번창했다.

 그는 “창사 후 최대 위기는 1984년 전염병 예방법이 제정됐을 때”라고 들려준다. 이 법의 주 내용은 대형 요식업소와 빌딩은 소독과 방제를 의무화해야한다는 것. 일견 호재처럼 보였지만 경쟁업소가 남발하면서 악재로 작용했다. 특히 가격덤핑이 문제였다. 후발주자들이 가격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해약률이 10%를 넘어섰고 신규 계약은 뚝 끊겼다.

 “우리도 가격을 내리자, 담당자에 뒷돈을 챙겨주자 등 별의별 의견이 다 올라왔는데, 솔직히 고민도 많이 했죠. 하지만 다 묵살했습니다. 그냥 ‘고품질로 승부하자’로 밀어붙였죠. 그랬더니 한 6개월쯤 지나자 해약했던 고객들이 다 돌아왔습니다. 타 업체와 싼 맛에 계약했다 쥐와 해충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죠.”

 지난 1995년 ‘63빌딩 쥐소동’ 사건은 전 회장에게 ‘고객에게 진심이 담긴 서비스를 제공하면 그 대가는 몇 배로 돌아온다’는 서비스 철칙을 새삼 확인시켜줬다. 이 사건은 당시 63빌딩 CEO가 빌딩 로비를 걸어가는데 쥐 한 마리가 유유히 그 앞을 지나가면서 시작됐다.

 “그때 회사가 발칵 뒤집혔죠. 빌딩 내부는 물론 2만여평에 이르는 한강 둔치에까지 방제작업을 했을 정도니까요. 4000만원이란 경비가 들어갔지만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신뢰를 얻은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성공 키워드 3 전문성

 세스코는 현재 전체 해충방제산업 시장에서 80%에 달하는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해충방제가 어렵다는 식품공장, 백화점, 호텔 점유율은 약 90%, 특히 오성급 이상 특급호텔 점유율은 99%라는 게 전 회장 설명이다. 김포공항, 인천공항, 서울대병원 등도 세스코의 고정고객이다.

 현재 세스코맨으로 불리는 정식 방제기사 1000여명이 700여대 서비스카를 몰며 전국 10만여 거래처에 해충박멸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지난해 5월엔 중국 상하이에 진출, 13억명 중국 시장에도 노크하고 있다.

 한 나라의 해충방제 시장을 80% 이상 점유하는 건 전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전 회장은 그 비결이 한마디로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는 고집’ 덕분이라고 말한다. 특히 1997년부터 2년간 30억원을 들여 백과사전 8권 분량으로 개발한 서비스 매뉴얼과 이를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전산시스템을 만들었다. 전 회장은 이를 ‘재산목록 1호’로 소중히 여긴다.

 연매출이 500억원이 안 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30억원 개발비는 사실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는 “사운을 건 모험이었지만 더 큰 도전을 위해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면서 “현장 방제를 담당하는 직원 중 작업이 더 성가셔질 거라 지레 판단하고 회사를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도 프랜차이즈 제안을 받고 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자칫 서비스에 균열이 생길까봐서다. 직영점 체제를 고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스코맨들은 187개 해충방제 매뉴얼을 숙지하고 교육프로그램 800시간을 이수한 전문가들이다. ‘통일된 질’이야말로 전 회장이 가장 중시하는 대목이다.

 창업 후 7년 만인 1983년 일찌감치 반월공단 내에 기술연구소를 신축한 것도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총 9개부서 20여명 연구원으로 구성된 세스코 연구소는 과학기술부에서 인증을 받은 국내 유일의 해충관련 기업연구소다.



 4인 가족경영 시스템 구축

 국내 가정집에 쥐가 사라진 데엔 전 회장 공로가 크다. 그런 그가 1990년대 바퀴벌레 박멸에 힘썼다면 요즘엔 개미 퇴치에 앞장서고 있다. 여름휴가 막바지인 8월말 현재 세스코 고객센터엔 ‘쥐 손님’이 30%, ‘바퀴벌레 손님’이 50%, ‘개미와 진드기 손님’이 20%를 차지한다. 그만큼 개미 퇴치 수요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항상 쥐와 바퀴, 개미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며 웃는다. 그가 잡아 죽인 쥐, 바퀴만 수억 마리는 족히 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1996년엔 창립 20주년 행사로 ‘쥐, 바퀴벌레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 이때 회사가 유명세를 타며 사명을 ‘전우방제’에서 ‘세스코’로 바꿨다. ‘세스코’는 ‘전우방제’의 영문 이름 ‘Chunwoo Environment Service Co. Ltd’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건국 이후 최초의 쥐 위령제라며 대서특필된 이 행사는 2001년 네티즌 사이에 유행했던 ‘세스코 유머’와 함께 회사 홍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일등공신이다.

 전 회장은 국내 시장 점유율 80% 장악의 공을 아내와 두 아들에게 돌린다. 실제 세스코는 4인 가족경영 체제다.

아내인 김귀자 부회장은 1976년 창립 멤버로 2002년 4월까지 세스코 사장을 역임했고 장남 전찬민씨(38)는 자회사인 제약사업 부문 ‘팜클’을 맡고 있다. 차남인 전찬혁씨(36)가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사실상 세스코를 경영하는 총사령탑이다.

 대신 전 회장은 자신을 ‘분위기 메이커’라고 표현한다. 9시에 출근해 4시면 퇴근한다. 회사에는 큰 그림만 그려주고 그는 대외 활동에 치중한다.

 최근엔 국제적인 봉사활동 단체인 국제로터리클럽의 3650지구(3000여명 회원을 보유한 한국로터리의 종주지구)의 차기총재로 지명됐다. 현재 연임 중인 서울상공회의소 강동구 상공회장이면서 서울지역 상공회의소 의장들 모임인 ‘서울지역경제위원회’ 회장직도 맡고 있다. 

 국내에 해충방제산업을 개척한 전순표 회장. 그는 인터뷰 말미에 “누구나 기피하는 3D 업종일수록 첨단화하면 그게 바로 첨단 사업”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특히 ‘끈기’는 사업가가 지녀야 할 최고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번번이 문전박대 당했던 자신의 경험처럼 말이다.

박인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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