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방황이 나를 자라게 했다’는 말처럼 젊은 시절 권위에 반항하던 한 히피 청년이 우연찮게 시작한 ‘옷 장사’를 평생의 사업으로 일군 사례가 있다. 갭(GAP)이나 루츠(ROOTS)같은 기라성 같은 브랜드 사이에서 틈새시장을 찾아 승승장구한 것은 물론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히피출신 사업가’를 소개한다.
 “우리 회사 점포들 중 똑같은 가게는 하나도 없다”

 <포브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의류업체인 어반 아웃피터스 그룹(Urban Outfitters Inc.)의 설립자이자 대표이사인 리차드 헤인(Richard Hayne, 59) 회장은 회사의 특징을 이같이 축약해 표현했다. 손님들의 개성을 존중하기 위해 전 점포의 인테리어를 조금씩 다르게 디자인했다는 설명이다.

 뉴욕 맨해튼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점포를 둘러보면 헤인 대표의 자랑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맨해튼 웨스트 빌리지에 있는 어반 아웃피터스 점포에는 범상(凡常)치 않은 새하얀 비닐의자가 입구 가까이에 놓여 있어 손님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큰 거울로 장식된 고전적인 대형 옷장이 고객 앞에 나타난다. 이어 금속제 크리스마스트리와 칵테일 바 같은 입구를 지난 다음에야 매장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는 젊은이를 대상으로 하는 캐주얼 의류뿐 아니라 액세서리, 가구, 도서, 화장품, 비누 등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동쪽에 있는 이스트 빌리지의 점포에서도 칵테일 바처럼 보이는 진입로는 동일하게 볼 수 있지만 매장 문을 열자마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만난다는 점이 다르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주위에는 70년대식 소품들이 즐비하다. 물론 1층에도 매장이 있어서 당장이라도 앉아 보고 싶은 고풍스러운 소파와 목재 식탁 사이사이로 여성용 구두가 전시돼 있다.

 어반 아웃피터스의 계열사인 안트로폴로기(Anthropologie)도 특별한 컨셉으로 꾸며져 있다. 어반 아웃피터스에서 쇼핑해 본 경험이 있는 40~50대 여성을 겨냥한 이 옷가게는 고객들이 아웃피터스에서 익숙하게 느낄 수 있었던 자유분방함에다 다소 차분한 분위기를 섞어 놓았다.

 그래서 안트로폴로기는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곳’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안트로폴로기 점포는 프랑스 샹송에서부터 향기나는 양초, 얇게 저며진 가격안내판 등 청각, 후각, 시각 등 여러 가지 감각을 자극하는 인테리어로 꾸며진 정교한 사원(寺院)과도 같은 곳이다. 점포 안은 마치 섬처럼 각각의 주제를 가진 의류와 가정용품들이 서로 떨어져 배치돼 취향에 따라 각 섹션을 들를 수 있도록 디자인됐다. ‘세면장’이라고 표시된 구역을 찾은 손님들은 희한하게 생긴 비누나 특이한 향내가 나는 로션, 거울 달린 자그만 찬장 등 세면장을 꾸미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실(Boudoir)’구역에서는 당장이라도 누워 보고 싶을 정도로 세련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침대커버와 베개가 놓여있는 침대를 만나게 된다. 최근에는 이 침대도 판매대상으로 내놓았다.



 월남전 반대한 장발 청년

 안트로폴로기의 인테리어는 손님들로 하여금 뭔가 다른 사람이 찾아 내지 못한 것을 혼자 발견한 것 같은 느낌, 일종의 ‘보물찾기’ 같은 즐거움을 주기 위한 장치들이다.

 요즘에는 의류뿐 아니라 책, 보석류, 야외용 테이블까지 파는데 이는 전통적인 옷가게에서는 잘 하지 않던 일이다. 마케팅 전문가인 플로리다의 샬러트 컨설팅사의 조나단 샬러트는 “안트로폴로기의 인테리어는 일견 혼잡스러워 보이지만 정교하게 디자인된 혼돈인 덕분에 손님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물론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안트로폴로기는 각 매장마다 2명의 전담 아티스트를 두고 각각의 상황에 맞는 인테리어를 갖출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장치들이 안트로폴로기의 이미지를 고상하지만 야릇한 느낌이 드는 자유분방한 소매점으로 인식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단돈 4500달러로 헌옷가게를 연지 35년 만에 헤인 회장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어반 아웃피터스 그룹이 지난 2005년 올린 매출액은 약11억 달러(약1조원)로 전년도에 비해 32% 늘어난 것이다. 순익은 아직 확정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8000만 달러(약 800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어반 아웃피터스 그룹은 현재 ‘어반 아웃피터스(Urban Outfitters), 안트로폴로기(Anthropologie), 자유인(Free People)’ 등 세 브랜드를 보유하고 각각의 점포를 열어 두고 있다. 어반 아웃피터스 점포는 현재 북미는 물론 유럽까지 진출해 미국, 캐나다, 영국 등지에 82개의 점포를 보유하고 있으며 안트로폴로기는 69개, 자유인은 4군데가 있다. 자유인은 소매 옷가게에 의류와 가정용품 등을 파는 도매상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현재의 헤인 회장은 수천 달러짜리 저녁식사 티켓을 사서 공화당 기금모금 파티에 참석하는 ‘보수파’이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권위에 반항하던 히피 청년이었다. 그는 우연찮은 기회에 의류업을 접하면서 열정적인 사업가로 변신했다. <포브스지>가 추산한 2005년 9월말 현재 헤인 회장의 재산은 13억 달러(약1조2000억 원)이다.

 1947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 잉고마르(Ingomar)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헤인 회장은 르하이 대학(Lehigh University) 인류학과에 들어갈 때만 해도 그저 순박한 시골청년이었다. 월남전 반대, 우드스톡 공연 등 반항과 불순종이 팽배하던 당시 미국의 대학가는 반항아들의 용광로 같은 곳이어서 그도 자연스럽게 이런 분위기에 동화됐다. 헤인 회장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만나 줄곧 같이 지내다 대학을 따로 가는 공백기를 거친 뒤 23살에 결혼한 첫 아내, 쥬디 윅스는 헤인 회장을 두고 “어릴 때는 몰랐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만나보니 아주 열정적이면서도 권위에 반항하는 타입으로 바뀌었다”고 <필라델피아 위클리>지와의 대담에서 회상했다. 리차드는 당시 마을에서 최초로 장발을 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또 그 마을에서는 처음으로 월남전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직후 알래스카 주가 실시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지원한다. 평소 정치적 소신처럼 ‘혜택 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운동을 꿈꾸던 두 사람이었기에 흔쾌히 북극을 향한 비행기에 몸을 던질 수 있었다. 하지만 북극권의 작은 마을 체포나크(Cherfonak)에 도착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실내의 물까지 얼리는 강추위와 온통 새하얀 풍경뿐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알래스카 에스키모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주택을 신축해 주거나 개량해 주는 일을 돕는 등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지만 북극의 자연은 그들을 안아주지 못했다. 1년의 대부분을 영하 30도 이하에서 오르내리는 기온과 살을 에는 강풍은 남쪽 따뜻한 동네에서 살던 이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쥬디는 당시를 두고 “유일한 오락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에서 송신하는 라디오방송과 엘비스 프레슬리 음반을 듣는 일이었다”며 “그나마도 하루에 두 시간만 공급되는 전기로 음악도 듣고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으니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결국 처음 약속했던 1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두 사람은 알래스카를 떠나 고향 잉고마르로 돌아온다. 다행히 그들의 수중에는 알래스카에서 받은 사례금 3000달러가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와 있던 초등학교 동창 스콧 벨에어(Scott Belair)가 이들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게 된다.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의 와튼 MBA 스쿨을 다니고 있던 벨에어는 당시 ‘창업’이라는 과목을 수강하고 있었는데 신규사업을 창업하거나 창업하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알래스카에서 돌아와 뭔가를 시작하려던 두 사람과 벨에어가 만나면서 오늘의 어반 아웃피터스가 태동한 것이다. 헤인 회장과 아내는 대학생을 상대로 옷이나 잡화를 파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마침 벨에어는 학교가 있는 필라델피아로 내려와 창업하면 자신이 도울 수도 있으며 학점도 잘 받을 것 같다고 제안한 것이다. 벨에어가 먼저 필라델피아로 가서 가게를 하나 찾아냈다. 월세 300달러짜리 허름한 가게였다. 사례금 3000달러와 벨에어가 출자한 돈을 합쳐 4500달러로 헤인 회장은 의류업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대학생 대상 히피스타일 의류 판매

 마침내 1971년 펜실베니아 대학교 앞 대학로에서 세 사람은 ‘자유인(Free People)’이라는 이름의 허름한 옷가게를 시작했다. 평소 지론대로 구속받지 않는 삶을 살고 싶던 헤인 회장은 가게이름도 이렇게 지었던 것이다. 당시 그가 만든 간판도 특이해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모양으로 나무를 잘라 거기에다 ‘Free People’이란 글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히피타입의 의류와 포스터, 향내 나는 양초 등 생활소품도 팔기 시작했다. 옷은 모두 헌옷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히피식 복장을 선호하던 대학생들은 새옷 헌옷을 가리지 않았던 덕분에 장사는 그럭저럭 되는 편이었다.

 헌옷가게로 출발한 ‘자유인’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유펜(U-Pen; 펜실베니아 대학교를 지칭) 학생들을 위한 일종의 ‘만남의 광장’으로 변신했다. 저렴하지만 유행에 그리 뒤처지지 않는 옷을 중심으로 대학생들이 즐겨 찾을만한 히피스타일까지 다양하고 튀는 의류를 판 것은 물론 대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일종의 아지트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이때 매출은 그리 적지 않았지만 그저 퍼주기를 좋아한데다 회계의 개념을 몰랐던 터에 이익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현금이 늘 부족한 헤인 회장은 가게를 꾸미는 재료도 직접 주워서 조달하곤 했다. 인근 차이나타운에 가서 사과상자들을 주어다가 잘 닦고 페인트칠을 새로 해서 가게 내부 장식을 하기도 했으며 전화케이블을 감는 커다란 둥근 나무통을 테이블로 고쳐 쓰기도 했다.

 옷장사를 시작한지 5년째에 접어들던 1970년대 중반 미국 사회분위기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월남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나자 대학생들은 사회, 정치적 이슈보다는 개인적 관심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헤인 회장은 변신을 모색하게 된다.

 1975년 자유인은 ‘어반 아웃피터스’로 이름을 바꾸고 필라델피아 중심가로 진출했다. 이번에는 허름한 골방 가게가 아니라 2만 평방피트(약600평)짜리 가게를 낼 수 있었다. 또 예전과 달리 헌옷이 아니라 유행에 뒤지지 않는 옷들로 가게를 꽉 채울 수 있는 상태였다.

 첫 대형점포를 놓고 씨름을 벌이던 헤인 회장에게 예기치 않았던 기회가 찾아온다. 1979년 어느 날 의류 도매업자 한 사람이 메사추세츠 주 캠브릿지 시 하버드대 캠퍼스의 ‘하버드 광장(Harvard Square)’에 있는 옷가게가 부도위기에 몰렸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물론 하버드 광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다소간 출혈이 예상되는 일이기도 했지만 헤인 회장은 이 기회를 사업확장의 전기로 삼는다. 바야흐로 동네 옷가게에서 전국적인 의류업체로 도약하는 계기를 만나게 된 것이다.

 헤인 회장은 온 정성과 에너지를 이 하버드 광장 점포에 쏟는다. 그래서 1년 안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점포의 매출을 능가하는 실적을 올리게 된다.  여세를 몰아 1983년에는 필라델피아에 두번째 점포를 열 수 있었다. 한번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어반 아웃피터스의 인지도가 점점 올라갔다. 마침내 1987년에는 패션의 중심지인 뉴욕에 진출했으며 이어 워싱턴 등 미국 동부에 점포를 확장할 수 있었다.



 1990년대 미국 주요 도시·유럽 진출

 헤인 대표는 어반 아웃피터스의 옷을 경험한 고객들이 나이를 먹게 된 1990년대 이후 이들을 사로잡기 위해 35세 이상의 중년 여성을 겨냥한 ‘앤트로폴로기(Anthropologie)’ 브랜드를 만들고 계열사로 분리시켰다. 1970년대 어반 아웃피터스의 주 고객이었던 베이비붐 세대들이 나이를 먹게 되면서 이들을 끌어안기 위한 대책이었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어서 현재 전체그룹 매출의 40% 정도를 앤트로폴로기에서 올리고 있다.

 1990년대는 헤인 회장에게 ‘대확장의 시대’였다. 미국 동부 주요대도시인 시카고 미니애폴리스 등을 비롯, 캘리포니아 등 서부에까지 어반 아웃피터스와 앤트로폴로기 점포를 대거 열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유럽 진출도 성사시켰다. 영국 런던과 글래스고우, 아일렌드 더블린 등지에도 점포가 신설됐다.

 1993년에는 어반 아웃피터스를 나스닥에 상장, 공개기업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연매출 신장률이 20%를 넘어 5년 만에 두 배에 이르기도 했다. 주가 역시 같은 기간 중 곱절로 올랐다.

 사업이 확장되고 세상에 브랜드가 알려지면서 헤인 회장은 머리카락도 잃었지만 예전의 좌파적 시각도 버렸다. 초창기와 달리 이제는 ‘히피 출신 사업가’란 평판도 싫어한다. 30년의 세월은 그를 보수화시켜 심지어 공화당에 정치헌금을 할 정도다.

 하지만 그의 경영철학을 들여다보면 헤인 회장이 젊은 시절의 이단아 분위기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것 같다. “실패해도 무방하다”, “뒤돌아보지 말라” 헤인 회장이 종업원들에게 수시로 강조하는 사항이다.

 헤인 회장은 또 “회사가 더 잘 되기 위해서는 구매담당자들이 실패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종종 한다. 만일 구매담당자들이 추천하고 사들인 제품이 모두 다 날개 돋친 듯 잘 팔리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는 게 헤인 회장의 판단이다.

 헤인 회장은 이를 두고 “한번 대박이 터지면 위기를 감당하기 보다는 현상유지에 급급하기 쉽기 때문에 차라리 작은 데서 실패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더 낫다”고 설명한다.

 헤인 회장이 ‘역발상적’인 경영철학만 갖고 어반 아웃피터스를 운영하고 있지는 않다. 독특한 점포 인테리어를 포함, 정교한 장치들을 갖추고 있다.  헤인 회장이 보유한 비장의 무기가 ‘패션 스파이’로 불리는 트렌드 사냥꾼들이다.

 헤인 회장은 대도시로 점포를 넓혀 나가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 이후 유행을 따라잡기 위해 20대 젊은이 100여 명을 고용, 전세계 트렌드를 알아내는 데 연간 500만 달러 투입하고 있다. 이들은 공식직함도 없지만 내부에서는 ‘패션 스파이’로 불린다. 이들 스파이들은 뉴욕의 소호거리나 런던의 코벤트 가든 등 세계 패션의 중심지를 들락날락거리며 어떤 제품과 어떤 색깔이 앞으로 유행할 것인지를 알아내 보고서를 본사에 보낸다.

 예컨대 1990년대 중반에 이런 일이 있었다. 뉴욕에 잠입(?)한 스파이 하나가 파스텔 색조의 꽉 죄는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시 필라델피아의 구매담당자에게 연락했고 이 구매담당자는 이로부터 1주일 후 보고된 디자인과 색깔로 치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공장을 찾아내 생산에 들어갔다. 그리고 첫 정보가 들어온 지 2주 만에 소매가 40달러짜리 제품이 매장에 나올 수 있었다.

 반대로 지나간 유행을 파악, 재빨리 제품을 철수시키는 것도 이들 ‘패션 스파이’들의 몫이다. 1995년 겨울에는 한때 유행의 첨단이었던 닥터 마르텡 가죽부츠가 패션 심지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한 스파이가 간파, 즉시 아웃피터스의 진열장에서 이 가죽부츠가 내려지고 다른 종류의 부츠로 교체된 일도 있었다.

 헤인 회장은 <포브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어반 아웃피터스의 성공전략은 간단하다. 설립 초기부터 예산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고 했다. 흔히들 ‘의류업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라고들 하는데 헤인 회장은 이런 속설을 뒤집기 위해 노력한 셈이다.  어반 아웃피터스 경영진의 일정 일부를 살펴보면 매출증대와 순익확대를 위한 헤인 대표와 경영진들의 경주(傾注)가 눈물겹다.

 우선 매주 월요일 아침 어반 아웃피터스의 경영진들은 지난주의 매출실적과 주요 판매목록을 꼼꼼하게 분석한다. 분석시간을 줄이기 위해 판매관리 시스템을 좀 더 세분화했다. 이렇게 매출에 대한 분석을 끝낸 뒤 화요일에는 구매할 상품의 품목과 수량을 두 사람의 고위임원이 결정한다. 어반 아웃피터스에서는 브랜드  담당대표가, 계열사인 앤트로폴로기에서는 셍크(Glen T. Senk) 대표이사가 이미 분기별로 짜 놓은 구매계획서를 바탕으로 최종결정을 내리면 연이어 각 점포별로 분배할 제품목록을 정하게 된다. 분기별 구매 계획의 틀 안에서 매주 구매결정을 내리는 이유는 이렇게 해야 급변하는 패션트렌드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각 점포로부터 올라온 신청사항을 고려하긴 하지만 100% 다 받아 주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철저하게 구매결정에 관해서는 ‘중앙집중식’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 임원회의에서 CFO(재무담당 최고임원)가 현금흐름을 기초로 재고조사나 상품배분에는 간여하지만 구매과정에서는 철저히 배제된다는 점도 특이하다. 18~30세 사이의 젊은이가 주 고객이므로 ‘매입가격보다는 유행에 더 민감해지고 싶다’는 헤인 대표의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이렇게 결정이 내려지면 이제 구매파트 직원들이 뛰기 시작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심지어 일본, 유럽까지 날아가 의류, 신발은 물론 액세서리까지 일괄로 구입한다. 이 실제 구매과정에서는 담당직원들에게 최대한 자율권이 주어진다. 임원회의에서 구매해야 할 품목들의 개괄적인 선이 정해진 다음에는 시장에 나간 직원들에게 크게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셍크 대표는 이와 관련 “큰 틀만 정해주면 자율권을 줘도 회사방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며 “이렇게 해야 젊은이들의 구미에 맞는 제품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점포 인테리어 독립성 유지

 또 매주 화요일에는 점포의 진열과 전시 등을 조정하는 임원회의도 열린다. 아트디렉터들까지 참여, 꼼꼼하게 각 점포의 디스플레이를 챙기는 것이다. 물론 어반 아웃피터스가 마냥 중앙집권식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지점인력을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과정은 각 점포에 일임했다. 그래서 실내장식이나 진열 등을 맡는 직원들은 각 점포가 직접 뽑는 덕분에 헤인 회장이 강조하는 ‘점포 인테리어의 독립성’은 더욱 고양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예산절감’과 함께 ‘창의성’에도 동등한 무게를 실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대표이사가 창의성을 강조한 덕분에 본사의 구매파트 직원들은 한 데 어울려 고객들이 주로 가는 영화관에 가서 틴에이저들이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기도 하는 등 고객과 호흡하기 위해 애를 쓴다.

 어반 아웃피터스는 이와 함께 매일매일 매출목표와 실제매출, 매출에 따른 이익을 산출해 점검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일일점검 결과에 따라 경영진들은 ‘전국 동시세일’의 기간과 할인 폭을 정하게 된다. 아울러 자신들의 보너스도 결정된다. 헤인 회장은 이렇게 치밀하게 연간매출 및 이익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두었다.

 어반 아웃피터스는 소매의류업인데도 특이하게 자사 제품을 다른 소매점에 판매하기도 한다. 물론 어반 아웃피터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도매만 전문으로 하는 계열사인 ‘자유인’ 창구를 통해서지만 사실상 어반측이 판매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유인’은 경쟁업체라고도 할 수 있는 1100여 개 소매상들에게 의류제품을 파는 한편 어반 아웃피터스와 앤트로폴로기 구매의류의 4분의 1 이상을 공급하고 있는 계열사다. 이는 어반 아웃피터스와는 서로 다른 지역, 다른 인테리어를 갖춘 작은 소매상에서 어떤 제품이 잘 팔리는 지를 분석해 자사매장에 적용하기 위한 전략이다. 즉 일종의 ‘안테나 숍(Antenna Shop)’을 돈 안 들이고 세운 셈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에 있는 어떤 소매점에서 핑크색 배꼽티를 많이 주문했다’는 보고가 자유인 임원들에게 들어오는 즉시 어반 아웃피터스 각 매장에 이 정보가 전파돼 핑크색 배꼽티가 앞줄에 진열되는 것이다.

 이제 헤인 회장은 인터넷을 노크하면서 고객층을 다변화시키는 전략을 새롭게 짜고 있다. 어반 아웃피터스의 홈페이지를 통해 ‘사이버마켓’에 적극 발을 들여놓으면서 소위 ‘빈 둥지족’으로 불리는 40대 중반~50대 중반의 고객을 끌어들이려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셍크 앤트로폴로기 대표 겸 어반 아웃피터스 부사장은 “옷의 사이즈부터 분위기까지 이들을 완전히 새로운 고객층으로 간주하고 접근하고 있다”며 “올 초 새로 개설하는 점포는 교외의 넓은 매장에 새로운 컨셉으로 인테리어를 꾸미는 방법으로 고객몰이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지난 2005년 통신판매와 인터넷쇼핑몰 등 ‘非매장’ 거래를 통해 전체 매출의 11%에 달하는 상품이 판매된 만큼 올해에도 사이버시장 쪽을 계속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헤인 회장은 2004년 20대를 주요 독자로 삼는 잡지인 <필라델피아 위클리>지와의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 일이 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1964년 당시 유명한 가수 밥 딜런과 존 바에즈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들 노래의 주제처럼 그 때만 해도 나는 세상이 모두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꼈고 이런 세상을 바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세상은 내가 바꿀 수 없다는 걸 나이 들면서 알았다. 다만 난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격정(激情)을 버리고 겸손으로 인생을 바라보니 평안과 사업의 번창이 찾아왔다”는 ‘방황하던 히피출신 사업가’가 다음 세대에 주는 충고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은 언명(言明)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