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신년연설로 불붙은 증세논쟁은 국민의 강한 조세저항과 5·31지자체선거로 다소 후퇴하긴 했지만 꺼지지 않은 불씨임에는 틀림없다. <이코노미플러스>는 새로 부상하고 있는 뉴라이트와 뉴레프트들을 통해 증세문제를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증세 = 개혁’론의 함정…   방만한 정부지출부터 줄여야

 최병일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및 정책위원장(이화여대 교수)



  “대표권 없는 곳에 세금도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구호는 미국독립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 국민의 세금 없이 지탱할 수 없는 정부가 국민의 동의 없이 마구잡이로 세금을 매기지 못하게 하려는 저항은 프랑스 혁명을 낳았다. 때문에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들의 논의를 통해서만 세금을 정하고 부과할 수 있다는 ‘조세법정주의’가 현대민주주의의 대원칙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피로써 이룩한 투쟁의 결과이다. 이처럼 세금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파괴적 쟁점이다.

 양극화를 해소해 보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1월 18일 신년연설로 증세론이 불거져 나왔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1월26일 신년기자회견에서 감세론을 펴고 “감세와 증세를 놓고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고 맞서면서, 증세와 감세논쟁이 불붙고 있다. 대통령은 당장 증세는 없다고 뒤로 물러섰지만, 그 의중은 분명하다. 그동안 정치적 편의주의로 사용되어왔던 개혁이라는 단어가 정권후반기에 와서 세금이란 잣대 하나로 바뀌어 우리편과 상대편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어 버린 감이 있다.

 누구도 자기 주머니에서 세금 빠져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없다. 정부가 선진국 대비 세금부담액이 낮다는 논리로 세금 좀 더 거두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코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국가마다 그들의 복지국가모형과 경제운영방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형태로 조세정책을 집행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세부담도 경제발전 단계에 적합해야 한다. 지금 국민소득 3만 불의 선진국의 조세정책이 1만 불의 한국의 조세정책의 교과서가 될 수는 없다.

 양극화현상을 치유하는 것은 사회적 통합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 방법이 증세만은 아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방만한 정부지출을 줄이고 빠져나가는 세금을 제대로 집행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표는 “현 정권 들어 살찐 곳이 있다면 그것은 정부자신뿐으로 공무원이 4만 명, 인건비가 4조 원 각각 늘었다”고 한다. 이 정부 들어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수많은 위원회를 생각해보라. 현 정부 출범 직후 2003년에 18개 대통령 자문위원회의 173억 원의 예산은 금년 29개 위원회의 1976억 원으로 늘어났다. 정부부처와의 업무중복, 월권시비 등 의 비효율을 고려해 볼 때, 그 낭비는 심각하다. 정부의 무능으로 사업기간이 무작정 지연되어 당초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한 대형 국책사업들. 봉급쟁이를 봉인 유리지갑으로 만들고 자영업자와 전문직 종사자들의 탈세를 조장하는 불합리한 세금구조. 소득재분배효과가 미비한 지나치게 높은 간접세의 비중 등. 이미 문제점이 노출되어 있는 이런 문제가 먼저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증세가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쉬운 길처럼 보이지만, 경제운영의 미래에 독이 될 수도 있다. 경제의 성장동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세금늘리기에 주력하면 오히려 경제 활성화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다. 성장의 활력은 처지고 분배에만 혈안이 된 사회.  그것을 선진국병이라고 하던가. 우린 아직 선진국문턱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분배상황이 악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경제가 성장을 지속해 오던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분배상황은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었고 개도국의 모범이었다.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성장이 필수적이다. 물론 성장만으로 양극화를 해소할 수는 없다. 개방과 경쟁의 물결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다시 경제대열에 참여하도록 사회안전망을 확충하여야 한다. ‘증세=개혁, 감세= 보수’라는 등식을 뛰어 넘어야 한국의 미래가 보인다.



 증세, 선택이 아닌 당위… 작은 정부는 구시대발상

 이태수 좋은정책포럼 운영위원(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



 금 이 시각 우리사회를 엄습하는 두 가지 암운(暗雲)이 있다. ‘사회양극화’와 ‘저출산·고령화’가 그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간 양적인 경제성장과 다양한 분야의 사회지평에 대한 확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추진한 동력이 경제성장지상주의, 정부의 경제적 사업에 대한 올인정책, 대기업 위주·수도권편중 성장전략, 그리고 우리사회 내부에 팽배한 권위주의적, 냉전적 사고 등이었다. 더군다나 그로 인해 일어나는 사회적 비용에 대해서는 정부도, 시장도, 시민 개개인도 인식하거나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그 내부에서부터 균열의 조짐을 보였던 것이고 바로 그 결정적 현상이 양극화와 저출산·고령화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을 통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성장과 발전의 패러다임을 필요로 한다. 우리사회의 기본원리를 지방분권에 의한 균형발전, 지식기반사회에 부응하기 위한 인적투자, 탈권위주의에 입각한 민주적 리더십 사회 등으로 삼아 새로운 사회경제질서를 재편하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정부정책에 있어서는 성장과 선순환, 다시 말하면 경제정책과 합일된 사회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지금도 너무 ‘작은’ 정부이면서 그나마도 경제사업과 국방사업 위주로 편재되어있는 우리나라 정부의 재정은 그 규모도 늘이며 재정구성도 크게 탈바꿈해야 한다. 서구의 국가들이 GDP 대비 평균 40.8%를 정부재정으로 책정하여 그중 적어도 50% 이상을 사회보장성지출로 삼고 있고 GDP 대비로는 30% 내외를 역시 사회지출비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에 비해 정부의 재정규모는 GDP의 27.3%, 사회지출비는 GDP의 8.7% 정도에 머문다.

 물론 혹자는 오히려 감세를 통하여 정부의 재정규모를 줄이고 이를 통해 시장과 민간의 자율성을 촉진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경쟁을 통해 성장을 가져오고 이것이 자동적으로 적하효과(trickling-down effect)를 가져와 최적상태를 구현한다는 경제이론은 이미 20세기 내내 그 한계를 입증하기에 충분하였다. 20세기 중반 황금경제성장의 시기에 국가가 대규모의 재정으로 인위적인 적절한 분배정책을 펼쳐 국민들의 복리를 증진시켜온 서구 선진국가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다만 최근 들어 일부국가들이 정부의 역할에 대한 부분조정국면에 들면서 작은 정부론에 입각한 행동양식을 일시적으로 보인다고 이것이 현대정부의 역할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런 현실에서 지금까지 성장이데올로기의 산파역할만을 했을 뿐 사회적으로 힘과 자산, 소득 등에 대한 재분배에는 등한히 해 온 우리나라 정부에게도 감세를 통한 작은 정부를 강요하는 것은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한 치도 진전하지 못한 발상이라 할 것이다.

 당장 지금의 양극화해소와 저출산·고령사회 대비를 위해 필요한 사회적 대책들에 대한 정교한 계획과 엄정한 실현에는 연간 막대한 재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재 우리의 조세구조가 지닌 불투명성과 비효율성, 복잡성, 불형평성 등의 전근대성을 극복하면서도 소득재분배 효과의 제고와 사회정책을 위한 재원의 추가적 확보를 꾀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증세(增稅)’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증세는 악(惡)이고 감세는 선(善)이라는 발상은 정치공학적인 차원에서는 진리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형적인 정부의 역할을 지속해 오면서 각종 사회적 위기에 대한 대응을 방기해온 우리나라 정부가 이제라도 선진국 정도의 재정규모와 그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선진국 수준으로의 세 부담을 높이겠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당위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