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진념(66) 전 경제부총리는 공직에 있을 때 못지않게 바쁘게 지낸다. 로펌 고문, 대학 교수, 기업 사외이사, 포럼 운영위원장 등 직함만 4~5개가 넘는다. 정치권에서 ‘러브콜’도 들어오고, 두산그룹의 새 회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는 향후 거취에 대해 어떤 구상을 하고 있을까.

 “올해 5% 성장이요? 뭐,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그리 중요합니까. 경기활력을 회복하는 게 관건이지….”

 2002년 4월 경제부총리를 끝으로 공직 생활을 마감한 진념 전 부총리. 과천청사를 떠난 그는 요즘 서울 역삼동 스타타워로 출근한다. 로펌 서정법무법인 고문이 현재 공식 직함이다.

 3대 정권에서 여섯 번 장관(부총리 포함)직을 지내며 ‘직업이 장관’으로 통했던 그는 여전히 ‘감투’가 많다. 서강대 경제대학원 초빙교수, LG전자와 한국가스공사의 사외이사, 한국선진화포럼 운영위원장 등이 그가 갖고 있는 주요 직함들이다.

 대외활동이 많은 탓에, 적(籍)을 둔 서정법무법인에는 일주일에 평균 사흘 꼴로 출근해 자리를 지킨다. 로펌 내 펠로우 자문 역을 하는 게 주된 임무다.

 공직을 떠났어도 여전히 그는 법무법인의 고문보다는 한국경제의 ‘고문’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실제 그는 최근 정부에 쓴소리를 하는 등 경제 원로로서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지난해 9월 서강대 대학원에서 지적한 ‘3NA론’과 11월 말 선진화포럼 때 “한국 경제에는 사공이 너무 많다. 경제부총리로 힘을 모아 줘라”라고 지적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3NA란 NATO(No Action Talk Only), NARO(No Action Roadmap Only), NAPO(No Action Plan Only)를 지칭하는 말로, 정부가 ‘행동은 없고 말만, 지도만, 계획만 많다’라는 지적을 빗댄 말이다.

 현직은 떠났지만 경제계 외곽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는 여전히 ‘상품가치’가 높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5월 지자체 선거에 나설 도지사 후보로 ‘러브콜’을 날리고 있고, 수장을 잃은 두산그룹의 새 회장으로 영입된다는 설도 꾸준히 나돌고 있다. 요즘 부쩍 그의 향후 거취에 대해 세간의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지난 1월6일 오후 4시 서울 역삼동 서정법무법인 집무실에서 만난 진념 전 부총리는 파란색 줄무늬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로펌 고문 명함을 건넨 뒤 “하나 더 있다”라며, 서강대 교수 명함을 내밀었다. “다른 직함도 많지 않냐”라고 하자, 그는 “선진화포럼이나 사외이사는 ‘봉사직’이지 감투는 아니지 않느냐”라고 반문한다.

 2005년 12월2일 예순여섯 번째 생일을 보냈다는 그는 나이보다 젊어보였다. 명함을 건넨 뒤 자리에 앉은 그는 담배부터 하나 꺼내 물었다.



 (기자) 담배를 끊지 않으셨군요.

 (진념) 몇 번 끊어본 적은 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하루 한 갑은 넘지 않지.

 (기자) 요즘도 술자리 때 폭탄주 돌리십니까.

 (진념) 하하. 뭐, 가끔. 난 소주가 좋더라고요. 한 병 정도는 가볍게 하지요.

 그는 지난 연말 골드만삭스가 발표한 보고서 ‘넥스트11’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왜 외국에서 뭐라고 한마디 하면 (언론이) 대서특필 하느냐는 요지였다.

 “내 재직 때도 오마에겐이치(경제평론가)나 사카키바라(전직 일본 대장성 차관으로 ‘미스터 엔’으로 불렸던 인물로 현 게이오대 교수)가 한마디 하면 대문짝만하게 쓰는 데 아무래도 그건 난센스야.”



 (기자) 공직에서 은퇴한 후 가장 달라진 점이 무엇인가요.

 (진념) 매일 아침 산에 간다는 점이죠. 혼자서는 못 가고 집사람을 꼭 ‘모시고’ 가지요.(그는 아침 7시쯤 자택(방배동) 인근 우면산에 오른다. 부인은 서인정 성신여대 음대 교수다.)

 (기자)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진념) 매일 산에 오르는 게 운동 아닙니까. 요즘엔 주중에도 골프를 칠 수 있어 좋고요.(그는 일주일 1~2번 주로 주중에 필드에 나간다. 회원권을 갖고 있는 남부컨트리클럽을 주로 이용한다. 그가 밝힌 실력은 보기플레이어 수준이다.)



 조찬이 없는 날이면 평소 9시30분쯤 역삼동 서정법무법인에 출근한다.  2003년 6월부터 고문을 맡고 있다. 또한 퇴임 직후인 2002년 9월부터 서강대 경제대학원에 3년 넘게 출강하고 있다. 매주 목요일 오후 6시45분부터 8시까지가 그의 강의 시간이다.

 그런가 하면 2003년 3월부터 한국가스공사, 2004년 3월부터는 LG전자 사외이사도 수행 중이다.

 매월 셋째 주 목요일 아침 7시30분엔 서울 명동의 은행회관에서 열리는 한국선진화포럼 모임에 나간다. 선진화포럼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 이승윤, 김만제 전 부총리,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 등 경제계 원로 200명이 주축이 돼 2005년 9월에 발족한 포럼. 그는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인터뷰 당일인 6일 밤에도 재경회(재경부 OB들의 모임) 신년모임이 있다고 했다.



 “정치권 제의엔 노(No) 사인 보내”

  40년간의 공직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묻자, 그는  “엄밀히 말하면 두 번 쉰 적이 있어 40년을 채우진 못했다”라고 바로잡는다. 첫 번째는 1993년 2월 김영삼정권이 들어서면서 첫 장관(1991년 5월)에 올랐던 동자부장관 시절 일괄 사표를 냈을 때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일년, 또 일년은 전북대에서 초빙교수를 했지요. 그리고 3개월간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을 지냈습니다. 그때 교육 문제도 심도 있게 다뤘습니다. ‘대전환 21’이라는 아젠다(Agenda, 의제 또는 의사일정이라는 뜻)를 내면서 ‘교육부가 없어져야 교육이 바로 선다’라고 주장했더니 반향이 컸었죠.”(그는 경제부처 최고 사령탑 출신답게 숫자 기억력이 탁월했다. 퇴임, 취임 날짜를 또렷이 기억했다.)

 두 번째는 1997년 8월 노동부장관을 끝냈을 때다. 그때는 그야말로 직책 없이 ‘야인’ 생활을 했다는 게 그의 표현이다. 그러나 타고난 일복답게 ‘휴식’은 길지 않았다. 당시 IMF 쇼크로 부도가 났던 기아그룹 회장으로 복귀한 것.

 “1997년 10월말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부르더군요. 3년 선배인 강경식 부총리가 ‘기아그룹 회장으로 가서 잘 해결해 보라’고 불러 팔자에 없던 그룹 회장도 했지요.”(당시 김태구 대우차 회장, 이대원 삼성차 대표이사 부회장, 진념 기아차 회장 등 국내 자동차 3사 CEO가 모두 진념 당시 기아차 회장과 서울대 상대 59학번 동기동창생이다.)

 1962년 제14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후 1963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직에 진출한 후, 2002년 4월 경제부총리를 끝으로 퇴임한 그는 공직 40년 중 정확히 37년을 현직에 있었던 셈이다.

 학창시절 ‘짱구’로 불렸던 그는 관료 재직 때 얻었던 ‘해결사’라는 별명을 좋아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도 2001년 5월 ‘여야정 대타협’을 꼽는다.

 여야 경제통 의원 12명과 경제장관 5명이 넥타이를 풀고 하룻밤을 보내며 ‘7개항 합의’를 이끌어냈는데, 당시 중재자가 바로 진념 전 부총리다. 그는 “그때 1박2일간 합숙하며 회의를 끝냈더니 새벽 1시가 넘었다”라며, “끝나고 소주폭탄 5잔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고 들려줬다. 반면 가장 아쉬웠던 순간으로는 “2001년 말 교육부가 교육개혁안을 만들 때 여섯 가지 S/W(소트프웨어)를 줬는데 반영되지 않았던 점”을 꼽았다.

 당시 ‘2002년부터 자립형 사립고를 시범 운영하고 확대시킨다’라는 안건이 통과됐다면, 최소한 자립형 사립고 확대에 시간적으로 5년은 벌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아쉬움이다.(2006년 현재 운영 중인 6개 자립형 사립고를 2007년부터 20개로 확대한다는 게 정부 계획이다.)



 “2009년 1월부터 규제 다 풀어라”

 화제를 2006년 한국경제로 돌렸다. 한국 경제계 원로로서 그의 전망이 궁금해서였다. 그러자 직접화법으로 소신을 밝혔다.



 (기자) 정부는 올해 5% 성장을 예상하며 본격적인 경기회복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진념) 5%요? 안 될 건 없지요. 그런데 4%냐, 5%냐 하는 논쟁이 의미가 있 습니까. 단순한 숫자보다는 경기활력 회복이 중요하지요. (그는 ‘경기회복’이 아닌 ‘경기활력 회복’이란 용어를 썼다. 경기활력 회복이란 정부, 기업, 가계 등 경제 주체들이 공감하는 ‘경기회복’이란 뜻이다. 이른바 경기활력을 되찾는 특효약으로 그는 두 가지 키워드를 들었다. 기업들에겐 투자 회복을, 정부엔 규제 해제를 제시했다.)

 올해 5% 성장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지속가능한 성장이죠. 이를 위해선 성장동력 확보가 관건인데, 단순한 제조업 중심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의료, 보건, 관광 등 이른바 ‘글로벌 서비스업’을 적극 키워야 합니다. 선결 과제로 규제를 푸는 게 우선이죠.

 (기자) 규제를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진념) 2009년 1월부터 모든 규제를 혁파하는 겁니다. 이른바 제로베이스 방식의 ‘규제일몰제’를 도입하자는 것이죠. 국가안보와 국민생활 보호, 안전 등 필수 규제를 빼고는 100% 규제를 푸는 겁니다. 한꺼번에 바꾸기 어려우니까, 3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자는 거죠. 정부는 10년 넘게 규제를 풀어왔는데, 경제 주체들이 느끼는 체감도가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밝힌 건 규제 완화가 아니라 규제 혁파다. 쉽게 말해 정부 규제를 네거티브시스템으로 만들자는 것. ‘규제를 풀 바엔 확 풀라’는 게 그의 해법이다.)



 그는 “21세기는 아시아시대”라며, “중국경제가 쾌속항진하고 있다면 한국경제는 삼보일배식”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경제엔 여야가 없지 않느냐”라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여야 경제통이 머리를 맞대고 한국경제 신성장 동력 찾기에 나서야 할 때”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현재 한덕수 경제팀에게 점수를 준다면 얼마를 주겠냐는 질문엔 “열심히 하는 후배에 평점을 어떻게 매길 수 있겠느냐”라며 말을 아꼈다. 한덕수(57) 경제부총리도 서울대 경제학과 8년 후배다.



 “민간 기업엔 가지 않겠다”

 인터뷰 말미에 그의 향후 거취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서강대 교수는 올해 봄 학기까지만 한다”라고 말했다. 몇몇 대학에서 교수 초빙 계획이 있어 강단에는 계속 서겠다는 뜻도 밝혔다. 사외이사는 3년 임기가 만료되고, LG전자는 1년이 더 남아 있다. 반면 세간의 관심 사항인 5월 선거 출마에 대해선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기자) 민주당에서 도지사 후보로 영입하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진념) 정치엔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그쪽(민주당)에도 ‘정치는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2002년 5월 그는 ‘한국판 에른하르트’(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때 아데나워 내각의 연방경제장관에 취임 후 연방의회 의원에 당선된 관료출신 정치인)를 꿈꾸며 민주당 경기지사 후보로 나섰다 쓴물을 삼킨 경험이 있다.)



 재계 일각에서는 그를 두산그룹 새 회장 후보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과거 기아차 구원투수로 나섰듯, ‘형제다툼’으로 이미지가 추락한 두산의 새 회장으로 적임자라는 평이다. 실제 진념 전 부총리는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과 서울대 상대 동기동창생으로 절친한 것으로 알려진 게 소문의 요지.

 그러나 그는 “제안도 없었고, (제안이 온다고 해도) 그럴 생각도 없다”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는 “(박 전 회장과) 동창생이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도는 모양인데, 80년대 중반에 320명의 동창생이 다 모인 적이 있는데, 당시 CEO만 100명이 넘었다”라면서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반응이다.

 실제 서울상대 59학번 중엔 박용성 두산 전 회장을 비롯, 손길승 SK 전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이필곤 전 삼성그룹 회장 등 전 현직 CEO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는 “민간기업으로는 가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향후 계획과 관련, “한국경제의 ‘응원단장’으로 남고 싶다”라면서도 “경제 원로로서 할 일은 많이 있다”라고 밝혔다. 민간기업 CEO나 정치권 입성 등은 고려치 않지만, 대학이나 경제단체 등에 몸담으면서 정부에 훈수를 하는 역할을 계속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는 미국 하와이대학 이스트웨스터센터와 회의를 위해 1월15일 출국, 2월 15일 귀국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