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술년을 맞아 박현주(48)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또 다른 성공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그룹으로의 도약이 바로 그것. 박 회장의 2006년 행보를 미리 알아봤다.
 2005년 5월3일, 증권업계 이목이 한 군데로 집중됐다. 미래에셋이 SK생명 매각에서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이때 대형 증권사의 한 CEO는 “이제 미래에셋이 작심하고 덤비기 시작했다”라며 임직원들에게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을 주문했다.

 사실 미래에셋의 SK생명 인수는 증권은 물론 자산운용 업계의 판도를 바꿀 만한 대형사고로 평가받고 있다. ‘박현주’라는 브랜드와 뛰어난 펀드 운용 실적을 통해 자산운용시장을 급속히 잠식하고 있는 미래에셋이 보험사마저 인수하게 되면 자산운용시장 제패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미래에셋 내 자산운용 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미래에셋자산운용, 미래에셋투신운용, 맵스자산운용 등 3개사의 총 설정액은 17조원(2006년 1월9일 현재)에 달하고 있다. 이는 삼성, 대한, 한국투신에 이어 4번째로 많은 규모로 불과 7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

 박현주 회장 역시 “SK생명을 인수해 보험시장에 진출하고 미래에셋을 국내 최고의 전문 자산운용그룹으로 키우겠다”라고 하며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궁극적으로 미국의 ‘버크셔 해서웨이’와 같은 고수익 대형 투자회사가 목표”라고 말해 글로벌 금융회사에 대한 청사진도 밝혔다.

 대다수 금융권 CEO들이 국내에서 시장 수성만을 고민할 때 박 회장은 이미 해외시장을 통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 회장이 SK생명 인수 전후로 홍콩과 싱가포르에 자산운용사를 설립한 것도 단순히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진 우연히 일치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M&A를 통한 몸집 불리기조차도 철저한 시장 분석과 목표 아래 단계적으로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 미래에셋 측의 설명이다.

 미래에셋 한 임원은 “글로벌 금융회사는 그룹의 전략적 목표였다”며, “SK생명이 시장에 매물로 나왔던 것은 시기적으로 잘 맞아 떨어진 것이지만, M&A를 결정하게 된 것은 이 같은 전략적 목표 아래에서 시행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라고 귀띔했다.



 글로벌 금융회사 변신 본격화

 박현주 회장에게 2006년은 두 가지 면에서 특별한 한해다. 미래에셋증권의 증시 상장과 글로벌 금융회사로의 기반 확립이 바로 그것.

 박 회장이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고 크게 공을 들였던 미래에셋증권은 설립 6년 2개월 만인 2006년 2월 증시에 상장될 예정이다. 미래에셋증권 상장이 박 회장에게 남다른 것은 가장 많은 애정을 쏟은 회사라는 점도 있지만, 9개의 회사 중 처음으로 상장된다는 점 때문이다. 즉, 미래에셋증권 상장은 박 회장의 성공 스토리가 시장에서 객관적으로 평가받는 첫 시험대가 되는 것이다.

 미래에셋 한 고위 관계자는 “땀과 열정만을 놓고 본다면 박 회장에게 미래에셋증권은 각별하다”라며, “특히 이번 상장은 그 땀과 열정에 대한 첫 시험대이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 쓰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래에셋증권의 주가를 공모가 상단인 5만3000원으로 가정할 경우 시가총액은 1조4138억원이 된다. 이는 국내 증권사들 가운데 7위에 해당하는 규모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증권 상장으로 조달되는 2000억원 가량의 자금을 전문 금융인력 육성, 해외 자회사 설립 등 글로벌 금융회사 도약을 위해 쓸 계획이다. 이미 전문 금융인력 육성과 관련해서는 금융사관학교 설립과 자금 지원 플랜을 짜 놓은 상태다. 이와 관련해 미래에셋은 올 상반기부터 국내 대학생을 대상으로 매년 30명씩 10년간 총 300명을 선발해 미국, 영국 등 금융 선진국에서 대학, 대학원, 경영학석사(MBA) 코스를 밟도록 할 예정이다. 선발 인력들의 진학자금과 학비, 생활비 등 비용 전액은 미래에셋이 지원한다.

 미래에셋 관계자는 “최근 금융인재 육성을 위해 10년간 500억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라며, “미래에셋증권 상장이 끝난 후 곧바로 시행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또 홍콩, 싱가포르 2곳에 자산운용사를 설립한 박 회장은 올해 인도, 베트남 등 아시아 개발도상국 중심으로 자산운용사를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우선 명실상부한 아시아 자산운용그룹으로 성장한다는 포부다. 또 시장 상황을 봐 가며 단계별로 유럽 등지에도 자산운용사를 설립하는 것도 계획 중이다.



 추진력 탁월… ‘혼자 독주’ 지적도

 미래에셋이 10년도 채 안 돼 금융권을 주도하는 금융그룹으로 성장한 것은 박현주 회장의 뛰어난 추진력과 통찰력, 그리고 고집 때문이다.

 특히 박 회장의 추진력은 탱크에 비유된다. 적립식 펀드 판매가 대표적인 사례다. 미래에셋은 업계에서 가장 먼저 적립식 펀드를 내놓긴 했지만,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어 대규모 마케팅을 망설였다고 한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일단 지켜보자’라는 얘기들이 많았고, 실패에 따른 책임 부담을 의식한 경영진들도 제대로 주사위를 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박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느 날 경영진들 모아 놓고 ‘모두 뭐하는 것이냐’라고 하면서 혼을 내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적립식 펀드를 대대적으로 마케팅하자는 의견은 극소수에 불과했죠.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요. 결국엔 회의가 끝나고 계획했던 마케팅을 시작했죠. 결과요? 한 집 건너 하나씩 적립식 펀드를 가질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죠.”(미래에셋 관계자)

 2004년 말 적립식 펀드를 선보인 미래에셋은 현재 설정규모가 4조원에 육박하고, 보유한 적립식 계좌 수도 180만 계좌에 달한다. 이는 금융권 전체 계좌의 20%에 달하는 엄청난 수치다.

 박 회장의 추진력은 단순한 배짱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시장을 보는 균형적인 감각과 동물적인 투자 센스에서 비롯된다.

 박 회장은 고집도 보통이 아니다. 일단 결정한 사항은 포기하는 법이 없다고 한다. 박 회장이 1986년 대학원생 시절에 만들었던 내외증권연구소를 접고, 증권사(동양증권)에 처음 입사했을 때의 일화다. 동양증권 입사를 결심한 그는 당시 입지적 인물이던 이승배 영업상무를 찾아간다. 그는 당시 주식투자로 명성을 얻었던 터라 과장이나 대리 입사를 자신했지만, 이 상무를 만나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하고 만다. 다음날 같은 시각 또다시 이 상무를 찾아갔다. 결과는 또 문전박대. 이후 서너 번을 더 찾아가 결국엔 이 상무를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입사 불가였다. 과장이나 대리 직함은 차치하고, 신입도 불가하다는 말만 들었다. 그는 다음날 또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입으로 채용해 주시되 상무님 앞자리에 자리를 만들어 달라.” 결국 신입으로 입사한 그는 이 상무 바로 앞자리에 자리를 텄고, 3개월도 채 안 돼 대리로 초고속 승진을 한다.

 증권업계 일각에서는 박 회장의 급성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박 회장 일인 중심의 경영 체제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미래에셋 내부에서는 “박 회장이 너무 앞서가는 바람에 뒤를 따라가기도 힘들다”, “성장에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지만 보상에는 인색하다”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때문에 금융전문가들 사이에선 제2의 도약에 앞서 박 회장 스스로 걸어온 과정을 다시 한번 챙겨 봐야 할 때라는 충고가 하나둘씩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