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정국의 중심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정치의 중심에 서서 화려한 일인극을 펼쳐 왔다. 그런 노 대통령의 임기도 지난 8월25일로 절반이 지났다. 이때쯤이면 현직 대통령 중심의 정치구도에 서서히 다음 주자들의 모습이 겹쳐지기 마련이다. 5년 단임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1987년 이후 예외 없이 보여준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여름 노 대통령은 이런 역사의 관행과 싸우기로 작정한 듯했다. 임기 절반을 남겨 둔 상태에서 한국 정치의 고질병들과 전면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노 대통령은 7월 초부터 줄기차게 ‘연정(聯政)론’을 제기했다. 연정의 상대도 정치권에서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 같은 군소정당이 아니라 지금껏 나라의 운명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여 왔던 한나라당을 꼽았다.

 노 대통령 주변에서조차 아직도 이 연정 제의의 ‘숨은 노림수’가 무엇인지, 현실적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다. 그러나 두 달여에 걸친 대(大)공세 결과, 연정론은 이제 최대 정치현안으로 자리잡게 됐다. 노 대통령의 집요함이 거둔 성과다.

 사실 처음 노 대통령이 연정을 얘기했을 땐,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조차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연정의 파트너로 꼽힌 한나라당은 아예 ‘무시전략’으로 일관했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식이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계속 연정을 밀어붙이면서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물론 현역 정치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아직도 연정이 성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연정론이라는 형태로 등장한 노 대통령의 정치구도 흔들기는 이제 정치권의 중심 화제가 됐다.

 연정론은 9월 접어들면서 당분간 잠복기에 접어들었다. 지난 9월7일 청와대에서 열린 노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단독회담이 가파른 연정의 물결을 잠재우는 직접적 계기였다. 노 대통령은 8월 내내 ‘권력 통째 이양’, ‘2선 후퇴, 임기단축’ 같은 파격적 제안을 하며, 한나라당의 관심을 끌어보려 했다. 그러나 청와대회담에서 ‘퇴짜’를 맞았다. 박 대표가 “그런 권력을 원치 않는다. 국민이 주는 권력을 얻겠다”며, 연정논의를 그만둘 것을 요구한 것이다. 노 대통령도 지난 9월8일 중남미 순방길에 오른 특별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당분간 연정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박 대표가 연정 얘기만 안 하면 (국정을) 돕는다고 했다. 같은 얘기를 계속 할 수 있겠느냐”는 게 노 대통령의 설명이었다.

 마치 지난 7~8월 두 달 동안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연정정국이 초가을 서리를 맞아 급랭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제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대해 품었던 연정은 끝난 것일까. 누구도 속단할 수 없는 대목이다.

 당초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생각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여소야대’ 때문이라고 한다. 청와대 측은 1987년 민주화 체제 등장 이후, 지금의 정치구도에서는 여소야대가 고착될 수밖에 없고, 이는 한국의 국가적 경쟁력을 가로막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주장해 왔다. 여대야소로 출발했던 17대 국회도 1년여 만인 지난 4월30일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를 거치면서 다시 여소야대가 됐다.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 계속 심화될 것이다. 10월 재보선과 내년 4월 재보선을 거치면 현재 145석의 여당 의석은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를 맞은 직후 야당이 윤광웅 국방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발의하는 걸 보고 ‘이대론 안 되겠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고 한다.  비록 민노당이 야권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윤 장관 해임 건의안은 부결됐지만, 만약 야권이 공동전선을 펴기로 마음먹는다면 언제든지 각료 해임안 제출이 가능하고, 또 통과 가능성도 높다고 할 수 있다. 즉, 노 대통령에게 ‘연정이라도 해야겠다’는 결심을 촉발시킨 정치구조적 상황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노 대통령이 더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쪽으로 진행될 전망이다.

 게다가 여권은 다가오는 주요 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키 힘든 상황이다. 당장 눈앞에 닥친 10월 재보선을 놓고 여당 내에서조차 또 다시 ‘전패(全敗)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내년 5월의 지방선거의 경우, 현재 여당은 어느 한 곳에서도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패배의 전조 속에서 여권은 2007년 대통령선거를 맞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불리한 구도를 깨려면, 판을 흔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작년 4월 총선 이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여권의 유력 대선후보인 정동영 통일부장관과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때 한나라당 후보들과 1·2위를 다퉜던 정 장관에 대한 지지율은, 한나라당 박 대표나 이명박 서울시장의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또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고건 전 총리는 여권의 아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호남지역에서 초강세를 보이고 있다.

 아직 대선이 2년 넘게 남았다고는 하지만 여권후보의 고전은 불가피해 보인다. 노 대통령의 연정론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열린우리당 인사들조차 다음 선거 승리를 위한 ‘판 흔들기’라는 대목에 이르면 적잖은 공감을 표시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한나라당 박 대표가 청와대회담에서 연정 제안을 공개적으로 거절하면서 이 문제가 수면 아래로 들어간 듯 보이지만 정치구조적으로는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이제 정가의 관심은 노 대통령의 ‘다음 수’에 관한 것이다. 또 다시 연정을 들고 나올 것인지, 아니면 민주당과의 소연정으로 급선회할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본격적인 정계 개편에 나서는 것은 아닌지, 온갖 설(說)과 관측이 무성하다. 노 대통령이 이쯤에서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분간 노 대통령이 펼치는 정치 일인극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