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벽산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건축자재회사다. 과거 석고보드 생산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던 벽산은 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회사의 주력 공장인 석고보드 공장을 매각했다. 당시 대표이사로 매각 결정의 한가운데 있었던 김재우(61) 부회장은 벽산 창업 이래 최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물에 빠진 사람 살려놓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죠? 물에 빠진 상황과 물에서 나온 상황은 그만큼 다릅니다. 물에 빠진 사람 입장에서 가장 절실한 건 목숨을 건지는 일이죠. 제 아무리 값비싼 보석이라도 목숨이라는 절대적인 목표 앞에서는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김재우 벽산 부회장은 1998년 난파 직전인 벽산이라는 배의 선장으로 취임했다. 과도한 차입 경영으로 인해 연간 총 매출액과 차입금이 같아질 정도로 회사는 여기저기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위기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은행들은 회사채 만기 연장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삼성물산과 삼성중공업에 27년간 몸담았던 김 부회장은 1997년 3월, 벽산건설 사장으로 취임해 벽산과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인 1998년 1월엔 벽산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김 부회장은  “실패라곤 모르고 살다가 경영난에 빠진 벽산을 맡으니 마음이 복잡했다”고 술회했다.



 대형 참사 사건서 ‘힌트’ 얻어

 “CEO란 긴장의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매 순간순간 최선의 결정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집에 불이 나는 것 같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당황하게 마련이죠. 허둥지둥하며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평소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막상 그 상황에 닥치면 허둥댈 수밖에 없죠. 그럴 때 차분하게 가야 할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전문경영인입니다.”

 김 부회장에게도 생전 처음 맞부닥친 외환위기가 이전과 전혀 다른 강도의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회사가 난파해 바다에 가라앉지 않도록 해야 했다. 급작스런 위기에 다들 허둥대고 불안해하는 상황에서 김 부회장은 5가지 카드를 제시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한 최후의 5가지 방법 중에는 핵심 사업분야인 석고보드 공장 매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 부회장은 “5명의 신붓감과 선을 보는데 한 명과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물론 그중에는 꼭 피하고 싶은 결과가 있었다. 석고보드 공장 매각 시나리오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협상 상대는 오직 석고보드 공장만을 탐냈다. 4개월간 물밑 협상 끝에 결국 1998년 12월, 석고보드 공장은 프랑스의 라파즈 그룹에 매각되었다.

 석고보드 공장 매각 소식을 들은 주주들은 물론 임직원들의 허탈감은 무척 컸다. 회사의 상징과 같은 사업분야의 매각은 직원들에게 정체성 상실처럼 다가오는 듯했다. 직원들을 추슬러 ‘다시 시작해보자’고 격려하는 것은 공장 매각보다 더 중요한 일로  다가왔다.

 “매각을 비롯한 협상을 추진하면서도 가장 큰 고민은 ‘석고보드 분야를 팔면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벽산에 오래 몸담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래된 물건이나 사람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함부로 하지 못하죠. 그러나 난 외부에서 온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런 과거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협상하랴, 회사를 새롭게 먹여살릴 신사업 분야를 고심하랴 바쁘던 그의 눈에 두 건의 큰 사건사고가 들어왔다. 미성년자들이 대거 사망했던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과 어린 유치원생들이 대거 참변을 당했던 인천 씨월드 화재 사건이었다. 두 사건 모두 제대로 된 건축자재를 썼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  김 부회장도 사고를 보면서 “불이 난 후 1시간 이상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내화재를 썼더라면…” 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법적 규정이 허술했던 데다 사람들의 인식도 없을 때였다. 김 부회장은 무릎을 쳤다. 석고보드에 이어 ‘내화재’가 새롭게 각광받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스트레스, 독서와 노래방에서 풀어

 “프랑스 라파즈측에 공장을 넘겨주던 날, ‘이제 당신네 공장이 되었으니 축하한다.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당신네가 물건을 만들면 우리가 팔아주겠다. 우린 오랜 고객은 물론 판매망을 가지고 있다’고 제안했어요. 라파즈는 보스턴 컨설팅이라는 곳에 용역을 줘서 두 달 정도 작업을 하더니 우리더러 판매를 전담하라고 하더군요. 내화재 생산에 이어 또 하나의 성장 동력을 얻는 순간이었습니다.”

 공장 매각과 새로운 성장동력의 창출을 동시에 해낸 김 부회장의 결단과 방향 설정은 결국 벽산을 살려냈다. 미심쩍어하는 직원도, 의욕 상실에 빠진 직원도 있었지만 그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말했고, 결국 내화재는 새로운 수익 창출 모델이 되었다.

 “CEO는 북쪽으로 가고 있는 배를 서쪽으로 돌릴 수 있는 방향감각과 결단, 그리고 설득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판단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죠. 그 믿음은 바로 미래를 믿는 힘입니다. 그렇다고 결단이 무슨 대단한 착상이나 발상만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선택했다는 건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포기했다는 말인데, 어떤 걸 포기하느냐에 따라 CEO의 자질이 판별된다고 봐요.”

 오늘도 많은 선택과 결단을 앞두고 고민하는 CEO들에게 김 부회장은 “아이들처럼 솔직해져 말랑말랑한 감성을 가져라”라고 조언한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결코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많은 선택과 판단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김 부회장은 격무를 이겨내는 힌트라며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읽거나 노래 부르기’를 권했다. “말랑말랑한 감성을 가지고 미래를 위한 결단을 내리는 데 더없이 좋은 방법”이라는 귀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