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9년 로마제국의 야전사령관 시저는 루비콘강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가 북방 원정차 로마를 비운 새 3두정치의 한 축이자 동지였던 폼페이우스가 등을 돌려 로마 원로원과 결탁, 목을 옥죄어 왔기 때문이다. 백기 투항이냐, 결사 항전이냐 선택은 둘 중 하나. 마침내 시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로 결단을 내렸다. 곧바로 루비콘강을 건너 사력을 다해 로마를 쳤다. 승자는 시저였다. CEO는 고독하다. 평소 그의 주위엔 참모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최종 결단의 순간엔 다 빠진다. <이코노미플러스>는 재계 CEO들이 기업 생사를 건 절체절명의 순간에 렌즈를 맞춰 CEO들의 결단력 유형을 제시코자 한다.

 생사 건 45억원대 리콜 선언 수백억원대 물량 납품 계기 돼



 “뭐요? 불량이라구요?” 휴대용 영상 노래반주기로 올해 1000억원대 매출을 바라보는 이경호(45) 엔터기술 사장. 그는 2000년 12월18일을 잊을 수가 없다.

 94년 5월 창업 후 6년여. 천신만고 끝에 따낸 첫 대량 수출 때 ‘제품에 하자 있다’는 비보를 접한 날이기 때문이다. 일본 3대 가전업체인 산요사에 노래반주기 2만대를 부산항에서 실려 보낸 지 정확히 3일만이다.

 희망에 들떠 샴페인을 터뜨렸던 회사 분위기는 일순간 싸늘해졌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그길로 바로 비행기를 잡아탔다.

 “그럴 리가 없어. 테스트에서도 무사통과되지 않았나. 그런 제품이 며칠만에 불량이라니 말도 안되지.”

 두 시간 남짓한 오사카행 비행 시간 내내 그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이대로 ‘3일 천하’로 끝날 것인가. 그의 머릿속엔 창업 후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겨 온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엔터기술은 현재 코스닥 등록 기업 중 알짜 회사로 꼽힌다. 노래방이 한창 뜨던 시절 ‘휴대용 노래방기기를 만들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던 게 사업 아이디어. 그 노래반주기 하나로 창업 10년만인 지난해 652억원 매출액에 당기순이익만 133억원을 뽑아냈다. 매출액 중 98%가 수출이다.

 엔터기술도 리콜 사건이 터진 2000년만 해도 다른 벤처사처럼 ‘3고(苦)’를 톡톡히 겪었다. 3고란 자금난, 기술난, 인재난이다.



 99년말 마이크 하나 들고 도미

 무엇보다 이사장은 돈가뭄에 치를 떨었다. 1999년까지 5년간 연구 개발에 쏟아부은 돈만 18억원. 집은 은행 담보로 잡혔고 개인 빚만 5억원에 사업 초기 의기투합했던 엔지니어, 앤젤 투자자 등 창업 멤버들도 모두 떠나버렸다. 그들이 던진 말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였다.

 어렵사리 98년 첫 제품 ‘매직씽’을 내놓았지만 판로가 문제였다. 술 한 잔 해야 노래를 하는 국내에선 팔려 봤자 소량이었던 실정. 결국 그는 99년말 달랑 마이크 하나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사장은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것밖에 길이 안보였다”고 회고했다.

 물색 끝에 마련한 좌판이 애너하임의 자릿세 3000달러짜리 벼룩시장 모퉁이였다. 현지에서 팝송깨나 부르는 아르바이트생을 채용, 노래를 부르게 했고 자신은 라면으로 세끼를 떼워 가며 몇달을 버텼다. 그렇게 알려지면서 플로리다,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지서 ‘물건을 떼다 팔아보겠다’는 자생적 딜러들이 등장, 벼룩시장내 ‘명물’로 자리잡았던 것. 그러나 이때만 해도 판매 단위가 적게는 몇십대, 많아야 몇백대 남짓한 ‘푼돈’이었다.

 마침내 2000년 5월 기회가 왔다. 바로 일본 산요다. 산요사 구매 담당 직원들이 수소문 끝에 경기 부천시 오정구에 있는 엔터기술을 찾아왔다.

 “엔터기술 제품을 익히 들었습니다. 수입해 보고 싶은데요.”

 이경호 사장은 쾌재를 불렀다. 산요가 어떤 회사인가. 마쓰시타, 소니와 함께 일본 전자기업의 3대 업체 아닌가.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다가왔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의 품질 테스트란 벽이다. 이때 또 돈 문제가 걸렸다.  첨단 테스트 기기를 갖출 여력이 없었던 탓이다.

 섭씨 영하 10도와 영상 80도에 견뎌야 하는 항온 테스트를 위해선 냉장고와 5분 정도 바람을 쐬면 250도까지 올라가는 드라이어를 사용했다. 이사장은 “순간 전류 8KW에 견뎌야 하는 정전기 테스트는 라이터를 개조, 만든 임시 테스터를 활용하기도 했다”고 들려줬다.

 바이어 방문 두달만인 2000년 7월 천신만고 끝에 수주 OK 사인을 받아내긴 했다. 이젠 납기를 맞춰야 했다. 내심 11월말을 데드라인으로 잡아 놓은 산요측 요구에 이사장은 마음이 다급했다. 운영 자금이 모자라 직원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생산 라인이 가동됐지만 어느새 12월로 넘어섰다. 낮에는 아줌마들이 공장을 돌렸고, 밤엔 당시 20여명의 전직원이 매일 밤 인간 컨베이어 벨트로 가동됐다. 작업 5개월만인 12월15일 부산항에서 컨테이너 박스에 2만대를 실려 보내자 긴장이 풀린 듯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때의 감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죠. 어찌나 부산 바다가 아름다워 보이는지… 직원들과 회식도 진하게 했습니다.”



 ‘리콜’이냐 ‘나몰라라’이냐 놓고 갈등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납품을 성공리에 끝마쳤을 때 날아온 산요의 전화 한 통은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이사장은 오사카에 있는 산요에 들어서자마자 제품을 받아 창고로 갔다. 산요 바이어들이 보는 앞에서 뜯어 봤더니 정말 문제가 있었다. 보조 마이크에서 주파수가 흔들리며 잡음이 났던 것. 한국과 다른 일본의 습도 때문이었다.

 순간 이사장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한국에서 일본 검수관을 통해 OK 사인을 받은 제품들이라 산요는 반품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은 100% 이사장 몫이었다.

 그렇다고 이사장이 ‘너희(산요)가 다 떠안아라’는 식으로 밀고 나갈 수는 없었다. A급 바이어인 산요와의 거래가 끊길 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모른척하고 45억원을 챙길 것인가, 향후를 내다보고 ‘보험료’ 낸 셈 칠 것인가.’

 그러나 보험료 치곤 아픔이 너무 큰 액수다. 당시 납품 가격은 대당 188달러. 2만대로 계산하면 376만달러. 당시 환율 1200원으로 환산하면 무려 45억원에 달했다. 이 돈은 2000년 엔터기술의 1년 전체 매출을 능가하는 액수였다.

 슬슬 그의 눈치만 보고 있던 산요 바이어 앞에서 이사장은 1분간 함구하다가 딱 한마디 했다.

 “2만대를 전량 회수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산요 바이어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눈앞의 이익보단 ‘미래’를 선택한 셈이다.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며 그 자리를 피해 장고할 수도 있었지만, 이사장은 그 자리에서 ‘리콜’을 외친 것이다.

 일명 ‘2만대 리콜 사건’ 후 엔터기술과 산요의 관계는 어떻게 됐을까.

이사장의 베팅은 적중했다. 2003년 산요는 엔터기술에 191억원어치의 물량을 주문했다. 이는 엔터기술 2003년 매출액 393억원의 49%에 해당하는 액수다. 지난해에도 167억원어치를 주문, 엔터기술의 주력 고객사로 산요는 화답했다.

 올해 엔터기술은 창립 11년만에 매출액 1200억원대를 목표로 뛰고 있다. 수출 무대는 미국과 필리핀·일본 등 3대 수출국을 비롯, 영국·이탈리아·캐나다·브라질·모로코·뉴질랜드 등 6대주 20개국에 달한다.

 이경호 사장은 “만약 그때 눈앞의 ‘돈’에 눈이 멀었다면 현재의 엔터기술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면서 산요 2만대 리콜을 11년 CEO 생활 중 최고의 결단으로 꼽았다.

박인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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