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인맥이 존재하고 있다. 학연·지연·혈연이 기본적인 바탕을 이룬다. 이들은 사회 곳곳에서 얽히고설킨 하나의 집단으로 성장해 때로는 긍정적인, 때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특히 국가 정책 결정에 이들 인맥이 전면 배치됐을 때 그 영향력은 실로 막강할 수밖에 없다.

 소수에 의한 집단의 힘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피를 뿌렸던 각종 사화(士禍) 역시 이 같은 인맥에 의한 폐해로 지적되고 있다. 또 근현대사에서도 여러 인맥들이 우리 사회를 왜곡시키는 주역으로 등장했던 것을 볼 수 있다.



 히 알려진 인맥의 대부분은 정치 분야에서 쉽게 찾아진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최고 통치권자와 그 주변인에 의한 각종 사조직들이 여러 형태의 인맥을 통해 형성됐고, 또 당대의 권력을 향유했다. 정치 외적인 분야의 인맥도 존재하긴 했지만 그들은 정치 분야 인맥을 보좌하는 수준에서 평가를 받았을 뿐이다. 사실상 정책 결정권자가 정치 분야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다만 경제 분야는 사정이 조금 달랐고, 지금도 다르다. 최고 권력을 쥐었던 통치권자들의 경제 분야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던 탓에 한때 청와대 경제수석 가운데 한 명은 ‘경제 대통령’으로까지 치켜세워지기도 했다.

 바꿔 말하면 특정인의 중용으로 특정 인맥의 관료 집단화가 이뤄질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들은 최고 권력자로부터 목표치를 부여받은 이후 일정 부분 독립성을 인정받아 자신들의 학문적 신념을 정책에 반영하고 현실에서 검증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경제 인맥 역시 학문적 정체성과 일관성을 갖춘 조직이 아니었던 탓에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과 정책 수립 및 시행 과정에서의 방법론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특정 인맥의 관료 집단화 충분조건

 한국 경제를 움직였던 인맥을 학파로는 인정하지 않은 경제학자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즉 이들 대부분이 지향하는 이론은 합리적 시장자율경제를 지향하는 신고전학파로 분류되지만 실제 적용하는 경제 원칙은 자율시장경제 원칙과는 거리가 멀었던 게 현실이었다는 분석이다.

 경제평론가 이성태 씨는 “한국의 경제 인맥은 이론적 동질성에 의한 집단이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하나의 이론 체계를 고집하는 학자집단이 아니라 친소관계에 의해 형성된 친목집단이라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이들의 집단화 과정을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체계적인 이론화 작업에 참여했던 경험이 없다. 특정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거나 가르쳤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특정한 이론이나 사조를 공유하는 학자들의 집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한 공간에서 경제학을 연구했던 이들이 일정한 계기를 통해 집단화됐으며 훗날 자신들이 아닌 타인들에 의해 ‘학파’라는 이름까지 부여받았다. 당연히 이들 학파가 추구하는 학문에 체계적인 이론이 정립됐을 리 없다.

물론 큰 틀에서의 이론적 동질성은 찾아진다. 그러나 그것 역시 흑백논리에서 선택을 강요받듯이 양자택일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즉, 케인스학파와 시카고학파 가운데 누구의 영향을 더 받았느냐는 식이다.

 사실 국내 경제학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왔다. 경제학이라는 신학문이 처음 소개된 것은 일본치하시대 보성전문의 윤길중 등에 의해서였지만 케인스학파 계열로 분류되는 미국 유학 1세대들이 학계를 장악한 1960~70년대부터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들은 경제 개혁에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신고전학파가 주류를 형성한 80년대부터는 자유로운 시장경제 논리가 학문적 성과로 나타났다. 미국 경제학계에서 시카고학파가 주류를 형성한 것과 그 괘를 같이했던 것이다. 

 최근엔 그동안 비주류로 여겨져 왔던 유럽파와 국내파가 전면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흐름은 어느 학자가 언제 경제관료로 등용됐느냐에 따른 분석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다. 집권세력에 의한 경제정책의 추진 방향을 근거로 한 것일 뿐 경제학의 발전 논리로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경제학계를 분류하는 데도 이 같은 기준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집단성을 가지고 있는 인맥 자체가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관료 집단화 여부에 보다 무게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경제 분야 인맥을 대표하는 집단으로는 대학을 기준으로 한 서울상대학파와 서강학파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서울상대학파는 어느 교수로부터 보다 많은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또 변형윤학파, 조순학파, 이현재학파로 나뉘고 있다.

 대학을 떠나서는 이헌재 부총리를 중심으로 모여든 ‘이헌재사단’도 한국 경제계의 대표적인 인맥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 경제 현실에서 서구 경제학 도입

 1969년 10월20일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수학 후 막 귀국한 남덕우 서강대 교수의 화곡동 집에 같은 대학 이승윤 교수가 들이닥쳤다. 청와대에서 남 교수를 급히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교수의 채근에 함께 택시를 타고 청와대를 향하던 남 교수는 라디오에서 자신의 이름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뉴스는 ‘재무장관에 남덕우 서강대 교수’였다.

 남 교수의 입각은 한국 현대사에서 경제관료 집단으로 서강학파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서강학파는 철저한 성장론자로 분류되고 있다. 서구식 경제 근대화 모델을 토대로 대기업·중화학공업 중심주의적인 경제정책을 펼쳤으며 수출지상주의, 신성장 후분배 등을 통한 압축 성장을 꾀했다. 한마디로 업적 제일주의적인 경제정책이 서강학파의 특징으로 분석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서강학파의 정책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먼저 한국의 경제 발전에 커다란 일익을 담당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고도 성장을 추구해 왔던 한국 경제의 현실에서 서구 경제학 도입에 앞장선 서강학파의 공로는 신화로까지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서강학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일부 경제학자들은 IMF를 비롯한 현재의 경제 위기의 원인 제공자를 또 서강학파라 주장하기도 한다. 즉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농산물 수입 확7대, 재벌 중심의 성장 전략, 공정 거래 문제에 대한 미온적인 시각, 대외 의존적인 경제 구조 심화 등을 우리나라의 근간에 부합하지 않는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 사상과 무차별적 민간 주도형 경제정책의 도입에 따른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 관료로 입각하기 이전에는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신고전학파 이론가들로 국가 개입의 최소화를 적극 자문했지만 입각 이후에는 오히려 성장지상주의적 근대화론자로 바뀌었던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출세 지향적이라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없지 않다.

 이 같은 비판에 대해 남덕우 전 총리는 지난 99년 ‘서강경제학의 의미와 역할’이라는 글에서 “서강학파라 불리워진 경제학자들은 개방경제 시스템에 중점을 둔 성장 전략을 추구했다”며 “자유경제체제 내지 시장경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저축과 투자 증대를 통한 성장을 꾀하였으며 수출과 기술 도입에 중점을 둔 전략을 택했다”고 정부 주도, 수출 위주의 성장 전략을 추구한 점을 시인했다. 다만 “정부 역할과 시장원리 사이의 충돌이 신진 정책 담당자들의 고민이었고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정치적·사회적 요인의 제약 아래서 시장경제 원리를 수호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는 변명도 잊지 않았다. 즉 정치적·사회적 요구를 이런 식 저런 식으로 시장경제 원리에 두드려 맞추는 기술자의 역할을 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때문에 그들에게 강요되거나 혹은 만들어 낸 정책 패턴은 경제이론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게 남 총리의 후일담이다.

 물론 경제이론을 정책에 적용하는 데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시장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도 없지 않다고 남 총리는 덧붙인다.

 지난 99년 5월 서강학파 멤버들이 주축이 된 ‘서강경제인포럼’ 창립 행사에서도 남 전 총리는 “정치 지도자가 정책 방향을 제시하면 거시적 이론 테두리에 두들겨 맞추는 테라노크라트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경제정책 담당자로서의 서강학파를 자평했다. 당시 정부 내에 경제학자는 많지 않았고 정치 우위 시대에서 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제약이 있었다며 신고전학파의 이론적 테두리를 지침으로 정치적·사회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꿰어 맞추는 기술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학자적 양심보다는 통치권자의 요구에 의해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피력했다는 평가다.



 학문이 아닌 영향력 행사 집단

 1970년대 개발경제시대를 주도했던 ‘서강학파’라는 표현은 경제학계를 주도한 학문적 세력이라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정부의 경제정책 수립과 집행에 참여해 영향력을 행사한 집단을 지칭하고 있다. 남 전 총리는 “서강학파라는 말은 미국에서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배우고 직간접으로 정부 정책에 영향을 끼친 신진 경제학자들을 대표적으로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집단이라기보다는 서강대 교수 출신의 관료를 통칭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덕우 전 총리, 이승윤 전 부총리, 김만제 전 부총리, 김병국 전 서강대 교수, 김종인 민주당 의원, 박성용 전 금융개혁위원장,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 김광석 세계경제연구소 전 상임자문위원, 김용환 전 재무장관,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소 이사장, 손학규 경기지사, 신병현 전 부총리, 이덕훈 금융통화위원, 장덕진 대륙연구소 회장, 최각규 전 부총리 등등이다.

 물론 여기에는 범서강학파 범주에서 분류되는 인물들도 있다. 소위 ‘남덕우 스쿨’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서강학파에 의해 중용되고, 하나의 집단으로 인맥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서강학파로 불리고 있다.

 이처럼 한국 경제계에서 가장 먼저 인맥화에 성공한 서강학파는 지금까지도 최대 인맥과 최대 관료 출신 집단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서강대 출신 교수들이 대거 관료화됐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 2000년 서강대 개교 40주년을 맞아 서강대 경제학연구원이 주최한 기념 심포지엄에서 김경환 교수는 ‘서강학파가 한국의 경제학 발전에 미친 영향’이라는 발제를 통해 교수진의 우수성으로 이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1960년 설립된 서강대는 경제학과의 경우 미국 유학 1세대 가운데 3분의 1을 교수진으로 끌어들였다. 1965년 현재 국내 대학 경제학과 교수 가운데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는 서강대 3명, 연세대 2명이 전부였다. 또 1971년에는 서강대 5명, 서울대 2명, 연세대 3명뿐이었다. 60년대에서 7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서강대는 미국에서 교육 받은 경제학 박사의 가장 큰 집결지였음을 알 수 있다.  



 IMF 외환위기가 대미 장식

 서강대에 우수한 교수들이 모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서강학파 1세대의 막내로 불리고 있는 김병주 교수는 올 2월 정년 퇴임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서강대 교수가 받는 월급은 다른 곳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서울대에 있다가 서강대로 옮긴 이승윤 교수에게 ‘왜 서강대로 왔느냐’고 물었더니 ‘봉급을 세 배 주는데 왜 안 오느냐’고 말했다. 내가 서강대로 왔을 때에도 월급이 두 배 이상으로 높았다.”

 당시 서강대는 서울대의 세 배에 달하는 월급과 완전 보장된 교수의 자율성 등 파격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때문에 국내 여타 대학 경제학과에 비해 우수한 교수진을 갖추고 최근의 경제이론을 흡수하여 체계적인 경제학 교육을 선도하고 있었다. 1964년 설립된 경제경영연구소를 통해서는 금융 부문 등 한국 경제에 대한 중요한 연구 결과를 펴내기도 했다.

 여기에 서강대 교수들은 경제학이 실천의 학문이라고 여겼다. 때문에 현실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정책 자문도 활발히 행하고 있었다.

 경제학자들이 전무했던 박정희 정권 당시 서강대 교수들은 당연히 개발 경제를 이끌 재목으로 평가됐고, 정책 자문 역할에 이어 남덕우 교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경제정책의 핵심으로의 부상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서강학파 가운데 남덕우-이승윤-김만제를 흔히 ‘빅3’라 부른다. 이들의 등장으로 서강학파는 경제 엘리트의 산실로 본격적인 자리 매김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이들 세 사람을 차례로 경제관료로 중용했다. 69년 남 교수가 가장 먼저 재무장관에 발탁됐고 이어 71년에는 이 교수와 김 교수가 금융통화운영위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 초대원장으로 뒤를 따랐다.

 이들은 재무장관과 부총리로 경제팀을 이끌었던 남덕우 교수를 중심으로 삼각편대를 이루며 한국 경제정책에서 핵심으로 부상, 서강학파의 산파 역할을 했다. 특히 남 교수는 최장수 재무장관(4년11개월), 최장수 부총리(4년3개월)의 대기록을 세우며 박정희 정권에서 9년1개월 동안 경제정책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박 대통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화학공업 육성 등 굵직한 정책들은 모두 그의 작품들이었다. 이에 재임기간 동안 연 10% 내외의 고속 성장의 신화를 창조했다. 또 중동 건설 붐 등에 힘입어 수출 100억달러, 국민소득 1000달러, 쌀생산 4000만섬 돌파 등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 같은 그의 경제정책 기조는 이후 서강학파 인맥의 주요 정책으로 이어졌다. 5공화국 경제팀을 이끌었던 김만제와 이승윤씨 역시 경제 확장 정책을 편 것이다. 김만제 부총리 취임 이후 한국 경제는 3저 현상 덕택에 고성장, 국제 수지 흑자라는 성적표를 남겼다. 물가 불안, 부실 기업 정리 과정에서의 의혹 등도 뒤따랐다. 이승윤 부총리도 설비 자금 1조원을 앞세운 ‘경제 활성화 종합대책’으로 김종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과 함께 6공화국의 성장 우선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그러나 서강학파는 97년 출범한 금융개혁위원회를 끝으로 화려했던 30여년간의 경제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마치게 된다. 서강학파의 대미를 장식한 금융개혁위원회는 박성용 당시 금호그룹 회장이 위원장을, 김병주 서강대 교수가 부위원장을 맡아 IMF 관리체제를 맞이해야 했다. 이처럼 69년 남덕우 교수의 재무장관 입각 이후 추진돼 왔던 서강학파의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은 IMF 관리체제라는 파국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성장에서 안정, 그리고 분배로

 서강학파의 몰락은 정권 교체라는 의미로 이어진다. 야당의 집권으로 한국의 경제정책은 박정희 정권부터 김영삼 정권까지 이어져 왔던 성장 기조에서 탈피했다. 소위 재야로 불렸던 경제학자들이 김대중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전면에 배치되면서 서강학파가 유지해 왔던 정책들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IMF 관리체제와 함께 집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서울대상대학파를 경제팀에 중용했다. 또 전형적인 관료 인맥으로 불리는 이헌재사단도 이때 경제팀의 수장으로 전면에 부상했다.

 물론 서울대상대학파 가운데 일부는 서강학파와 함께 양대 축을 이루며 고도성장 중심의 개발 경제의 핵심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관료 집단에서 인맥으로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한 채 개인적 차원의 입각에 머물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서울대상대학파는 지도교수가 누구였느냐에 따라 3대 인맥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현재-조순-변형윤학파가 그것이다. 

 88년 노태우 정권 출범과 함께 초대 국무총리로 입각한 이현재 교수는 경제학 이론을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현실 참여론을 펼쳤다. 역시 88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등용된 조순 교수는 안정론에 기초한 균형 발전론자로 제도 개혁과 형평 우선의 경제정책을 천명했다. 그러나 변혁적인 태도를 보이며 거시적인 경제 시각을 견지했던 변형윤 교수는 본인의 입각 대신 제자그룹을 대거 관료 집단화시켰다.

 이 가운데 서강학파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경제계 관료 집단은 일명 ‘변형윤학파’로 불리는 ‘학현(學峴)학파’다.

 변형윤 교수는 한국 경제학계에 계량경제학을 도입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응용 지향적이고 정책 지향적인 한국 경제학계의 편중성을 우려하고 순수이론 내지는 기초이론을 아우르는 균형있는 경제학 연구를 촉구했다. 선진국 시각에 맞춘 주류경제학을 맹신하는 풍토에서 벗어나 전통과 현실에 부합하는 새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게 변 교수의 경제관이다.

 4.19 혁명 당시 교수단 시위에 가담하는 등 평생 반독재 운동을 해왔지만 변 교수에게는 사회주의 경제학자나 급진 개혁사상가라는 평가는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학 체계 안에서 분배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비주류학자이고 온건 개혁론자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제자그룹인 학현학파의 멤버들에 대해서는 다소 과격한 평가까지 등장한다. 지나치게 형평을 강조한다는 지적과 경제 개혁 과정에서 수단의 과격화와 급진성에 대한 우려가 그것이다.



 경제학파의 정권 교체

  학현학파의 제도권 입성은 지난 98년 2월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가 김대중 정권 출범과 함께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되면서부터 본격화했다. 경제학계의 정권 교체라는 의미까지 붙여졌던 김 수석의 등장은 서강학파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학현학파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초기 경제관료로 입각한 학현학파 인맥들은 경직된 성장주의가 IMF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는 인식 아래 경제 구조의 전면 수술을 주장하는 반서강학파들이었다. 서강학파가 정부 요직을 독식했을 때 이들은 반정부인사였고, 학계에서는 비주류였다. 때문에 반재벌·반관료적 정서가 강했으며 경실련 등 시민단체가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저서 <대중경제론>도 학현학파의 이론적 도움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학현학파는 80년 전두환 정권 출범과 함께 강단에서 쫓겨난 변 교수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82년 광화문에 ‘학현연구실’을 설립한 데서 유래되고 있다. 변 교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93년  서울사회경제연구소로 확대, 개편하면서 인맥을 넘어 학파로 발전해 오고 있다.

 학현학파의 본부격인 서울사회경제연구소는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 경제 구조의 확립 방안 연구, 통일에 대비한 한국 경제의 미래상 정립, 변화하는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의 한국 경제 진로 모색 등을 주요 연구 과제로 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월례 토론회를 비롯해 심포지엄 및 워크숍 개최, 단행본·연구 총서 및 자료집의 발간, 연구 논문의 발표 등의 연구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학현학파의 특징은 이념적 동질성에서 찾아진다. 서강학파가 주도했던 경제학계와 경제정책은 고도 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 이른바 주류경제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이때 미국 유학 1세대로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변형윤 교수의 ‘분배경제학’은 많은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학현학파 멤버들이 효율보다 형평,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한 것도 이때 길러진 경제관 때문이다. 이들은 재벌 위주의 성장 정책에 반대하고 공정 경쟁과 노동자·농민 등 소외 계층에 대한 공정한 분배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경제학도 ‘따뜻한 가슴’을 가져야 한다는 변 교수의 지론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영국의 신고전학파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의 1885년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직 취임사에서 등장하는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 경제학도 인간의 구체적 삶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변 교수의 학문철학의 연원이 됐고, 제자그룹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에 이들은 한국 경제의 발전 모델도 균형발전론에 무게를 두고 있다.



 국민의 정부 때부터 경제 핵심 부상

 정일용 한국외대 교수는 학현학파에 대해 “경제와 경제학의 중심에 ‘인간’을 두고자 하며 물량적 성장보다는 경제의 정의, 민주화, 자립을 표방하는 경제학자 그룹”이라며 “변 선생의 학문과 삶을 통한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 “현실 개혁적이고 참여적이면서 실사구시적 학문 활동을 추구한다”고 말하고 있다. 때문에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하면 경실련,  참여연대 등 시민운동 단체에서도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학현학파의 주요 멤버로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정우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을 비롯해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김대환 노동부장관,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 김박수 대외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태동 금융통화위원 등이 꼽힌다. 또 학계에서는 김수행·안병직·박우희·김세원 서울대 교수와 이병천 강원대 교수, 권광식·박덕제 방송대 교수, 이경희 숙대 교수, 정일용 외국어대 교수, 윤진호 인하대 교수, 신강기 경원대 교수 등이 학현학파로 분류되고 있다. 이종태 (주)수국 회장도 학현 멤버다.

 여기에 김대중 정권 하에서 주요 경제 분야에 진출했던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 윤원배 전 금감위 부위원장, 이선 전 산업개발연구원장, 이진순 한국개발연구원장,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 장현준 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 김효석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등이 학현학파로 불리고 있다.

 김대중 정부 하에서 활동했던 이들 학현학파 멤버들은 ‘중경회’(中經會: 대중 경제를 생각하는 모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15대 대선 전 경제 분야 공약 개발을 위해 몇몇 경제학자들이 만나던 모임을 97년 12월 대선 직후 ‘이젠 우리도 이름을 하나 짓자’고 해 나온 명칭이 중경회다. 중경회는 학현학파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직접 연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92년 발간한 김 전 대통령의 저서 <대중경제론> 집필을 주도했는가 하면, 집권 후에도 묵묵히 경제경책과 비전을 만들어 갔다.

변 교수를 고문으로 학현학파의 주요 멤버들이 참여했으며 김원길 당시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이강래 전 정무수석이 참여해 김 전 대통령과의 가교 역할을 했다. 한때 ‘중경회를 알아야 DJ의 경제가 보인다’는 말이 나올 만큼 중경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제관에 이론적 토대와 실천 기반이었다.

중경회는 분배 구조의 개선에 초점을 맞추며 과거의 불균형 성장의 문제점을 갈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장 경제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현실 경제의 두터운 벽에 도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상아탑에만 머물지 않고 이론을 현장에 적용하려 한 노력도 제도권에서의 성공 여부를 떠나 재평가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중경회의 활동과 관련, 변 교수는 “지식인은 위기의 시대에 권력에 대해 견제와 자문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도 “지식인이 더 이상의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학현학파 가운데 중경회의 핵심 멤버로 불리는 김태동 당시 성균관대 교수는 국민의 정부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에 기용됐지만 곧 정책수석으로 자리를 옮기고 불과 1년 만에 학교로 돌아갔다. 그는 정책수석으로 옮긴 후 규제 50% 철폐, 개방형 공무원 임용제 등 관료사회 개혁에 몰두했지만 기존 관료집단의 저항에 밀리고 만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 정부에 참여했던 윤원배 당시 금감위 부위원장은 훗날 “김 수석의 경질로 이상을 펼치려던 중경회는 사실상 몰락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중경회의 몰락에 대해 관료사회에서는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정치적 과정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중경회 멤버들이 원론에는 강하지만 기능적 전문성과 업무 추진력이 떨어져 관료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경회 멤버들은 반발한다. 김태동 전 수석에 의하면 같은 생각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팀이 구성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 장현준 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도 학자 출신이 정부에 참여해 21세기 우리 사회의 비전을 놓고 관료와 아이디어 경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승화되지 못한 아쉬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어쨌든 중경회는 김태동 수석의 경질과 99년 5월 말 윤 부위원장의 포르투갈 국제회의 참석 도중 사표 제출 강요를 기점으로 사실상 국민의 정부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었지만 그 맥은 꺼지지 않고 국민의 정부 경제정책의 주요 기조로 여전히 이어졌다. 또 이 같은 기조는 노무현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학현학파 멤버들이 대거 중용되면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지식인은 권력의 견제와 자문역할”

 흥미로운 사실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79년부터 친분을 쌓으며 97년 대선 때는 자문교수 그룹인 ‘새정치포럼’의 이사장을 맡았던 변 교수가 노무현 대통령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다는 점이다. 후보시절 노 대통령은 변 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축은 이정우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대표된다. 또 기업 구조 조정 측면에서는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이 야전 사령관이다. 두 사람 모두 분배를 중시하는 학현학파의 핵심 멤버다.

 두 사람을 비롯해 노무현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학현학파의 대부분은 중경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노선은 일맥상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강 위원장은 99년 발간한 저서 <재벌 개혁의 경제학>에서 전경련을 문화재단으로 전환하고 공정거래위원회의 권한을 감사원 수준으로 대폭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부패방지위원장을 거쳐 참여정부 들어서 공정거래위원장에 임명된 후에도 여전히 그의 재벌 개혁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이 위원장 역시 ‘박정희 개발 독재의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 ‘행복은 소득순이 아니라 상대 소득이 결정한다’는 논문에서 보여지듯 강력한 경제 개혁론자다. 그의 경제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선분배, 후성장에 따른 불균형 해소’로 압축된다. 입각 이전인 2002년 초 발표한 ‘경제 위기 이후 한국의 불평등’이란 논문에서도 토지보유세 강화, 종업원지주제 도입, 지식자본(교육) 분배, 지역 및 성 차별 완화 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서울대 대학원 시절에는 조순 교수와도 각별한 인연을 맺으며 조 교수의 <경제학원론> 집필을 도와주기도 했다.

 김태동 금융통화위원은 “학현학파 멤버들 중에서도 분배의 형평성을 중시하는 축에 속한다”고 이 위원장을 평가한 바 있다.

 아직 이들에 대한 평가는 성급하다. 그러나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이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에서 관료로서의 확보한 자리 매김을 했다는 점에서 지난 50년간 한국 경제를 이끌어 왔던 주요 기조들이 변화의 욕구로 가득했던 이들에 의해 어떻게 반영되고 평가될지 주목되고 있다. 또 개도국 시절의 개발 논리에서 벗어나 선진국 체제로의 진입 과정에 이들 진보적인 학자들이 경제정책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현 경제 상황에 대한 각종 인식과 해법에서의 차이도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순학파, 관료보다는 학문적 일가

 학현학파와 함께 서울대상대학파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은 조순학파다. 학현학파 멤버 가운데서도 조순 교수를 따르는 이들이 많아 조순학파는 관료집단이라기보다는 경제학자로서의 조순 교수의 이론을 존경하고 따르는 학문적 일가로 구별되고 있다. 경제학의 뿌리가 튼튼하지 못했던 당시의 경제학계에서 정통 경제학을 공부한 조 교수의 등장에 학생들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국내에 케인스 이론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한편 국내 최초의 경제학 교과서로 불리는 명저

 <경제학원론>은 현실 사회의 이해 도구로서의 경제학을 표방하며 신고전파 주류 경제학을 현실과 연결해 쉬운 문체로 설명하고 있다.

 조순학파는 규모면에서는 적지만 관료사회에서도 일정한 인맥을 형성했다. 대표적으로 학현학파의 멤버인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정운찬 서울대 총장, 김중수 한국개발연구원장,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이계식 한국개발연구원 교수 등이 꼽히며 학계에서도 김승진 외국어대 교수,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 이영선 연세대 교수 등이 조순학파로 불리고 있다.

조순학파의 경제론 기조는 안정과 균형 성장이다. 성장 제일주의가 낳은 불균형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만큼 비판적이었던 탓에 서강학파에 비해서는 비난에 가까운 비판 논문도 많다.

 이에 부총리 취임 이후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긴축 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간 한편 경제의 거품을 걷어내는 데 적극적인 노력을 보였다. 토지 공개념 도입과 한 자릿수 물가·임금 정책은 그의 작품이다. 또 한국은행 총재 재임 기간에는 안정 정책을 한층 의욕적으로 펼쳤다. “금리를 억지로 끌어내려서는 안 된다”, “돈줄을 풀어 총 수요를 확대하는 성장 정책은 실패하고 만다”는 등 원칙론을 강조함으로써 물가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학자와 관료 사이의 간극은 불협화음으로 나타났다. 부총리와 한은 총재 시절 경제정책을 둘러싸고 여당뿐 아니라 청와대 경제팀과도 숱한 마찰을 겪어야 했다. ‘안정이냐, 성장이냐’를 놓고 서강학파 출신의 이승윤 당시 민자당 정책위의장 등과의 갈등은 대표적이다.

 또 다른 서울대상대학파인 이현재학파는 경제관료 집단은 아니다. 이 교수 역시 입각은 했지만 경제정책의 직접적인 담당자는 아니었다. 그나마 박재윤 전 재무장관과 배무기 전 중앙노동위원장이 경제관료로 재임했을 뿐이다. 김광하·이성휘·정일열 서울대 교수들이 이현재학파로 불리고 있다.



 관료 출신에 의한 집단화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들 경제학파와는 달리 관료사회에서 특정인을 중심으로 집단화 과정을 거친 인맥도 한국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사자들은 실체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지만 금융권을 비롯한 경제계에서는 일반화되고 있다. ‘이헌재사단’이 주인공이다.

 이헌재사단이란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IMF 외환 위기 당시인 지난 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부총리가 외환 위기 극복이라는 절대절명의 임무를 맡아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에 취임했을 때다. 이때 이 부총리와 함께 일한 관료들과 각계 전문가그룹, 여기에 서울대(법대)와 경기고 인맥 등이 이헌재사단으로 불리고 있다.

 서강학파가 그랬듯이 이들 역시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모임을 갖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이헌재사단으로 분류되고 있는 이들 간에 서로 수인사도 나눠 보지 못한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게 경제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또 경제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다를 수 있다고 덧붙인다. 때문에 일정한 경제정책의 기조도 찾기 힘들다.

 다만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지만 이 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인연의 끈은 남다르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들 스스로의 집단성은 약할지 모르겠지만 이 부총리로부터 발산되는 힘의 영향력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이 부총리는 날카로운 성격임에도 일단 한 번 신뢰가 쌓이면 속까지 모두 드러내 보이는 스타일로 알려지고 있다. 특정한 보스를 탄생시키지 않았던 모피아와 달리 이헌재라는 특정 인물 중심의 인맥이 형성된 데에는 이 같은 그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학계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맥’이 관계에서는 이헌재사단이 유일하다는 점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헌재사단은 노무현 정권 출범 1년여 만에 복귀한 이 부총리 취임 이후 신규 임명됨으로써 금융권의 주요 인맥으로 부상했다. 10여 명이 불과 2개월여 만에 금융권의 핵심 요직을 차지한 것이다. 정기홍 서울보증보험 사장, 박해춘 LG카드 사장, 황영기 우리금융지주 회장, 정태석 광주은행장, 최범수 국민은행 투신증권인수 사무국장, 이성규 국민은행 부행장, 서근우 금융연구원 연구조정실장, 이성남·이덕훈 금융통화위원 등이 그들이다.

 또 이정재 전 금감위원장, 김영재 전 금감위 대변인,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사촌동생 이윤재 코레이 대표이사, 경기고 후배인 김규복 전 재경부 기획관리실장, 김진만 전 한빛은행장, 금감원 부원장보 출신의 김기홍 충북대 교수, 백영철 건국대 교수, 오호수 전 증권업협회장 등도 자의든 타의든 ‘이헌재사단’으로 분류되고 있다.



 서머스와 펠드스타인

 우리 사회에서 인맥은 아직까지 긍정적인 이미지보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내포돼 있다. 배타적이라는 의미에서다. 특히 관료집단을 바라볼 때 인맥은 일명 ‘줄타기’, ‘낙하산’ 등의 표현이 동원되면서 청산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흔히 경제정책은 선택이라고들 말한다. 어떤 정책을 시행하느냐에 따라 이익을 보는 집단과 손해를 보는 집단으로 이해관계가 뚜렷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관료들의 집단화, 즉 인맥의 존재는 당연히 부정적인 평가를 낳을 수밖에 없다.

 팀워크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없지 않다. 특정 관료를 위한 집단이기주의적인 인맥이 아니라 일관된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유사한 학풍의 인사들이 팀을 이루며 강력한 추진력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서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 출신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미국 경제정책을 총괄했던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부장관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감세 정책의 핵심 인물들인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대학 교수의 제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경제인맥



서강학파



구본호 석좌교수(전 울산대 총장)

김광석 전 세계경제연구소 상임자문위원

김만제 전 한나라당 의원

김병국 전 서강대 교수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

김종인 민주당 의원(전 청와대 경제수석)

남덕우 전 부총리

박성용 전 금융개혁위원장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소 이사장

손학규 경기도지사

신병현 전 부총리

이덕훈 금융통화위원

이승윤 금호그룹 고문(전 부총리)



남덕우 스쿨



김용환 전 한나라당 의원

장덕진 대륙연구소 회장

최각규 전 부총리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



서울상대학파



학현학파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강화중 금융결재원 상무

권광식 방송대 교수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원

김대환 노동부장관

김박수 대외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

김세원 서울대 교수

김수행 서울대 교수

박덕제 방송대 교수

박우희 서울대 명예교수

박주탁 한국기술교류 대표이사

신상기 경원대 교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안진원 전 청와대 정무수석실 4급

윤진호 인하대 교수

이경희 숙대 교수

이병천 강원대 교수

이정우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

이종태 (주)수국 회장

이진순 산업개발연구원장

정일용 한국외국어대 교수





경제인맥



서울상대학파



학현학파



중경회



김태동 금통위 위원(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성훈 중앙대 교수(전 농림부장관)

윤원배 숙대 교수(전 금감위 부위원장)

이선 경희대 교수(전 산업연구원 원장)

이진순 숭실대 교수(전 산업개발연구원장)

장현준 포항공대 교수(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

전철환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전 한국은행 총재)



조순학파



김승진 외국어대 교수

김중수 한국개발연구원장

김태동 금통위 위원(전 청와대 경제수석)

서준호 전 서울시 시정개발연구원장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

이계식 한국개발연구원 교수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

이영선 연세대 교수

정운찬 서울대 총장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이현재학파



강광하 서울대 교수

박재윤 아주대 총장(전 재무장관)

배무기 전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

이성휘 서울대 교수

정일열 서울대 교수



이헌재사단



김규복 전 재경부 기획관리실장

김기홍 충북대 교수(전 금감원 부원장보)

김영재 전 금감위 대변인

김진만 전 한빛은행장

박해춘 LG카드 사장

백영철 건국대 교수

서근우 금융연구원 연구조정실장

오호수 전 증권업협회장

이덕훈 금융통화위원

이성규 국민은행 부행장

이성남 금융통화위원

이윤재 코레이 대표이사(전 청와대 비서관)

이정재 전 금감위원장

정기홍 서울보증보험 사장

정태석 광주은행장

최범수 국민은행 투신증권인수 사무국장

황영기 우리금융지주 회장

한정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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