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2세들의 대권 행보가 발 빠르게 진행 중이다. 정용진(38) 신세계 부사장도 예외는 아니다. 2005년 8월 신세계 본점 개점 때 모친 이명희(63) 회장을 대신해 참석한 게 신호탄. 신세계 지분율을 늘리며 세를 키우는가 하면, 이마트 중국 텐진 4호점 개업식 땐 기자들 앞에서 “2012년까지 중국 내에 이마트를 50개까지 확대할 것”이라고 CEO 같은 목소리를 냈다. 신세계에 ‘정용진의 시대’가 개막된 걸까.
 2005년 11월30일 오후 3시 서울 충무로 1가 신세계 사옥은 술렁거렸다. 정기임원 인사 명부가 발표 날짜인 12월1일보다 하루 먼저 사내 통신망에 공개됐기 때문이다.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은 오너 이명희 회장의 사위 문성욱씨(34)의 등장. 신세계I&C 전략사업담당 상무로 영입된 그는 정유경(34) 조선호텔 상무의 남편. 이 때문에 신세계 후계가 주력사업인 유통(신세계)은 정용진 부사장, 호텔과 신세계I&C는 정유경-문성욱 상무 부부 구도로 굳어졌다는 평가도 들려온다.

 귀추를 주목해 온 정 부사장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2000년 10월 부사장 승진 후 5년 넘게 부사장 직함을 지켜온 정 부사장이었기에 이번엔 ‘때’가 오지 않았나 하는 기대(?)가 외부 시선을 집중시켰다. 정작 그는 그날 오후 같은 시각, 이마트 81호점인 남양주점 개점 행사에 참석 중이었다. 마치 임원 인사에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공식 답변은 ‘11년째 경영수업 중’

 그러나 정 부사장의 최근 족적을 추적해 보면 대권 행보에 탄력이 붙은 건 틀림없다. 일단 이 회장이 숙원사업이라며 강조해 온 8월 신세계 본점 리뉴얼 개점을 전환점으로 삼은 듯 보인다.

 애초 이 회장이 테이프 커팅에 나설 것이란 예상을 깨고 정 부사장이 등장했던 것. 신세계 오너들 가운데 ‘숙원 행사’에 참석한 유일한 인물이 그였다. 1995년 신세계 입사 후 10년간 줄곧 ‘경영수업 중’이라고 평가받던 그가 일약 ‘경영자 정용진’으로 비춰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신세계 측은 “(정 부사장의 참석은) 예정돼 있던 일”이라며, “경영자 데뷔로 확대해서 해석하지 말아 달라”는 토를 달았지만, 정 부사장에 대한 재계 관심은 더욱 증폭됐다. 곧이어 한 달 뒤인 9월, 그가 신세계 지분 매입에 나서며 ‘실력 행사’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9월12일부터 23일 사이에 모두 7차례에 걸쳐 3만7600주를 매입한 것. 1주당 평균 매입가가 39만1467원이므로 쏟아 부은 ‘실탄’만 모두 147억원에 달한다.

 정 부사장의 지분율은 4.66%에서 4.86%(91만7100주)로 높아졌다. 모친인 이명희 회장 15.33%와 부친인 정재은 조선호텔 명예회장 7.82%에 이어 넘버 3다. 계열사 15개를 거느린 신세계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신세계의 지분 매집은 곧 경영권 승계가 진행될 것이라는 증거다.

 사실 이번 인사 때 이름은 빠졌지만, 행간을 자세히 읽어 보면 정 부사장의 ‘입김’이 서려 있다. 정 부사장은 신세계 1년 매출액의 80%에 달하는 이마트의 글로벌화를 위해 중국 총괄본부 신설을 직접 제안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정 부사장은 최근 1년 새 중국에만 10여 차례 출장을 다녀온 것으로 확인됐다. 신세계 관계자는 “평소 글로벌 전략에 관심이 많던 정 부사장이 (중국총괄을) ‘제안’했고, 구학서 사장이 ‘사인’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확인해 줬다. 과거 ‘듣고 보기만’ 했던 그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셈이다.

 이는 2005년 11월14일, 중국 이마트 텐진점 개점식 때 정 부사장이 밝힌 말에서 충분히 예견된 바이다. 텐진점은 상하이 1~3호점에 이어 이마트의 4번째 중국 내 점포다. 그는 이때 “2~3년 안에 상하이 부근과 텐진, 베이징권에 점포를 각 10개로 늘리고, 2012년에는 중국 매장을 50개로 확대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2005년 8월 본점 재단장 개점식 때 몰려든 기자들에 둘러싸여 5분간 ‘포토타임’을 가진 것을 빼면, 이때가 첫 공식 인터뷰였다.

 그렇다면 정 부사장의 사내 위상은 어디까지 이르렀을까. 신세계 측은 일단 “경영수업 중이지, 경영 일선에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실제 그의 직함은 신세계 경영지원실 총괄 부사장이다. 경영지원실은 삼성과 비교하면 구조조정본부 격이다. 인사와 재무 기능이 있고, 계열사 투자 방향을 교통 정리하는 신세계 그룹의 헤드쿼터가 바로 경영지원실이다. 직속상관인 경영지원실장은 유원형(56) 부사장이 맡고 있다. 총괄이란 자리는 ‘경영수업’을 위한 자리라는 게 신세계 측 설명이다.

 일단 집무실 위치에서 그의 지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공식 집무실이 없다는 건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충무로 1가 신세계빌딩 19층 꼭대기에 그의 사무실이 있다. 회장실 바로 옆에 이 회장 신임이 두터운 구학서(60) 사장이 있고, 접견실을 사이에 두고 정 부사장 자리가 있다. 그 다음에 유 부사장실이 있다.(구 사장과 함께 신세계 빅 3 전문경영인으로 통하는 석강(57) 백화점 대표는 18층에 사무실이 있고, 이경상(57) 할인점 대표는 응암동 이마트 본사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아침 8시30분쯤 출근하는 정 부사장의 차량은 에쿠스로 구 사장과 동급이며, 유 부사장이 타는 그랜저TG보다는 한 등급 높다.

 그는 실제 신세계 주요 회의에 100% 참석하고 있다. 매월 둘째 주 수요일에 열리는 그룹 사장단 회의는 물론, 매월 초에 개최되는 백화점과 할인점의 경영실적 보고회에도 빠지지 않는다. 한 임원은 “정 부사장은 2000년께부터 모든 회의에 참석해 왔지만, 발언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월·수·목엔 백화점, 화·금엔 할인점 총괄

 요즘 정 부사장의 일과는 ‘총괄’답게 백화점과 할인점을 넘나들며 이뤄지고 있다. 월·수·목요일엔 백화점, 화·금요일엔 할인점으로 출근을 한다. 점포 개점 때마다 얼굴을 비치는 건 오래된 관행이다. 박주성 신세계 홍보실장(상무)은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요즘에만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1호점 때부터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번 참석해 왔다”고 말한다.

 개점 행사 외에도 현장 방문도 일주일에 1~2회씩은 꼭 한다.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 점장들을 당황케 하는 일도 다반사다. 3~4년 전만 해도 청바지에 모자를 눌러쓴 쇼핑객 모습으로 다녔다는데, 요즘엔 양복 차림으로 다닌다는 점이 다르다고 한다. 특히 최근엔 매장에 들러 ‘지적’도 하는 등 나름대로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최근인 12월9일 개점한 이마트 82호 점포인 오산점 개업식 때 일이다. 개점 행사 전 오산점에 들른 정 부사장이 “행사 사인물에 가려 이마트 고유 색깔(노란색)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는 게 참석자의 전언이다. 이마트 지하 1층 식품점의 케이크 코너에 최근 ‘조각 케이크’가 많이 늘어난 것도 정 부사장 지시에 따른 변화다. 지금까지 ‘제안’만 했지, ‘지시’는 하지 않았다는 신세계 측 답변과는 다른 모습인 셈이다.

 그러나 경영 승계까지 정 부사장의 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일단 다른 그룹과 같이 오너(이명희 회장)의 결단이 언제 있을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지분율 4.86%로는 힘이 달린다. 방법은 증여 아니면 장내 매입 외엔 없다.  증여시 최대 50%까지 증여세를 내야 하고, 매입하기엔 주당 45만원을 넘나드는 가격이 부담스럽다.

 박주성 홍보실장은 “정 부사장이 후계 상속하는 건 예고된 일이지만,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면서, “다만 부회장이면 부회장이지, 대표이사 사장 직함은 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신세계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