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공계 출신은 돈이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음향’과 ‘자동차 서스펜션’이라는 이질적인 두 분야를 섭렵, 사계(斯界)의 권위자로 올라선 것은 물론, 부와 명성도 얻은 과학자가 있다. 칠순을 넘긴 지금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명예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는 한편, 세계적인 오디오기기 제조업체를 경영하고 있는 주인공을 소개한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 것뿐인데, 회사는 다행히도 성장했고, 시장은 좋은 평가를 내려줬다.”

 마치 남의 일처럼 무덤덤하게 아마르 G. 보스(Amar Gopal Bose)(74) 보스사(Bose Corporation) 회장은 2004년 <포춘>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40여년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간단명료하지만, 그의 업적은 가볍지 않다. 보스 회장은 1964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연구실 한쪽 구석에서 시작해 8000여명의 종업원과 매출 규모 18억달러(약 2조원)의 음향기기 전문업체를 키운 주인공이다. 또 그의 이름은 최고급 오디오 제품에 장착되는 스피커와 동의어이다. 그래서 그는 ‘음향의 지배자’(Minister of Sound)라는 별칭도 얻었다.



 부친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

 아마르 보스는 뛰어난 영감과 상상력, 끈기, 그리고 백절불굴의 용기 등이 어우러져 이공계 출신으로는 드물게 사업가로 성공했으며, 억만장자 반열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음악 애호가들에게 ‘음악’이나 ‘음향시스템’과 동격으로 여겨지는 ‘보스 시스템’(Bose System)이라는 경이로운 스피커를 선물한 사람이기도 하다. 전기공학 박사이면서 바이올린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1960년대 초반 아무리 찾아 헤매도 만족할 만한 음향을 재생시켜 주는 스피커를 구하지 못하자 직접 제작에 나섰다. 그는 취미활동에서 시작한 사업을 키워 오디오 기기 역사에 남을 만한 브랜드를 창출해 냈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브스>지 최근 호에 따르면, 2005년 9월30일 현재 보스 회장은 12억달러(약 1조4000억원)의 재산을 보유해 미국 283위의 부자로 기록되었다. 보스 회장은 지금도 일주일에 80시간씩 일하고 있으며, 그의 이름으로 된 24개의 특허도 보유하고 있다. 보스사의 이사회 의장(회장)과 기술담당 임원이란 직위 외에 MIT의 전기공학과 컴퓨터공학부 명예교수도 겸하고 있다. 

 아마르 보스는 1929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노니 보스, Noni Bose)은 1920년대에 인도의 캘커타에서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택한 사람이다. 어린 아마르가 전기기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0살 때 미니기관차 세트를 만나면서부터이다. 새 것을 살 여력이 없던 아버지는 고장이 나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낡은 세트를 장난감가게에서 얻어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린 아마르는 가게에서도 포기한 기차세트를 어렵지 않게 고쳐 버렸다. 이 실력은 2년 뒤 라디오 수리에까지 확장됐다.

 12살 때 우연찮게 라디오 조립세트를 사서 만들어 본 그는 의외로 이 일이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전기기기를 잘 다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마르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라디오 수리를 시도해 보았는데, 기차세트와 마찬가지로 역시 실수 없이 고쳐지는 게 아닌가. 카페트 외판원을 하던 그의 부친은 보스 회장의 손재주를 보고는 가까운 라디오 수리상에 가서 손님들이 고쳐 달라고 맡겨 놓은 라디오를 가져와 보스 회장에게 넘겼다. 당시 미국은 2차대전을 치르고 있던 터라 라디오 수리공이 대부분 징집돼 일손이 무척 달리던 차였다. 의외로 이 사업은 잘 돼서 보스 회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말에도 라디오를 수리해 주었다. 어린 그가 종업원 몇 명을 데리고 일하기도 했다. 이 일은 2차대전이 끝나고 기술자들이 복귀하면서 아마르의 손을 떠났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이 보스 회장을 인문사회 계열이 아닌 공학 분야로 인도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지만, 현장경험(?)을 인정받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 진학한 것이다. MIT 전기공학과 신입생 시절 그는 음향의 구조에 관해 처음 접하게 된다. 교양 물리학 시간에 ‘공연장에서 발생하는 소리의 80%는 벽이나 천장에 부딪힌 뒤 사람의 귀에 들어오는 간접 음향’이란 사실을 배웠던 것이다. 물론 이때만 해도 이것이 평생의 업이 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라디오 수리공으로 이름 날려

 보스 회장이 스피커 제조에 손을 댄 것은 1956년 MIT 박사과정을 마칠 즈음이었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하이파이 오디오 세트를 구입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시험 삼아 취미인 바이올린을 연주, 녹음해 본 보스 회장은 소리를 들어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마치 양철을 긁는 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는 이것이 제조업체가 잘못 만들어서 그렇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제조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라디오 조립 실력을 되살려 요모조모 뜯어 본 보스 회장은 이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재생 음향을 망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보스 회장은 직접 스피커를 만들어 볼 생각을 하게 됐다. 제작방식과 기술에 모두 문제가 있다면 다른 제품을 아무리 찾아봐도 결과는 동일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보스 회장은 MIT 연구실 한쪽 구석에서 전공과는 관계없는 음향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1964년 보스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첫 작품은 이듬해에 나왔다. 구(球)에서 8분의 1을 잘라낸 것처럼 생긴 이 스피커는 기존의 스피커가 음향을 직선으로 내보낸 것과 달리 방 전체에 음향을 고루 퍼지게 했다. 보스 회장은 처음 개발한 이 스피커를 60대 만들어 이 중 40대를 팔았다. 이 스피커가 보스사의 대표상품인 ‘901 시스템’의 전신이 되었다.

 보스 회장은 1968년 이 구형 스피커를 발전시켜 ‘901 시스템’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보스사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901 시스템’과 기존 스피커의 차이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장에서 공연을 들을 때 직접 우리 귀에 들어오는 것은 20%에 불과하고, 80%의 음향은 벽이나 천장으로 날아가 버리는데, 기존의 스피커는 이 80%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또 전통적인 스피커는 그냥 소리를 ‘터뜨려서’ 귀로 날리지만, ‘901 시스템’은 직접 귀로 오는 음향을 증대시킨 것은 물론, 물체에 반사되는 소리까지도 파열음이 아닌 안정된 소리로 전달해 준다. 마치 라이브 공연장에 앉아서 음악을 듣는 감동을 누릴 수 있었으니, 오디오 마니아들에게는 ‘신의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우퍼와 트위터없는 스피커

 물론 처음부터 이 스피커가 불티나듯 팔린 건 아니다. 이 ‘901 시스템’은 기존의 스피커와 달리 우퍼(woofer)와 트위터(tweeter) 등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보통 스피커는 저음을 생산하는 우퍼와 중·고역 음향을 재생하는 트위터를 캐비닛에 넣은 투웨이 방식을 채택했다.) 새로운 형식이라고 해서 특허등록을 퇴짜맞은 것은 아니지만, 판매에는 애를 먹었다.

 초기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보스 회장이 미국 동부의 한 도시에 있는 오디오전문점에 스피커를 납품하고, 며칠 뒤 다시 매장에 들려 보니 스피커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치워져 있었다. 가게 주인 왈,  손님들이 와서 궁금해 하기에 “신형 스피커”라고 했더니, “우퍼와 트위터가 없는 이런 스피커가 어떻게 작동하느냐”며 화를 내더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한 번도 이런 식의 ‘튀는’ 스피커를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스 회장은 실험실로 돌아와서 오디오매장 주인들에게 ‘901 시스템’을 어떻게 고객들에게 설명할지 가르쳐 주는 7분짜리 녹음테이프를 만들어 오디오매장에 보내주었다. 요즘으로 치면 ‘사용설명 동영상’을 제작한 셈이다.

 보스 회장은 “당시로서는 우퍼와 트위터가 없는 스피커는 일종의 ‘신성모독’처럼 여겨졌다”며, “비록 우리 제품의 사운드는 훌륭했지만, 사람들의 선입관에 반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고 회상했다.

 이후 직접 사운드를 들어본 음악 애호가들이 입소문을 내준 데 힘입어 시장점유율을 높여 갔고, ‘901 시스템’은 보스사의 대표주자로 소비자들에게 각인될 수 있었다. 미국 뉴욕시에 위치한 마케팅회사인 NPD에 따르면, 미국 가정용 음향기기시장에서 보스사는 시장점유율 12.6%로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901 시스템’은 첫 출시 이후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팔리고 있다.

 스피커는 어렵사리 제작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경영이었다. 스피커를 만드는 것보다는 파는 게 훨씬 더 어려웠다. 그 자신이 과학자였지 경영에는 문외한인 터라 처음에는 자금관리가 숙제였다.

 규모가 작을 때는 그럭저럭 주변의 도움으로 넘어갔지만, 어느 정도 회사가 알려지고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갈 때 큰 위기가 닥쳤다. 대출이자율이 22%를 웃돌며 상승곡선을 그리던 1980년대의 일이다. 대부분 중소 규모 전자회사들이 도산하고, 은행들도 위기감에 휩싸여 자금 융통이 빡빡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보스사는 제너럴모터스(GM)에 납품하기 위해 새로운 자동차 오디오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점점 험악해졌다. 급기야는 은행들이 자본비율을 높이라며 기업공개를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비상장으로 회사를 경영하겠다는 것이 그가 창업할 때부터 지키려던 원칙이었는데,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는 ‘보스사를 공개한다는 것은 회사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GM의 경영진을 찾아갔다. 은행이 어떤 식으로 자신과 회사를 압박하고 있으며, 대출 규모가 1400만달러에 이른다는 사실을 하소연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회사를 공개할 수 없다’고 설명했던 것이다. 몇 주가 지난 후 GM 계열사인 델코전자 대표인 에드 차포르가 보스 회장을 호출했다. 보스 회장이 디트로이트로 날아가자, 그는 회사 재무담당임원을 소개해 주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재무담당임원은 보스 회장이 개발 중인 새 오디오 시스템 얘기를 듣더니 보스턴의 주거래은행에 연락해 보스사 거래은행의 대출을 전부 이관해 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줬다. 지금은 파산설에 휩싸일 정도로 경영이 어려운 GM이지만, 당시만 해도 웬만한 하청업체는 이렇게 도와줄 여력이 있었다.

 이것 말고도 델코전자는 보스사에 70만달러 상당의 생산기기를 무상으로 지원해 주기도 했다. 차포르 대표는 “지금까지 1년 동안 우리와 함께 일하면서 보스사가 한 푼도 우리에게 청구한 일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이제는 보스사를 도와야 할 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스 회장은 위기를 극복해 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보스 회장은 자연스럽게 경영원리를 습득할 수 있었다. 이때 몇 가지 원칙을 세운 게 있는데, 첫 번째 원칙이 ‘기술개발에 목숨을 걸 정도로 치중하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보스사는 법인세 산정 후 순익 전액을 연구개발비로 재투자하는 아주 독특한 회사가 됐다. 회사의 이익이란 게 발생하지 않는 셈이다. 18억달러 규모의 매출이 사실상 고스란히 연구개발비로 투자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영진을 포함한 종업원들의 급여는 외부 기관에서 원가 및 제반 비용을 산정해 판정해 주고, 임직원들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재밌는 부분은 보스 회장을 포함, 경영진보다는 현장 직원들의 연봉이 더 높다는 점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연봉 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이공계 출신 기술자들인 직원들은 만족해 한다. 보스 회장처럼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월급을 받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종업원 지주제 중심의 비공개 기업

 또 하나는 소유구조의 문제인데, 종업원 지주제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비공개기업으로 회사를 꾸려 나가고 있다. 보스 회장은 창업 초기부터 “대차대조표가 대표이사를 해고하는 자료가 돼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40여년간 풍상(風霜)을 많이 겪으면서도 절대 상장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보스 회장은 최근 <기업뉴스>(Inc. Magazine)와의 인터뷰에서 “상장기업에서 주주들은 회사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나 경영진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결정들을 하곤 한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어 “대부분 주주들은 해당 기업의 업무와는 동떨어진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며, “이는 회사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보통 상장회사라면 CEO가 임기 중에 주주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겠지만, 우리 회사는 다르다. 좋은 연구결과는 그런 분위기에서 절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마 우리 회사가 상장회사였다면, 열두 번은 이 자리(대표이사 회장)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수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의 자금이 특정한 프로젝트에 투입됐는데도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연구원 수십명에, 나 자신도 일주일에 30시간씩 매달렸는데도 말이다. 일반 상장회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상장회사는 90일마다(분기 실적발표) 시장을 즐겁게 해줘야 하기 때문에 우리처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현재 보스의 이사회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학장이나 MIT 제자들 중 똑똑한 학자들, 그리고 내가 자문받는 회사의 임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의 경우 다른 상장기업들과 달리 세후 이익 전액을 연구개발비로 투자한다. 이상적인 얘기긴 하지만, 내 꿈은 언제나 모든 이익을 전액 연구비로 투자해 어느 개인이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비영리 교육재단을 보스사 내부에 설립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차원에서 회사에 대한 내 개인 지분 전부를 기부했다. 이 지분을 기반으로 나오는 이익금을 모두 장기 연구비로 쓰고 있다. 내 월급이 얼마냐고?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내 급여는 외부의 독립적인 기관에서 산정한 수준에서 결정된다. 이 기관은 우리와 유사한 규모와 업종의 다른 회사와 비교해 급여 수준을 결정한다.”

 이렇게 제조업체로서는 독특한 소유구조와 원칙을 갖고 있는 덕분에, 보스사의 신제품은 나오는 데 10년씩 걸리기 일쑤다. 두 번째 히트 상품인 ‘301 시리즈’와 ‘웨이브 라디오’가 나온 것은 14년간의 연구기간이 경과한 후였다. 보스 회장이 1978년 출장에서 돌아오던 길에 얻게 된 ‘소음을 없애 주는 헤드폰’에 대한 영감은 제품화 되는 데 20여년이 걸렸다. 당시 그는 비행기에서 좀 쉬려고 했는데, 엔진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등으로 방해를 받았던 것이다. 보스 회장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5년 뒤 연구에 들어간 이 제품은 지난 2003년 개발이 완료돼 ‘조용한 안식’(Quiet Comfort)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이 제품은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 헤드폰처럼 생겼지만, 소음을 상쇄하기 위해 소음이나 잡음의 음파와 정반대 파장을 가진 음파를 발생시키는 헤드폰이다. 그래서 이 헤드폰을 착용하면 시장 바닥에 앉아서도 독서는 물론 조용히 명상까지 즐길 수 있다. 보스의 기술력은 소리를 가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리를 없애는 경지’에까지 도달한 셈이다. 이 밖에 심한 경우 제품 개발에 25년씩 걸린 경우도 있다.



 자동차 서스펜션 사업에 뛰어들다

 최근 발표한 ‘보스 자동차 서스펜션 시스템’은 1980년에 시작된 프로젝트이다. 자동차업계의 CEO 평균 재임기간이 4년7개월에 불과한 현실에 비춰 보면, 다른 회사에서는 이런 연구를 수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보스 회장이 고집스럽게 ‘비상장, 연구개발 중시’라는 원칙을 밀고 나간 덕분에 아무도 해고당하지 않고 서스펜션시스템이 탄생할 수 있었다.

 보스사의 서스펜션시스템은 보스 회장이 오디오시스템 개발에 뛰어들기도 전인 1950년대에 이미 관심을 가졌던 분야다. 보스 회장은 이와 관련, “1950년대 파리에서 시트로엥자동차를 잠깐 보고는 매혹된 일이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와 즉시 이 차를 샀는데, 시트로엥의 서스펜션은 아주 훌륭해서 운전을 하면 마치 길 위를 떠다니는 느낌이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MIT 학생들에게 이 차와 관련된 시험문제를 낼 정도로 자동차에 빠졌는데, 스피커 개발에 매달리면서 잠시 밀어뒀다 1980년에 다시 꺼냈던 것이다.

 보스 회장이 파악한 당시 서스펜션의 실정은 이러했다. 먼저 고급세단과 스포츠카의 운전상황을 관찰해 보니 회전하거나 브레이크를 밟을 때 양쪽이 반대 양상을 보였다. 스포츠카의 경우, 스프링과 압소버로 구성된 서스펜션에서 제동기(damper)와 스프링을 좀 빡빡하게 만들면 코너를 돌 때 전혀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탈 때마다 척추치료를 매번 받아야 할 정도로 전혀 충격을 흡수해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반면 고급세단은 코너를 돌 때 다소 흔들린 반면 승차감은 좋았지만, 평지를 달릴 때 멀미가 날 정도로 서스펜션이 너무 부드럽게 작동한다는 점을 파악했다.

 보스 회장은 양자의 단점은 없애고 장점을 살리기로 마음먹고, 연구원들에게 작업을 개시하도록 했다. 연구원들은 유체역학과 수리역학까지 동원하는 등 가능한 모든 방면에서 이 문제를 접근했지만, 20년이 지나도록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2000년경 다소 복잡한 구조가 도출됐다. 이를 설계도로 옮겨 보니 책상에서는 완벽해 보이는 서스펜션이 나왔지만, 이게 진짜 원하는 대로 작동할지 의문스러웠다.

 이 문제의 최종 해결책은 특수 제작한 전자기 모터를 각각의 바퀴에 장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운전자가 회전을 위해 핸들을 꺾고 바퀴에 힘이 전달되면, 모터가 작동을 시작해 바퀴의 축을 늘렸다 줄였다 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이 모터는 자동차가 험한 환경에서 주행할 때도 전후좌우로 흔들리는 일을 막아 주었다. 말하자면 스포츠카의 코너링 능력을 가졌지만, 고급세단처럼 편안한 승차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스사는 먼저 프리미엄급 승용차에 이 제품을 장착해 테스트해 볼 계획이다. 가격은 양산체제로 간다면 평균적으로 싸질 수 있겠지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

 보스 회장은 스피커산업과 교직 양쪽에서 대체로 성공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가 천재 축에 드는 사람은 아니다. 그보다는 열심히 과업을 수행하고 기존의 사고방식을 뒤집는 ‘역발상’과학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MIT에 입학한 직후 이런 일화가 전해온다. 비록 어릴 적부터 라디오 수리 등으로 현장 실습은 쌓아 둔 보스 회장이었지만, 미적분은 거의 까막눈 수준이었다. 과학의 기초인 수학실력이 부족하니 강의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낙제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자, 그는 자유분방했던 고등학교 시절과는 달리 밤잠을 아껴가며 끈기 있게 수학에 몰두해 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MIT에 입학한 지 9년 뒤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따는 것과 동시에 MIT 교수진에 포함된 보스 회장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강의와 관습을 깨는 시험실시 등으로 학생들에게 컬트적 숭배까지 받게 이른다. 그는 강의실에 칠판 아홉 개를 들여놓고 수업을 학생들이 질문하는 내용 위주로 진행했으며, 시험시간에 제한을 없애고, 주로 오픈북 시험을 실시했다.

 그래서 보스 교수의 수업을 소화해 내려면 엄청난 양의 과제를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학 수업시간은 학생들로부터 ‘MIT에서 반드시 들어야 할 강의’로 꼽혔다. 그의 수강생 중에는 수학과, 물리학과는 물론 심지어 생물학과 학생들까지 끼여 있었다. 존스홉킨스대학 총장을 역임한 윌리암 브루디 박사는 1962년 보스 교수의 강의를 들었는데, “한때 350명까지 수강생이 들어찬 일이 있는데, 집중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강의 중에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라고 회상했다.

 이와 함께 현재 보스 스피커가 일본에서 현재 베스트셀러 오디오기기로 꼽힌다는 사실에서도 보스 회장의 성공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의 방송인인 폴 하비는 보스 회장을 두고 “현대의 토마스 에디슨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음향과학 기술은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것만큼 중요한 인류사의 진보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보스 회장도 실패의 쓴 맛을 본 일이 있다. 1970년대 보스 회장이 그의 에너지를 일본으로 돌렸을 때, 그 결과는 예상 밖의 참패였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3년 동안 보스사는 겨우 100대밖에 팔지 못했다.

 보스 회장은 나중에 <기업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참담했다. 우리 회사가 기술적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일본 소비자들이 완전히 외면하는 바람에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라고 당시의 힘든 상황을 토로했다.  그는 또 “일본 소비자들이 품질을 중시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보스 제품이 이렇게 천시당하자 그냥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사실 보스사만 이런 박대를 당한 건 아니다. 1970년대 일본은 자존심으로 똘똘 무장하고 있어서, 여타 다른 미국 회사들도 진출이 쉽지 않았던 터이다. 하지만 스피커에 대해서만큼은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결과였다. 그나마도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건 일본정부가 외국제품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 소비자들의 접근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인간은 100개의 실린더 갖고 있다”

 물론 보스 회장은 이 실패에서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시 일본시장을 분석해 시장 확보에 성공했다. 그는 “실패에 대해 핑계를 댈 수는 있겠다. 정부규제나 싼 인건비 때문에 졌다고 말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소비자와 시장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의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결과 일본 재진출 10년 만인 1984년 한해 동안 보스사는 월 평균 1200세트씩 스피커를 파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은 ‘보스는 최고의 스피커’라는 평판을 얻었다.

 사실 이 일 이전까지 보스 회장은 가히 실패를 모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겸손함을 배운 보스 회장은 이후 인도시장 진출 때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아버지의 고향 인도에 진출한 그는 앞으로 스피커 제조회사 외에도 소프트웨어회사에도 투자할 계획이다. 보스 회장은 인도의 <이코노믹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인도의 기술적인 장점을 취하고, 그들의 약점인 경영 및 관리 기술을 전수할 생각”이라며, “어쨌든 인도는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강국이니 계속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인생관은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일에 집중돼 있다.  보스 회장은 위기에 대해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아예 가라앉든지, 남보다 앞서 가든지 둘 중 하나를 해낼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한국식으로 얘기하자면, ‘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가 합쳐진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또 후학들을 가르치고 연구원들에게 신제품 창출을 위해 분발하라고 할 때, 그는 “인간은 100개의 실린더 엔진을 갖고 있으면서 평생 한 개도 제대로 못 쓰고 죽는다”는 말을 자주 썼다. 현실이 어렵더라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우리 내부의 잠재 가능성을 믿고 달린다면 못 할 일이 없다는 얘기로 해석된다.